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번지고 있다. 일본이 또 한번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독도를 자기나라 땅이라고 우긴다. 우리가 강하게 대응하면 쑥 들어갔다가 심심하면 한 번씩 생떼를 쓰는 모습이 웃긴다. 특히 일본 후쿠다야스오 총리가 중등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하기로 한 것에 대해 ‘당연한 주장’이라고 말한 7월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다시한번 마음을 적신다. 그런 분위기여서 그런지 8월이면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자주 방송전파를 탄다. 4대 국경일인 광복절(8월 15일)엔 단골노래로 불린다. 이 곡은 일본의 억지주장이 불거지면서 인기곡으로 떠오른 대표적인 대중가요다. 방송PD출신인 박문영 작곡·작사, 개그맨 출신 정광태 노래인 <독도는 우리 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1983년 초. 전두환 대통령시절로 5공 중반기에 탄생한 셈이다. 노래는 아주 우습게 만들어졌다. 사랑, 이별 등 통속적 소재로 만들어진 일반 대중가요와 달리 노랫말부터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상식들이 노래 중간 중간에 나오고 4분의 4박자의 빠른 템포에다 멜로디까지 경쾌해 다함께 부르면 더욱 흥겹다.KBS 코미디프로그램서 탄생 <독도는 우리 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까진 세 번에 걸쳐 사라질 뻔했던 우여곡절이 있었다. 노래는 방송 개그프로그램에서 비롯됐다. 작사가 손을 거친 노랫말에 곡을 붙여 가수에게 취입토록 하는 보통의 가요와 달리 노래태생부터가 이색적이다. 1982년 말 어느 날 KBS-TV 방송프로그램 ‘유머 1번지’ 개그작가였던 박문영 씨가 서울 여의도동 방송사사무실에서 열심히 원고를 쓰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유머 1번지’ 프로그램담당 김웅래 PD가 박 씨에게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노래가 없느냐?”고 물었다. 박 씨는 그 순간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어떻겠느냐?”고 답했다. 김PD는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담당PD의 OK사인을 받은 박 씨는 곧바로 방송사 도서실로 달려가 독도와 관련된 책과 자료들을 뒤졌다. 수집내용들을 바탕으로 그 자리에서 가사를 만들고 멜로디를 붙였다. 그 다음 주 TV방송 녹화장. 포졸 옷을 입은 임하룡, 정광태 등 4명의 개그맨들이 커다란 종이에 써 준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불러 무사히 방송을 내보냈다. 방송작가(박 씨)가 코미디담당PD 요청으로 개그용의 재미난 노래를 즉흥으로 만들어 시청자들을 웃게 만든 것이다. 박 씨는 방송프로그램의 코너를 마친 안도감에 가사를 적은 종이를 구겨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얼마 뒤 4명의 개그맨 중 뭔가 느낌을 가진 정광태 씨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수첩에 가사를 적어 호주머니에 넣고 나갔다. 개그용 노랫말로 쓰레기통에…정 씨는 이튿날부터 레코드회사를 찾아다니며 노래취입을 부탁했다. 정 씨는 “음반의 맨 끝 곡에라도 좋으니 음반으로 내어달라”며 레코드사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개그맨이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도 그렇지만 가사가 장난스럽게 받아들여져 ‘안 된다’는 시각이었다. 정 씨 얘기를 들은 레코드사 직원들은 한결같이 “그게 노래냐!”며 손사래를 쳤다.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정 씨의 끈질긴 집념이 갸륵해(?) ‘대성음반’이란 조그만 레코드사에서 맨 끝 곡으로 <독도는 우리 땅>을 실어 두 달 뒤 음반을 냈다. 대성음반은 노래의 상품성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음반수록을 부탁한 젊은 개그맨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끼어 넣어준 것이다. 히트가 예감되는 곡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기가수가 부른 노래도 아닌 까닭이다. 음반 끄트머리에 끼어 든 <독도는 우리 땅>은 음반이 나오자 장난기 있는 일부 라디오PD들이 이 노래를 심심풀이로 방송에 띄웠다. 하지만 반응은 거의 없었다. 영향력 있는 공중파 TV방송사의 가요PD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이었다. KBS의 한 간부가 우연히 그 노래를 듣고 “어떤 PD가 그런 괴상한 노래를 트느냐”며 불호령을 내렸다. PD가 불려가 꾸중을 들은 뒤 사무실엔 “<독도는 우리 땅>노래를 방송에 일절 내보내지 말라!”