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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109세인 할머니가 정정하게 건강장수를 이어가 화제가 되고 있다. 주인공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 3동에 사는 최금선씨.최씨는 1901년 5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구한말 남한산성 수비대장 최경재 어르신과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유완순 어르신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 때 용인의 부농이었던 전화춘 어르신(작고)의 맏며느리로 시집가 남편(전복록)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낳았다.지금부터 94년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얘기다. 4대 가족 10명 오순도순 살아자신을 ‘소띠’라고 소개하는 할머니는 그러다 70대에 남편을 잃고 큰 아들(전기준․ 2005년 여름 83세 때 작고)의 보살핌을 받다 지금은 3남인 전기열 씨(71․전 교사) 집에서 증손자까지 4대가 함께 살고 있다.3층으로 된 대림동 주택 1층엔 막내손자(39․신학대 졸업, 전도사로 어린이 집 운영), 2층엔 큰 손자(45․서울 구로구 예신장로교회 목사) 부부와 증손녀(1녀3남), 3층엔 아들부부와 할머니가 산다. 핵가족시대 한 집에 4대 가족 10명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어 눈길을 끈다.최 할머니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대목이다. 최 할머니는 현재 고령임에도 잔병치레 한번 없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올 봄 엉덩이 쪽의 고관절을 다치긴 했으나 지금은 다 나아 움직이는데 지장 없다. 이에 앞서 100세 때 녹내장수술을 받은 뒤로 시력이 좋아져 안경 없이도 성경책을 보고 찬송가도 부른다. 물론 보청기를 끼지 않고 지낸다. 청력이 좋은 까닭이다.할머니는 올해 넘어져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집안청소와 자신의 속옷 등을 세탁기 대신 직접 빨아 입을 만큼 정정했다. 비누로 직접 세탁해 늘 속옷이 깨끗했다.할머니를 모시는 아들 전기열씨는 “어머니가 젊었을 땐 쌀 한가마니를 번쩍 든 여장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로부터 타고난 체력을 물려받은 것 같다”면서 “어릴 때 들은 얘기로 남한산성 수비대장이었던 외할아버지가 호랑이를 때려잡은 장사다”고 말했다. 최 할머니 친정이 장수집안이어서 바로 위 언니(최얌전 씨)도 102세에 별세했다.전 씨는 “어머니의 장수비결은 특별한 게 없다. 일상생활습관 속에서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수년 째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지켜본 전 씨 얘기를 통해 그 비결을 알 수 있다.  자녀들에게 “손해 보는 듯 살아라” 당부첫째, 맺힌 것 없는 성격 갖기다. 모든 일에 잘한 것, 잘못한 것을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뒷말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다. 평소 스트레스가 마음속에 남지 않으며 긍정적인 맘으로 매사 ‘닥치면 해결하면 된다’는 식으로 걱정근심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녀들에게 “손해 보는 듯 살고 적당히 져주면서 살아라”고 당부한다.둘째,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다.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들고 오전 4시면 일어난다. 매일 정확하게 7시간동안 잠을 잔다는 계산이다. 취침과 기상은 시계바늘처럼 정확하다. 셋째, 음식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채(나물), 과일(사과), 고기류 등 무엇이든 잘 먹는다. 식사는 하루 세끼 꼭 든다. 꿀이나 몸에 좋다는 건강보조식품도 즐겨 보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때그때 몸에 이로운 약재들을 챙겨 드신다. 식욕 역시 아주 왕성한 편이다. 틀니지만 씹는데 지장 없다. 술, 담배를 않는 대신 군것질을 즐긴다. 사탕, 야쿠르트, 요플레, 우유 등을 좋아한다.넷째, 몸을 많이 움직인다. 특별히 운동하는 건 없지만 집안청소와 자신의 소지품, 옷들을 정리 정돈한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더욱이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새벽에 일어나 부르는 노래 소리가 옆집에까지 들릴 정도다. 어르신답지 않게 우렁차게 부르며 성경 읽기, 라디오 듣기를 즐긴다.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끈다. 대신 전자파가 싫다며 전기장판은 피한다.다섯째, 청결한 몸 관리다. 목욕시설이 썩 좋지 않은 때도 물을 끓여 자주 몸을 씻었다. 추운 겨울에도 예외가 아니다. 발, 목, 배를 매일 두 번 이상 마사지와 지압을 겸해 씻는다. 요즘엔 아들 전기열 씨가 매일 아침 족욕을 시켜드린다.