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5:17 (화)
[지구를 떠도는 부(富)] 잉글랜드를 점령한 네덜란드 금융
상태바
[지구를 떠도는 부(富)] 잉글랜드를 점령한 네덜란드 금융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05 12: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잉글랜드를 절대왕정에서 의회주의로 만든 대표적인 사건,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두 사건의 실질적인 원인은 돈, 그중에서도 조세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잉글랜드를 절대왕정에서 의회주의로 만든 대표적인 사건이 청교도혁명(1642~1651년)과 명예혁명(1688년)이다. 종교와 정치적 이슈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두 사건의 실질적인 원인은 돈, 그중에서도 조세다. 여러 이유를 들어 왕이 세금을 걷자 돈을 빼앗기기 싫어했던 귀족과 자본가가 합세해서 의회라는 간판으로 왕을 쫓아낸 것이다.
 
장미전쟁 이후 귀족 세력은 위축되었고 빈자리를 젠트리가 채워갔다. 토지를 팔아 재정을 충당하던 왕실은 더는 팔 재산이 없어지자 세금을 걷어 필요한 경비를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따라 관습상 인정되는 과세 외의 세금을 함부로 부과할 수 없었다. 

전쟁 패배로 뒷감당해야 할 비용이 필요했던 찰스 1세는 전시에 항구에만 부과했던 선박세를 평시 내륙으로 확대해 전국적으로 거두고 수출입관세를 올리려 했다. 의회가 승인하지 않자 1629년 3월 의회를 폐쇄하고 11년이 넘도록 동의 없는 과세로 나라를 운영했다. 이후 비난 여론과 스코틀랜드 공격을 막는데 돈이 필요해 다시 의회를 열었지만, 갈등이 증폭되며 내란으로 번졌다.
 
1649년 내란에서 패한 찰스 1세를 참수하고 잠시 공화정이 시행되지만, 크롬웰의 사망 후 1660년 찰스 2세에 의해 왕정이 복고된다. 복고 후 의회는 왕실의 재정을 위해 난로세를 비롯한 여러 세금을 부과했다. 의회와 매끄러운 밀당으로 협치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던 그는 동생인 제임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믿는 왕비와 재혼해 아들을 낳자 의회는 신교도에 대한 탄압을 우려했다. 이에 의회는 신교도였던 왕의 큰딸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 통치자 오라녜에게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들어와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했다. 오라녜는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잉글랜드마저 가톨릭 국가가 되면 상당한 위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1688년 11월, 오라녜는 1만 5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왕궁으로 진격했다. 이때 8천여 명 유대인도 잉글랜드로 같이 갔다.

가장 먼저 닥친 문제는 재정적자였다. 국고는 바닥을 보였고 세금을 올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1690년 프랑스와 비치 헤드 해전(Battle of Beachy Head)에 패하자 해군력 강화하기 위해 1692년 네덜란드처럼 국채를 발행했다. 왕에게 빌려주는 방식이 아닌 국가가 채권을 발행해서 비용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발행한 국채를 소화할 시중 자금이 부족해 한계가 있었다.
 
유대 금융인들은 스코틀랜드의 금융인을 내세워 전쟁기금을 모금하는 단체를 만들어 비용을 조달하고 은행권을 발권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1694년 주식공모로 투자자를 모았다, 모인 자금으로 채권을 매입해 정부에 돈을 지원하고 부족한 부분은 은행권을 발권해 채웠다. 이런 금융기법을 위해 만들어진 민간중앙은행이 바로 ‘영란은행’이다. 이후 잉글랜드가 국채를 발행할 때마다 인수해 정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이강희 칼럼니스트
이강희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