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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유럽 부의 시작은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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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유럽 부의 시작은 약탈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11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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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당한 약탈은 교황 권위와 로마의 몰락을 의미
약탈로 로마의 부가 골고루 유럽에 퍼지면서 부의 중심도 달라져...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이탈리아반도는 지리적 위치상 지중해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로마는 응축되어있던 힘이 뻗어 나가기에도 유리한 위치지만 힘이 약할 때는 이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기에도 좋은 위치다. 

로마의 힘이 약해지자 로마가 만든 길을 통해 다양한 세력의 침략이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보니 여러 차례에 걸쳐 ‘약탈(사코 디 로마, Sacco di Roma)’을 당한다. 
 
그 처음은 로마가 갓 태어나 힘없던 시절에 겪었던 침략과 약탈이다.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인 갈리아의 세노네스족에게 BC390년경에 약탈을 당했지만 이후 강성해진 로마에 무릎을 꿇었고 참교육을 받았다. 동로마와 다르게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어 쇠락을 길을 걷던 서로마는 AD410년 게르만 일파인 서고트족에게 약탈당한다. 
 
서코트족은 훈족의 공격을 피해 로마영토 안의 국경 일대에서 거주하게 된다. 대신 로마제국의 동맹군이 되어 로마가 훈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를 때마다 항상 선봉을 서게 된다. 선봉에 섰던 서고트는 로마군단보다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고 차별까지 이어지면서 불만이 많았다. 

누적된 불만은 결국 395년에 반란으로 이어졌다. 두 번에 걸쳐 로마를 포위하고 압박했지만, 황제와 원로원이 서고트를 무시하자 로마 시내로 진입해 오로지 돈이 목적인 약탈을 3일간 지속한다. 사람을 죽이는 대신 포로로 붙잡아 몸값을 받았고 돈이 없다면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후 권력다툼에 국력이 소모되면서 455년에는 반달족이 로마로 진입해 값비싼 재화를 제대로 털어간다. 연속되는 쿠데타로 황제는 계속 바뀌었다. 힘의 공백 상태에서 저항 의지조차 없었음에도 반달족은 민간에 대한 피해를 거의 주지 않았다. 재화를 쓸어 담는 데 집중하느라 인명에 대한 피해를 줄 시간이 없었다는 게 이유다. 
 
서로마가 망하고 동로마 덕에 잠시 안정을 찾지만 546년, 549년, 550년에 동고트에 의한 약탈이 있었고 846년에 지중해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슬람 해적에 의해 외곽지역이 또 털린다.
 
로마가 당한 약탈은 중세에도 이어졌다. 중세 초기의 강력했던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의 실패와 절대왕정이 강화되면서 약화되었다. 1527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219대 교황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클레멘스 7세와의 다툼에서 교황이 패한 뒤 로마는 카를 5세의 용병들에 의해 약탈을 당했다. 종교개혁을 부르짖은 루터가 말한 대로 당시 교회의 성직은 매관매직 되고 있었고 이때 쓰인 돈을 벌기 위해 성직을 사들인 성직자는 교회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이런 돈을 모아 교황을 비롯한 고위성직자들은 사치와 향락 속에 빠져 살았다. 클레멘스 7세 때 교황령이었던 로마가 당한 약탈은 교황 권위와 로마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세상의 모든 부가 몰렸던 로마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제국이 멸망한 지 1,000여 년 만에 폐허가 되었다. 로마에 쌓여있던 부가 여러 시기에 걸친 약탈로 인해 골고루 유럽에 퍼지면서 부의 중심도 달라졌다.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쌓은 베네치아공화국과 피렌체의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상업에 대한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후원은 건축과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져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중흥기를 만들어낸다. 집중되는 부를 비판하기 위한 서적들도 등장하게 된다.

이강희 칼럼니스트
이강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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