여섯째, 신앙심이 강하다. 기독교신자로 늘 ‘하늘이 도와준다’고 생각하며 기도에 힘쓴다. 도림교회(신자 3,000여 명) 권사지만 교회로 가지 않는 대신 심방 오는 신자들과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린다. 안경, 보청기 없이도 잘 보고 들어할머니는 특히 몸을 스스로 낫게 하는 자연치유법을 잘 알고 있다. 몇 달 전 엉덩이뼈가 부러졌을 때 병원에선 나이가 많아 치료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입원 3시간 만에 집으로 와 아무 말 없이 닷새를 굶었다. 자신만이 아는 자연치유법에 들어간 것이다.가족들은 할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닷새 뒤 스스로 일어나 식사를 한 것이다. 그 뒤 병원에서까지 포기했던 엉덩이뼈는 자연치유로 아물었다. 동물이 병들면 스스로 굶어 낫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1년 전엔 키우던 개가 병에 걸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으나 살아날 가능성도 적고 치료비도 만만찮다며 돌려보냈다. 할머니는 개를 개집에 들여놓고 모포로 꽁꽁 싸맨 뒤 며칠을 굶겼다. 그러자 개는 병이 나아 지금까지 살아 멀쩡하다. 어르신은 ‘우리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자연의 순리와 생명의 법칙을 오랜 삶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아들 전기열 씨는 “어머니가 지금처럼 건강을 유지하면 115세까지는 사실 것 같다”면서 “세계 최장수 기네스북 기록을 깼으면 좋겠다”고 건강장수를 빌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9-10-27 00:00

<불황기 창업 새 흐름>창업 최대 밑천은 ‘살아있는 경험’ 실전경험 없는 창업은 망하는 길창업을 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잘 되기보다 못되는 경우가 더 많다. 창업에 나서는 사람은 이런 점을 늘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것에 접목시켜 성공으로 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대목들을 꼼꼼히 적어 실전에 활용하는 게 창업의 필수조건이다.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성남에서 갈비집을 하는 50대 초반의 영남출신의 김모씨. 지난해 가을 20여년 다니던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전혀 경험 없는 식당을 차려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요즘 죽을 맛이다. 장사가 너무 안 되기 때문이다. 식당을 처분하려고 해도 쉽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김씨는 건설사에 다녀 건물을 보는 데는 나름대로 전문가다. 게다가 기획부서에서 일했던 덕분에 컴퓨터도 잘 다룬다.인터넷으로 식당 창업에 대해 충분히 연구했다. 실전이 아니라 책상머리에서만 전문가가 됐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컴퓨터상의 식당전문가’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생각했던 것과 맞아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김씨는 식당 창업에 2억원을 투자했다. 종업원도 4명이나 고용했다. 음식 값은 ‘고급화’ 전략를 썼다. 부근 다른 식당들보다 좀 비싸게 했다. 차별화한다는 생각에서다.갈비집 문을 여는 날 그는 기분이 좋았다. “이 정도면 돈을 좀 벌겠다”고 싶었던 것이다. 개업 첫날이라 친구, 친지, 처가식구들과 동네사람, 같이 다니는 교회신자들까지 많이 와줬다. 매상도 꽤 올랐다. 그 뒤 중·고교 동창회, 고향사람들의 향우회, 옛 직장 동료만남도 그곳에서 여는 바람에 장사가 잘 됐다. 문제는 두 달쯤 지나면서부터였다. ‘개업 약발’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석 달쯤 됐을 때 ‘갈비집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장사가 너무 되지 않아서였다. 남기는커녕 인건비도 건지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는 식당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막연하게 하루에 손님 몇 명이 오면 얼마의 수입이 들어오고 인건비, 임대료, 재료비 등을 빼고 나면 얼마가 남을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했을 뿐이다. 컴퓨터를 쳐가며 사업성을 따질 땐 분명히 이익이 났는데 실전은 달랐다.김씨의 실패요인은 뭘까. 갈비집 운영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였다. 맛도 차별화하지 못했다. 그의 갈비집이나 부근의 다른 집이나 맛은 그게 그거였다. 값만 비싸니 손님이 한번 오고는 외면해버린 것이다. 무뚝뚝한 성격 장사엔 걸림돌무뚝뚝한 김씨 성격도 문제였다. 평소의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 건설사 간부시절엔 성격이 좀 무뚝뚝해도 버틸 수 있었다. 