는 경고문이 나붙었다. 그렇게 해서 <독도는 우리 땅>노래는 더 이상 전파를 타지 못하게 됐을 무렵 때마침 “일본국회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긴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독도문제가 매스컴의 초점을 받자 대통령 주재 청와대회의에 거론되기까지 했다. 그 때 전두환 대통령은 그 노래를 들었는지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우리는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있잖아!” 하며 일본 쪽 주장을 일축했다. 대통령 말에 놀란 당시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은 급히 가수(정광태)와 작곡가(박문영)를 불러 차를 대접하며 <독도는 우리 땅>을 만들어 취입한 것을 칭찬했다. 허 차관은 두 사람에게 “애로가 없느냐?”고 묻자 정 씨가 “KBS에서 노래를 방송금지곡으로 묶어놓고 있어 억울하다”며 사정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허 차관은 그 자리에서 KBS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금지 시키지 말라” 당부했다. 그 무렵엔 말이 당부이지 거의 지시나 마찬가지로 말발이 먹혔다. 두 사람은 문공부를 나와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가던 중 차안에서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 이 노래는 각 방송 가요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고 광복절을 전후해선 인기곡으로 가요차트에 오르곤 했다. 1983년 개그맨 정광태 씨 취입정 씨는 졸지에 유명연예인이 됐다. 노래가 본격 선보인 1983년 KBS가요대상에서 신인가수상까지 받았다. 1990년대 들어 몇 차례 일본이 독도문제로 시비를 걸어왔을 때도 방송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만큼 개그맨보다 인기가수로 더 유명세를 탔다. 정 씨는 2000년 여름 ‘윤독도’라는 별명의 한나라당 윤한도 전 의원(경남 함안·의령)을 중심으로 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독도를 찾았다. 2002년엔 뗏목탐사, 2004년엔 울릉도 도동항~독도 수영종단으로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코미디용 방송프로그램녹화 후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악보를 개그맨이 음반으로 되살렸지만 방송사가 틀어주지 않아 사라질 뻔했던 <독도는 우리 땅>은 흔히들 방송금지곡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정광태 씨는 2005년 3월 28일 밤 한때 자신이 일했던 KBS-1TV의 심야 보도프로그램 ‘뉴스라인’에 출연, 노래와 독도지키기 내용들을 들려줬다. <'독도' 명칭은 전라도 남해안 발음 '독섬'서 유래>독도는 신라 지증왕때 우산도(于山島)라 불리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라고 불렸다.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 섬으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들어갔다.행정지명으로서 ‘독도’란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됐다. 현재 ‘獨島’로 표기되는 독도는 ‘외로운 섬’,’홀로섬’이 아니다. ‘돌섬’이 초기 이주민인 전라도 남해안 출신 사람들에 의해 ‘독섬’으로 발음되면서 ‘獨島’로 표기 됐다. 석도를 훈독 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된다.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명치시대 전에는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 부르다가 1905년 영토편입 뒤 부터 다케시마(竹島)라 부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섬을 발견한 선박의 명칭을 따라 이름을 붙였다.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꾸르호가 독도를 발견, ‘리앙꾸르 암(Liancourt Rock)’ 으로 명명했다. 1885년 영국함선 호네트호 또한 ‘호네트 암(Hornet Rock)’으로 이름을 지어 자기들 해도에 등록했다. 하지만 이는 섬을 바위로 표시한 것으로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사항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8 00:00
