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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미식에 대한 욕심이 만들어 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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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미식에 대한 욕심이 만들어 낸 부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2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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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 한 상자의 가격은 여성노예 몸값 3~4배의 가치
석유가 나오기 전까지 ‘검은 금’이라는 별칭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사람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활동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를 확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지구상에 있는 각 지역은 환경에 맞는 음식이 발전했다. 그래서 맛과 모양, 그리고 재료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으로 쓰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향신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옛날부터 음식에 향신료를 사용했다. 물론 향신료의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시기가 차이는 있겠지만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어 사람의 입맛을 훔쳤다고 한다. 향신료가 되는 식물은 다양했고 열매나 씨앗, 꽃, 뿌리 등 모든 게 향신료로 사용되었다. 향신료는 향을 내기도 했지만, 색이나 맛을 내기도 했다. 어류의 비린내도 가렸다. 육류의 경우 도축기술이 떨어지거나 보관이 잘못되면 누린내가 나기 쉬웠는데 이를 가릴 때 향신료를 썼다.
 
지금은 이동수단이 다양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보낸 물건도 며칠 만에 받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된 것은 겨우 50~60년밖에 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물건의 이동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향신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향신료는 아시아와 유럽의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서 전달되다보니 값어치가 높았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향신료 무역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닷길을 개척해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향신료를 선점하게 된 포르투갈은 카자 다 인디아(Casa da India)라는 무역관청을 만들고 향신료 무역을 시작한다. 인도에서 구한 향신료를 유럽으로 가져와 두 배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 다. 이 소식은 빠르게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교황에게 아시아 무역을 인정받은 포르투갈이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에스파냐에 통합되는 일이 발생한다. 기회를 노리던 주변 나라들은 포르투갈의 공백을 메워갔다. 1595년에 프레데릭 하우트만(Frederick de Houtman)과 1598년에 야곱 판 넥(Jacob van Neck)이 인도네시아에서 후추를 가지고 왔는데 400%의 이윤을 남기며 무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한다. 
 
잉글랜드도 뛰어들어 103만 파운드의 후추를 가지고 왔지만, 소비량이 1/4에도 미치지 못해 프랑스 같은 주변 나라에 팔아야 했다. 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식에 프랑스도 1615년 몰루카회사, 1643년 동방회사를 진출시키고 덴마크는 1616년 동인도회사, 1731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오스텐드회사, 스웨덴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우리가 예측하듯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텃세에 밀려 뚜렷한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향신료의 종류도 강황, 육두구, 겨자, 계피, 생강, 정향, 산초를 포함해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이 바로 후추였다. 거래의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쓰였지만, 화폐로 사용된 경우도 있어 석유가 나오기 전까지 ‘검은 금’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했다. 
 
후추 한 상자의 가격은 여성노예 몸값 3~4배의 가치가 있었다. 집세를 낼 때 돈 대신 후추를 내는 경우도 있을 만큼 후추는 화폐의 값어치가 있었다. 인도와의 교역을 통해 돈을 벌려고 동인도회사를 만든 두 나라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후추를 두고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결전을 벌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승리한 네덜란드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쫓겨난 잉글랜드가 인도에 겨우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주식회사의 체계를 갖춘 네덜란드가 잉글랜드보다 동인도회사를 잘 운영했다. 무역하던 인도네시아에 현지 상관을 개설하고 현지 직원을 상주시켰다. 직원은 향신료의 값이 싸질 때 이를 사들여 창고에 저장해두었다. 상선이 오면 향신료와 다른 무역품을 유럽에 실어 보냈는데 이런 형태의 발 빠른 운영을 통해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17세기 초 아시아 후추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잉글랜드를 앞서갈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이강희 칼럼니스트
이강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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