식당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손님이 오면 일단 ▲고개부터 숙이고 ▲기분이 나빠도 내색을 하지 말고 ▲손님을 왕처럼 받들어 모시질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게 큰 흠이었다.이 보다 더 결정적인 실수는 주방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주인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주방장이 잘 움직여주질 않았다. 주방장에게 늘 끌려 다녔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면 음식 맛이 떨어졌고 손님들 불평이 이어졌다. 김씨는 “갈비집에 가서 심부름이라도 몇 달 했어야 했다”며 후회를 했지만 때는 늦었다. 투자비를 자꾸 까먹는 마당에 후회는 소용없었다. 김씨처럼 무턱대고 창업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엔 의외로 많다. 창업만 하면 돈을 벌 것으로 쉽게 생각한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또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내 고객이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잖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창업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경기도 일산에서 샤브샤브집을 연 민모씨. 그도 가게성적이 좋지 않다. 친구의 경양식집을 자주 드나들다 우연한 기회에 장사를 하게 됐다. 이론적으론 잘 알고 있었지만 성남의 김씨처럼 실전엔 약했다. 식재료를 사는 일에서부터 음식 만들기까지 경험이 전혀 없었다.그는 결국 퇴직금으로 쏟아 부은 투자액(1억원)만 다 날리고 지난해 말 문을 닫았다. 다행히 경양식집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접는 바람에 큰 손해를 면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민씨가 잘 되지도 않는 경양식집을 오래 갖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빈털터리가 돼 빚더미에 나 앉았을 게 뻔하다.직장을 그만둔 대부분의 사람들, 전문지식이 없는 이들이 쉽게 시작하는 사업이 먹는 장사다. 하지만 식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사례에서 보듯 얼마 안가서 깨닫게 된다. 너도 나도 식당을 연다는 것은 그만큼 망할 위험성이 크다는 얘기도 된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블루오션’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이 치열하게 싸우는 ‘레드오션’이기 때문이다.  식당창업 땐 잘 되는 곳 답사 필수 식당개업에 뜻을 두고 있다면 반드시 주변에 잘 되는 식당을 둘러봐야 한다. 그냥 가서 기웃거리지 말고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양해를 얻어 주방도 들여다보고 종업원, 주인의 태도도 눈여겨봐야 한다. 인테리어, 집기, 가격, 서비스내용, 주차장 시설 등도 알아봐야 한다. 세무처리, 아래 사람 관리 기법을 터득하는 건 말할 것 없다. 방문했던 곳보다 더 맛있고, 싸고, 친절하게 할 수 없다면 섣불리 창업해선 안 된다. 다른 업종을 택하든지 차라리 그냥 쉬는 게 낫다. ‘남이 버니까 나도 벌 수 있다’는 생각, 조금만 배우면 되겠지 하는 생각, 알았던 사람들이 도와주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창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돈으로만 하는 건 더욱 아니다. 오직 ‘경험’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경험자들도 창업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게 있을까. 대안으로 ‘위탁형 창업’이 있다. 장사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망투자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여러 명이 투자하므로 경험이 없어창업을 망설였던 초보창업자들도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창업대열에 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공동투자 형태여서 실패확률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투자자들은 일정액을 공동투자하고 지분에 따라 이익금을 나누는 형태다. 본사입장에서도 큰돈 들이지 않고 직영매장 수를 늘릴 수 있고 운영노하우를 활용, 점포를 빨리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동창업은 투자부담을 분산, 위험요소를 낮추면서도 규모 있는 점포를 낼 수 있어 수익성이 높은 편이다. 공동투자창업 위험분산 가능투자자는 자신이 낸 돈의 비율만큼 월수익금을 나눠가지면서 정기적 만남을 통해 경영현황을 알 수 있다.세계맥주전문점 ‘와바’(www.wa-bar.co.kr)가 그런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사업모델을 개발해 놓고 있다. 