여름철에 자주 애창되는 불후의 대중가요 <해변으로 가요>는 언제 들어도 시원하다. 파도가 가까이서 밀려오고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해변의 연인들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하다. 노랫말에서처럼 백사장에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4분의 4박자, 고고풍의 이 노래는 남성그룹 키보이스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대중가요악보집엔 김희갑 작사·작곡으로 돼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사실이 아니다. 키보이스, 번역 곡 취입해 대히트이 노래는 원래 일본 곡이었다. 나중에 우리말 가사로 번역된 것이다. 노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불리게 된 사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그룹사운드페스티벌에서였다. 우리나라 키보이스와 미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그룹사운드팀들이 닷새 동안 공연을 펼쳤다. 이들 가운데는 재일교포 이철(李徹·일본명=아베 데스)씨를 포함한 8명의 일본그룹사운드 ‘더 아스트로 제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한국에선 일본노래를 부를 수 없게 돼있었다. ‘더 아스트로 제트’의 리더 이 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작사·작곡한 ‘하마베에이꼬’(浜邊へ 行こう)를 국제관계평론가인 형(이건)에게 한국말로 가사번역을 맡겼다. 이건 씨는 이를 다시 친분 있는 소설가 이호철 씨에게 가사번역을 부탁, 시민회관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불린 노래가 바로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로 나가는 <해변으로 가요>다. 인기절정의 남성보컬그룹 ‘키보이스’가 <해변으로 가요>를 부른 건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였다. 시민회관공연이 끝난 뒤 키보이스가 이철 씨에게 ‘그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 씨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해변으로 가요>를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 씨는 ‘주간조선’과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음악가로서 호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철의 ‘하마베에이꼬’가 원곡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록 전에 이 노래의 작사ㆍ작곡자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여러 사람들 이름이 나온다. 1970년 유니버설레코드사가 제작한 앨범 ‘보칼 NO.1 키보이스 특선 2집’엔 작사ㆍ작곡자 표시 없이 ‘키보이스 가요그룹’의 노래라고만 표기돼 있다. 이어 1976년 유니버샬레코드사에서 제작된 ‘키보이스 골드’란 레코드판엔 키보이스 작사ㆍ작곡으로 표기돼 있다. 그러던 게 1983년 4월 서울음반에서 만든 ‘키보이스 골드’ 레코드판엔 김희갑 작사ㆍ작곡으로 나와 있다. 1998년 1월엔 장용 씨가 별세함에 따라 그의 딸인 장실비아 씨가 그 명의를 이어 받았다. 하지만 이 노래 원작자 이 씨가 소송을 통해 저작권을 되찾으면서 일본노래란 사실이 밝혀졌다. <해변으로 가요> 작사ㆍ작곡자가 김희갑 씨도, 키보이스 멤버인 장용 씨도 아닌 재일교포 이철 씨란 사실이 드러난 것. 이 씨가 <해변으로 가요>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돼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건 1980년대였다. 그는 “당시는 한일 음악교류가 거의 없는데다 저작권협정마저 없어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주간조선’(2002년 8월1일자)은 일본 곡 <해변으로 가요>가 우리말로 번역, 시민회관에서 소개됐고 키보이스가 이철 씨 허락을 받아 노래를 취입했다는 내용도 보도했다. 이 씨는 주간조선 보도가 나간 뒤 2003년 저작권 확인소송을 냈다. 39년 만에 저작권 찾아 ‘화제’이씨는 “서울시민회관에서 일본팀 ‘더 아스트 제트’로 공연했을 때 ‘히비토타쓰노 하마베’(해변의 연인)를 불렀으며, 그때 참가한 키보이스에게 우리 노래를 부르도록 빌려줬다”고 주장했다. 이후 ‘해변으로 가요’가 히트했지만 키보이스는 작사·작곡가를 명시하지 않았다. 또 1976년부터 작품자가 키보이스로, 1993년부터는 김희갑으로, 또 1996년엔 장 모 씨 이름으로 둔갑했다고 주장했다.