서울지역에 여러 명이 함께 투자해서 한해 20%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영업점들이 여러 곳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문을 연 와바매장은 17명이 동참한 국내 최대 규모의 공동투자형 매장이다. 영업장 크기만 660여㎡에 이른다. 제약사·항공사 임원, 대기업 직원, 자영업자 등 여러 직업을 가진 투자자들이 4.5~9%씩 모두 13억원을 투자했다. 이들의 전체지분은 91%. 나머지(9%) 지분을 가진 본사가 경영노하우와 기술력을 제공하고 운영은 전문인력이 맡고 있다. 월평균수익률은 투자액의 3%쯤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경기흐름이나 그달의 장사실적에 따라 오르내림은 있다. 한 창업전문가는 “투자금의 대형화로 A급 상권에 점포를 낼 수 있고 창업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투자위험도 줄일 수 있다”면서 “부업이나 투 잡을 원하는 직장인에서부터 가정주부, 청년층,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심을 보이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10일 인토외식산업의 한 임원도 맥세스 FC전문가과정 원우 송년의 밤 초청세미나 때 “공동투자창업은 시너지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동투자창업의 사례발표’를 통해 “투자창업은 매장운영과 경영이 나눠져 있다”면서 “투자자들은 매달 한번 주주회의 때만 의견을 낼 수 있고 법인이어서 안전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또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투자자들에게 비밀유지 각서를 받는 등 다양한 보완책들도 세워져 있다고 했다. 그는 “맥주전문점 와바 직영점은 23개의 공동창업매장을 운영 중이며 일부는 45%이상의 연간수익이 보장되는 매장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매장의 경우 하루매출이 1400만원에 오를 때도 있다고 전했다. 웰빙 삼겹살 전문점 떡쌈시대(www.tt okssam.co.kr)의 위탁사업모델도 창업지망생들의 입맛을 당기고 있다. 떡쌈시대의 위탁사업모델은 창업자금의 일부나 전액을 예비창업자 또는 투자자가 내고 약정한 기간 중 외식노하우와 전문인력을 가진 본사가 운영해 남는 이익금을 나눠 갖는 사업형태다. 떡쌈시대의 위탁사업모델은 예비창업자와 투자자상황에 맞춰 다양하게 투자할 수 있게 3가지 모델을 내놓고 있다. ▲투자수익 정액 보장형 ▲투자수익 정률 보장형 ▲정액정률 혼합형이 그것이다. 투자수익 정액보장형은 예비창업자와 투자자의 매달 투자액의 1.5%를 수익으로 보장하는 모델이다. 안정적 수익창출을 보장, 멀리 보고 투자하는 사람에게 알맞다. 투자수익 정률 보장형은 위탁점의 모든 경영권을 전문인력을 둔 본사가 갖고 운영한다. 순이익의 60%를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외식사업에 서툰 초보자나 가정주부들에게 먹히는 모델이다. 정액정률 혼합형은 투자수익 정액 보장형과 투자수익 정률 보장형이 섞인 형태다. 매달 투자액의 1.5%를 기본수익으로 정하고 목표를 넘어서는 이익금을 투자자에게 돌려준다. 이 모델은 안정적이면서 고수익까지 노릴 수 있어 예비창업자와 기존 외식업운영자, 초보창업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떡쌈시대의 위탁사업모델은 창업에 실패하는 업소들에게 본사의 철저한 관리와 전문인력을 통해 안정적 수익을 낳는 프랜차이즈업계의 새 모델로 통한다. 떡쌈시대는 쫄깃한 떡피에 싸먹는 ‘벌침 맞은 삼겹살’이란 차별화전략으로 전국에 120여 가맹점을 두고 있다.(발문) 식당개업에 뜻을 두고 있다면 반드시 주변에 잘 되는 식당을 둘러봐야 한다. 그냥 가서 기웃거리지 말고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양해를 얻어 주방도 들여다보고 종업원, 주인의 태도도 눈여겨봐야 한다. 인테리어, 집기비품, 가격, 서비스내용, 주차장 시설 등도 알아봐야 한다. 세무처리, 아래 사람 관리 기법을 터득하는 건 말할 것 없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9-02-11 00:00

미국에서 95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황혼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동갑내기인 월리스 리처드 할아버지와 버니스 젱킨스 할머니. 지난 5월 31일 캘리포니아주 카마리요의 한 교회에서 가족, 친지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결혼식에서 이들은 웨딩마치에 맞춰 입장, 키스를 나눴다. 이 내용은 6월 1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들은 젊은 신랑·신부처럼 예쁜 예복을 입었지만 젱킨스 할머니는 웨딩마치가 흘러나오는 사이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입장, 웃음을 자아냈다. 축하객 중엔 4살짜리부터 30대 중반까지 12명이나 되는 손자, 증손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의 나이를 합하면 190세가 돼 이날 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상 최고령자 결혼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60여년의 결혼생활을 해오던 첫 배우자들과 노년기를 쾌적한 기후의 카마리요에서 보내기로 하고 ‘레저 빌리지’에서 살던 중 배우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새 배필을 맞은 것.