이에 따라 부산지방법원 민사7부(재판장 윤근수 판사)는 2005년 7월 13일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이철)가 피고(장실비아)를 상대로 낸 저작권확인소송에서 사단법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해변으로 가요>가 원고의 저작물임과 그 저작권이 원고에게 있음을 확인한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윤근수 재판장은 판결이유에서 “당시 이호철이 한국말로 번역한 ‘하마베에이꼬’가사와 이 사건의 노래가사가 같고, 페스티벌공연 때 연주하거나 또는 페스티벌공연을 위해 연습한 ‘하마베에이꼬’ 악보와 이 사건의 노래악보가 대부분 일치하는 사실, 키보이스가 위 페스티벌에 참여한 1968년 전에 이 노래를 공연하거나 키보이스 가요앨범에 수록된 흔적이 없는 점 등을 들어 <해변으로 가요>저작권은 원고에게 있다”고 밝혔다.피고인 장 씨는 이에 불복, 상급법원까지 올라갔으나 결국 졌다. 대법원 1부(주심 고현철 대법관)는 부산고법 판결에 대한 장 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키보이스 멤버였던 장용 씨의 유족인 피고 장 모 씨는 1998년 6월부터 저작권료로 받은 8천여만 원을 원고 이 씨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노래가 국제적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곡목과 같은 드라마도 나와 눈길을 끌었다. 2005년 7월 30일~9월 11일 SBS-TV가 ‘해변으로 가요’란 드라마를 방영, 인기를 모았다. 이청아, 이완, 전진, 강정화 등이 출연한 청춘멜로물로 젊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2 00:00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조치에 대해 장장 40일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국민적 저항은 이 땅의 사회과학도들을 크게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웹2.0의 놀라운 영향력, 전자적 직접민주주의의 등장, 생활정치의 출현 등 긍정적 해석에서부터 반미좌파에 의해 장악된 TV의 역정보, 인터넷을 장악한 좌파들의 음모와 선동 등과 같은 부정적 해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우리 사회가 정보시대로 진입하면서 탄생한 ‘도덕경제’의 모습을 우리 모두에게, 나아가 전 세계에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을 추가하고자 한다.비시장적 가치와 동기도 중시원래 도덕경제란 근대자본주의 등장과정에서 시장의 위협에 직면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농민들이 보여준 저항 혹은 도덕적 분노를 가리키기 위해 고안된 학술용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덕경제라고 불러야만 적절할 사회현상들을 우리는 21세기 정보사회에서 보고 있다. 도덕경제의 성격을 지닌 사회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적지 않은 경제 영역에서 사람들이 비시장적(nonmarket) 가치와 동기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쇠고기협상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민족적으로 다소 굴욕을 느끼게 되는 일도, 주권을 다소 양보하는 일도, 국민의 건강이 다소 위협 받게 되는 것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민들도 기꺼이 같은 입장일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런 성과(?)에 박수를 치기는커녕 소리 높여 비판하고 집요하게 저항했다. 국민들은 공동체, 공평(公平), 삶의 질(이 세 가지는 도덕 경제에서 추구되는 핵심가치다)이라는 지향을 심각하게 흔들어 놓는 일차원적 ‘실용주의’ 혹은 ‘성과주의’를 거부했다. 국민들의 눈에는 소위 ‘강부자’ ‘고소영’ 인선이 공동체의 지도층 인사로서는 부적절한 과거를 지닌 자들의 중용, 사회적 공평성을 무시한 편협한 인사로 비쳤으며,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은 민족공동체의 자존 그리고 건강이라는 삶의 가치에 중대한 상처를 입힌 것으로 보였다. 경쟁 확대·복지비용 축소 ‘염려’또 다수의 국민들은 대운하정책이 환경을 돌이킬 수 없게 훼손하고 강경한 대북정책은 한반도 평화의 기반을 흔들어 결국 삶의 질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시장적 경쟁을 확대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국민들이 염려하고 있다.공기업 민영화와 기업활동 규제완화는 대기업과 외국자본에게 특혜를 주게 되고, 학교운영에 있어 학교의 자율권 강화는 청소년들에게 지나친 경쟁을 불러 그들의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다. 복지비용 축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동체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을 심화시키리라 우려하는 것이다.‘이명박 정부’의 지나친 성과주의와 시장주의가 국민들의 도덕경제적 지향과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앞으로 도덕경제가 정부에 대한 요구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부당이익추구, 부정부패 등과 같이 반공동체적 행동을 취하는 기업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도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래에서 보듯이 국민과 소비자 손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쥐어져있다.대안적 채널 통해 정보수집도덕경제적 사회의 두 번째 특징은 자율적인 집단행동이다. 전자본주의 사회의 농민들은 시장의 위협에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항거했다. 우리 시민들은 농기구와 횃불 대신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 노트북, 촛불을 들고 ‘시장주의’에 저항하고 나섰다. 정부, 정당, 기업은 물론 심지어 시민·사회단체도 그들을 조종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대중은 ‘아고라’와 커뮤니티에 접속해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행동을 결정한다. 풍부한 대안적 채널을 지닌 그들은 매체나 선전조직에 의한 대중조작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이 수집한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더구나 정보기술 덕분에 실시간 연결되는 그들은 느슨한 조직만으로도 수십만 명이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다. 촛불행진은 그것이 이론적 가능성을 넘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수십 만명 자율적 집단행동그렇다고 도덕경제가 저항적이고 소극적 모습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저자로 참여할 수 있는 세계 최대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수많은 전문가들이 만들어가는 리눅스, 태안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자원봉사 등은 도덕경제의 생산적이고 적극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우리 앞에 나타난 도덕경제 주목해야미국 경제학자 John Powelson이 2000년에 발간한 저서에서 50년쯤 뒤에나 등장하게 되리라 예상한 도덕경제가 지금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이 사건이 일시적 현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될 것인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고도로 발전된 정보기술 덕분에 인간이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만족과 희열, 사회적 유대를 위해서도 행동한다는 단순한 진리가 실현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인·행정가·기업인·학자·전문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정보사회에서 엄청난 힘을 갖게 되는 도덕경제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서울 도심을 밝힌 수십 만 개의 촛불이 가져다 준 값진 교훈 중 하나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2 00:00
6월은 현충일(6월 6일)과 6·25한국전쟁기념일(6월 25일)이 들어있는 보훈의 달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6·25전쟁과 관련된 슬픈 사연들, 나라를 위해 목숨 받친 역전의 용사들의 전장 터 얘기, 남북이산가족들의 한 많은 사연 등이 소개돼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방송에선 6·25전쟁에 얽힌 내용들을 소개하면서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로 나가는 가곡 ‘비목(碑木)’이 단골 배경음악으로 곁들여진다. 