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온화한 성품의 리처드 할아버지는 교회와 마을에서 마주쳤던 활달한 성격의 젱킨스 할머니를 눈여겨보던 중 18개월 전 데이트를 신청했으나 딱지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구애의 손길을 건네 할머니 마음을 열게 했다. 할아버지의 두 아들은 신랑의 들러리가 됐고 할머니의 딸과 사위는 사회를 봤을 만큼 양쪽 가족들은 대환영이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2 00:00

2008년이 시작됐다. 한해가 열리는 이맘때면 대중가요 <아침이슬>을 흥얼거리게 된다. 김민기(57) 작사·작곡,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새로운 분위기가 든다. 노래제목처럼 이른 아침 영롱하게 맺힌 이슬의 느낌부터가 새롭다. 3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들어도 전혀 묵은 노래 같지 않다. 한 때 각 학교 교가보다 더 잘 알려져 7080세대들에겐 더욱 친숙한 국민가요다.노래가 탄생한 건 1970년. 사회적·정치적 사실과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진 순수 서정적 곡으로 태어났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노랫말이 다분히 시적이다. 잔잔하게 깔리는 반주에 양희은의 낭랑한 목소리가 버무려져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청년음악가 김민기와 풋내기 여가수 양희은을 졸지에 스타로 떠오르게 한 이 곡은 숱한 얘기를 낳은 노래로도 유명하다. 운동권가요의 대표 격으로 방송금지가 되면서 더욱 주가를 올린 점이 특이하다. 피 끓는 젊은 대학생들이 독재정권과 맞서며 청춘을 불태웠던 저항의 노래 상징으로도 꼽힌다. <아침이슬>이 특히 1970~1980년대 의식 있는 젊은 세대들로부터 사랑받은 건 노래가 좋았던 점도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의 암울한 시대상황의 영향도 컸다. 버려진 악보로 연습해 취입그래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다. 양희은이 불러 히트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민기는 이 노래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 때 여러 번 <아침이슬>에 애정이 없는 듯한 말을 자주 한 게 이를 뒷받침해준다.그러나 가수 양희은의 생각은 달랐다. 김민기가 노래를 만들었다며 불러주는 순간 ‘아주 좋은 곡’이라며 맘이 끌렸다. 작사 · 작곡가와 가수의 시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연습하면서 악보를 획~ 버리자 양희은은 이를 주워 자신의 노래로 소화시켜나갔다.‘꼭 녹음 해야겠다’고 작심한 양희은은 원작자(김민기)보다 먼저 <아침이슬>취입에 성공했다. 음반제작은 방송사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하면서 이뤄졌다. 빅 히트송 <아침이슬>이 있기까지엔 가시밭길을 걸어온 김민기의 지난날 삶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현재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부친이 6·25전쟁 때 북으로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는 바람에 유복자가 됐다. 경기중·고를 거쳐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대학 3학년 때인 1970년 <아침이슬>을 발표, 새내기 대중음악 작곡가로 명함을 내밀었다. 이듬해엔 독집음반을 내면서 가수로도 데뷔했다. 3선 개헌과 대통령선거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무렵이다.노래 못잖게 1971년 가을 그에겐 의미 있는 한 만남이 있었다. 저항시인 김지하와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김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문화적 체험을 한 그는 가톨릭문화운동, 국악대중화, 마당극운동 등을 펼치며 제도권으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취급받았다. 1971년 서울 신정동에서 야학을 시작했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도 뛰었다. 금관의 예수(1973년), 소리굿 아구(1974년) 공연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금지곡서 국민가요 ‘햇빛’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김민기 노래를 순수대중음악에서 현실비판적 의식가요로 재해석케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독집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환영회에 초대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레코드를 모두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방송금지에다 연행→조사→석방이 거듭되면서 ‘찍힌 인물’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택한 게 군 입대. 1974년 10월 카투사로 들어가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주한미군방송인 AFKN방송국. 사병근무지론 비교적 편안한 데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이슬> 노래 때문이었다.이듬해 전국이 유신헌법 찬반투표 거부운동으로 들끓었다. 대학가에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정치권 공방도 치열했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은 투표 당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종일 투표참가를 거부하는 집회와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행사 때 주요 음악레퍼토리는 김민기 의 노래. 그러나 이 사실이 당국에 들켜버렸다.그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김민기였다. 내복도 입지 않은 채 보름간 감방생활을 한 뒤 최전방으로 쫓겨났다. 이어 그해 6월 문공부가 발표한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에 따라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노래가 시의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김민기 노래가 운동권가요로 자주 불리면서 탄압은 더욱 거셌다. 그럴수록 운동권에선 더 불렀다. 탄압강도가 더해질수록 서정적 노래로 태어난 <아침이슬>이 의식 있는 가요로 의미를 갖춰갔다. 운동권학생들은 험난한 미래에 대한 고뇌의 결단을 할 때 <아침이슬>을 불렀다. 데모대 힘은 바로 <아침이슬>의 우렁찬 울림에서 솟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어느덧 김민기는 의식 있는 음악인으로 운동권투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김민기는 정작 자신이 ‘투사’로 불리는 것을 꺼린다. 어느 날 TV회견 때 “아무 의도 없이 만든 노래가 운동권에서 자주 불린다고 해서 기관으로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살아오면서 남들과 크게 싸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가수입문 때 만난 김민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1997년 김민기 헌정음반으로 <1997 아침이슬>을 내놨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김민기를 위한 것이었다. 김민기가 대중의 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진 사람은 바로 양희은이었다.음악인 김민기는 이제 한국적 뮤지컬창시자이자 연극·연출가, 기획자로 변신해있다. 해금 4년 만인 1991년 서울 대학로 뒤편에 극장(학전)을 만들어 지금껏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가 무대에 올린 뮤지컬작품은 독일 원작의 ‘지하철 1호선’. 연출, 편곡, 작사는 물론 배우도 직접 뽑고 모진 합숙훈련도 했다.  원작자 루트비히는 “원작보다 낫다”고 했고, 중국 대표작가 위화(餘華)는 “한류의 정수”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뉴시스, 시사저널, 일요서울(편집국장)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2 00:00

노사연 <만남>“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만추이다. 가을걷이와 겨울을 준비하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결실을 계절을 맞아 갖가지 만남들도 잦다. 야유회, 등산대회, 체육대회 등에서 삶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어우러진다. 그런 모임에선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로 나가는 노사연의 <만남>노래가 곧잘 불린다. 부르기 쉬고 노랫말 뜻이 깊어 여러 모임에서 자주 애창되는 대중가요다. 194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대중음악 50년 사 베스트 50곡 중 40위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만남>이 만들어진 건 1986년. 21년 전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발표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 이 노래와 함께 모임 때 자주 불리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다.작곡가는 ‘노래 문외한’ 막내 이모부 <만남> 작곡가는 최대석 씨. 노래를 부른 노사연의 막내 이모부다. 