가사와 멜로디가 보훈의 달 분위기와 맞고 노래 흐름도 쉬워 국민애창가곡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노랫말에 담긴 내용은 50여 년 전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아 다른 가곡과 다른 맛을 준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듣노라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숙연해진다. ‘전선야곡’ ‘가거라 삼팔선’ ‘굳세어라 금순아’ 등 한국전쟁과 관련된 대중가요들과 뉘앙스가 달라 6·25관련 대표가곡으로 손색이 없다.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이 노래는 4분의 4박자로 다소 느린 템포로 이어진다.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과 함께 3대 애창가곡으로 불릴 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비목’은 노래제목에서부터 슬픈 사연의 내음이 풍긴다. 이 가곡의 탄생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63년 어느 날, 6·25전쟁 때 치열했던 전장 터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기슭에서 비롯된다. 백암산 기슭엔 소위 계급장을 단 육군 장교 한 명이 부하들과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전방 소대장직을 맡고 있었던 이 장교는 산을 오르내리면서 우연히 이끼 낀 돌무덤을 발견했다. 시선을 따라 무덤 쪽으로 발길을 옮긴 소대장은 깜짝 놀라 멈칫했다. 일반 무덤처럼 생긴 그 곳엔 6·25전쟁의 가슴 아픈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묘비처럼 꽂혀 있던 썩은 나무 등걸, 녹슨 철모, 카빈소총 한 자루, 그리고 고즈넉이 피어있는 산 목련…. 적과 총을 겨누며 싸우다 숨진 한 군인의 초라한 무덤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백암산 순찰 돌던 소대장이 작시전사한 용사가 누구인지, 또 그를 누가 묻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협정일) 6·25전쟁이 끝나고 10년 남짓 세월이 흐른 그 때서야 장교의 눈에 띤 것이다. 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이끼 되어 맺히고 지나는 이들이 던진 돌이 더미 되어 쌓여있었다. 젊은 소대장은 즉석에서 시 한편을 지어 바치며 땅속에 누워있는 묘 주인의 넋을 달랬다.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며 헌시를 지은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는 훗날 음악인 장일남 씨에 의해 작곡된 ‘비목’의 노랫말이 돼 훌륭한 가곡으로 국민들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묘비처럼 꽂혀있던 썩은 나무 등걸은 노랫말에서 ‘이름 없는 비목’으로 표현됐다. 나무로 세워진 묘비란 뜻이다. 백암산에서 순찰을 돌다 시를 지은 그 소대장은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음악평론가 한명희 씨(69·전 서울시립대 음악과 교수)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39년 3월 1일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한 씨는 1958년 충주고, 서울대 음대를 거쳐 1968년 동 대학원과 1988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했다. 철학박사(1994년 성균관대)로 서울시립대 음악과 교수를 정년퇴직해 경기도 남양주시에 살고 있다. 또 작곡가 장 씨(전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는 2006년 9월 24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4세. 황해도 해주 태생인 고인은 평양음악대를 졸업한 뒤 창덕여고, 숙명여고 음악교사를 거쳐 한양대 작곡과 교수로 30여 년 몸담았다. 또 라디오, TV에서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 등 40년 넘게 가곡과 고전음악보급에 앞장서왔다. ‘기다리는 마음’ ‘석류’ 등 많은 가곡들을 남겼고 오페라작곡가로도 유명했다. ‘원효대사’ ‘춘향전’ ‘불타는 탑’ 등은 해외에서도 여러 번 공연됐다.비목문화제 다양한 행사 열려 ‘인파’‘비목’은 1970년대 TV연속극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뒤 국민들의 귀에 더욱 익숙해져 애창가곡으로 확실하게 뿌리내렸다. 특히 안방에까지 파고든 ‘비목’이 단순히 노래의 틀에서만 머물지 않고 축제로 승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눈길을 끈다. 1996년 6월 6일 현충일 때부터 시작된 비목문화제가 그것이다. 올해로 13회 째를 맞은 향토축제다.