미국서 사업을 하는 최 씨는 노래엔 문외한으로 알려져 흥미롭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록의 이 노래 작사가는 박신. 노래는 노사연이 많은 사람들과의 적극적 만남을 통해 가수가 됐다는 것을 잘 아는 작사가·작곡가의 합작으로 태어났다. 마치 <만남> 가사처럼 말이다.1978년 단국대 성악과 2학년생 신분으로 MBC주최 제2회 대학가요제에 출전, <돌고 돌아가는 길>(김욱 작사·작곡 / 4분의 3박자, 왈츠 곡)로 금상을 받아 가수가 된 노사연은 <만남>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공부와 노래를 겸해야하는 학생가수신분인데다 이렇다 할 곡마저 내놓지 못해서였다. 특히 대학 신입생 시절 첫 미팅 때 자신의 뚱뚱한 몸매를 본 남학생들이 던진 모멸감의 말로 충격 받아 결행한 무리한 살빼기에서의 후유증도 한 요인이었다. (노사연은 태어났을 때 4.8kg로 우량아였다.)그런 가운데 노사연이 가요제 입상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어느 날 담당교수가 그를 불렀다. “성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던지 택하라!”는 경고를 내린 것이다. 1977년 1월 경희대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떨어져 2차인 단국대 성악과에 2등으로 합격, 학교를 다녔지만 클래식보다 가요 쪽을 택해 가수 길을 걷고 있었던 터라 그는 전과를 결심했다. 어릴 때 이모인 대중가수 현미를 동경, “노래를 해볼까”하고 대학가요제를 지원해 입상한 그로선 중대한 선택이었다. 국문학과로 옮긴 노사연은 1983년 발표한 <님 그림자>(김욱 작사, 작곡 / 4분의 4박자, 트로트곡)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창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았으나 인기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초대받은 행사장에서 다른 여자가수들에게 출연순서를 빼앗기는 등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다. 개그맨 저리가라 할 만큼 웃겨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래하면서 장기인 재치·개그·유머로 부족함을 메워갔다. 10년의 무명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만남> 취입과 방송출연이 그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던 어느 날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다. 음반이 나온 지 한참 뒤의 일로 거기서 첫사랑인 여고 체육선생님과의 만남 얘기, “노사연! 너를 쭉 지켜봤는데… (아! 두근두근, 쿵쿵) 너 혹시…. 투포환 안 해볼래?”로 뒤집어지는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 코미디언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관중들을 웃겼다. 그를 처음 보거나 잘 몰랐던 사람은 가수보다 개그맨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어려워하며 자꾸 존댓말을 쓰더니 급기야는 상석으로 앉히더라고 했다. 노사연의 꾸밈 없는 모습에 <만남> 노래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1992년 <만남>으로 가수왕에까지 올랐다. 노랫말 구절처럼 “우연”이 아니라 그것은 가수데뷔 10년만의 “바람”이었다.그는 1957년 3월 3일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노양환 씨(1987년 작고), 어머니 김화선 씨(평양출신으로 북한 원로무용가 최승희 제자) 사이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 근무지 이동에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자랐다. 화천초등·중학교를 거쳐 화천실업고 1학년을 다니다 춘천여고에 재입학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그는 요즘 남편(가수 이무송)과 가끔 무대에 선다. KBS-1TV 주말 밤 음악 프로그램인 ‘콘서트 7080’에 부부가 나와 열창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기독교 신자로 어린 아들과 함께 교회에 다닌다. 그 곳에서 가족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며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해 눈길을 끈다. 인기 연예인 가족에다 구김살 없는 노사연의 구수한 입담까지 곁들여져 신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올 한해도 결혼, 미팅, 입학, 입사 등 만남의 의례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들 삶은 어떻게 보면 노사연의 노래 <만남>처럼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경남도민일보, 뉴시스, 시사저널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 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