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 부근에 만들어진 비목의 계곡엔 해마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서울에서 150여㎞ 떨어진 비목의 계곡은 평소엔 인적이 뜸하지만 축제기간을 전후해선 꽤 시끌벅적해진다. 현충일 하루 전날부터 사흘 간 열리는 이 축제는 주먹밥 먹기·돌탑 쌓기·비목 깎기 경연대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병영체험행사(1박 2일) 등이 열린다. 또 이 기간 중엔 1960년대 파월장병훈련소(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를 거쳐 간 장병 등을 위한 ‘옛 전우 만남의 장’도 펼쳐져 인기다. 이들은 격전지를 돌고 출신부대도 방문, 우의를 다져오고 있다. 가곡 ‘비목’을 좋아하는 1백여 명의 문화동호인(비목마을 사람들) 주최로 첫 테이프를 끊은 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이름 없는 비목들의 넋을 달리며 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한 시대의 정서를 공유한 6·25세대의 한판 굿이라고나 할까. 이제 6·25전쟁은 이토록 슬픈 시와 노래로 승화되어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2 00:00
요즘엔 TV를 안보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에 깜깜해진다. TV가 ‘바보상자’에서 ‘정보창고’로 변한지 꽤 오래다. 이제 TV가 또 한번 변신을 한다. 거실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TV가 이것저것 이용할 것들이 많은 ‘똑똑한 TV’가 된 것이다. 집안TV로 인터넷에 접속, 물건을 사거나 금융거래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신문을 받아보는 TV신문까지 얼굴을 내민다. 인터넷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이 TV를 통해 이뤄져 창출될 시장규모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하다.통신업체들이 주문형 비디오(VOD)서비스 중심의 프리(Pre)-IPTV를 통해 하반기 정면승부에 앞선 선점경쟁을 펼치고 있어 IPTV시장 싸움은 벌써부터 뜨겁다. 프리-IPTV경쟁에 불을 지른 건 유선통신 2위 회사인 하나로텔레콤. 국내 최대 통신업체 KT가 기술·사업적 준비를 마치고도 법·제도 미비로 주저하는 사이 하나로텔레콤은 2006년 7월부터 과감히 ‘하나TV’로 IPTV시장에 뛰어들었다. 도전자인 KT 역시 올해 매출목표(12조원) 돌파를 위해 IPTV에 집중투자하며 추격에 나서고 있다. 하나로텔레콤의 ‘하나TV’와 KT의 ‘메가TV’. IPTV 가입자 유치경쟁은 통신업계 양 강의 자존심싸움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하나로텔레콤은 2006년 7월 주문형 비디오(VOD) 중심의 프리-IPTV인 ‘하나TV’를 선보이며 국내 IPTV시장을 개척한 주인공. 하나TV는 서비스 시작 뒤 가입자 수가 예상을 웃돌면서 셋톱박스 물량부족으로 가입신청을 해도 개통하지 못할 정도로 바람몰이에 성공했다. 내 맘대로 바로 즐기는 하나TV하나TV는 이를 바탕으로 서비스시작 1년 만에 가입자 수가 50만 명을 넘어섰다. 하나TV 가입자 수는 지난 1월 말 기준으로 약85만 명. 하나TV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하나로텔레콤은 올해 하나TV 가입자목표 130만 명 달성, IPTV시장 1위 업체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다질 계획이다. 지상파방송의 실시간전송과 SK텔레콤과의 시너지를 반영하면 연말 가입자 수는 목표를 웃돌 것이란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하나TV가입자의 60%는 100메가급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이용한다. 실시간방송서비스가 도입돼도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셈이다. 또 실시간방송에 대비, 35개 채널을 시범적으로 갖춰 시험 중이다. IPTV법 시행령이 만들어지면 곧바로 IPTV상용화에 나설 예정이다. 하나로텔레콤은 최근 이용자 인터페이스(UI) 등 하나TV기능을 크게 개선한 ‘하나TV 시즌2’를 선보이는 등 시장변화를 앞서 이끌고 있다. 초고속인터넷망과 각 가정에 설치된 셋톱박스를 통해 TV로 VOD, 네트워크게임, 노래방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방송편성표에 따라 시청해야하는 기존 TV와 달리 시청자 스스로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골라 볼 수 있다. 또 HD급에 가까운 고화질 디지털영상과 5.1채널의 실감나는 사운드도 느낄 수 있다.하나로텔레콤은 콘텐츠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세계적 미디어그룹인 월트디즈니텔레비전을 비롯해 CJ엔터테인먼트, MBC, KBS, SBS, BBC월드와이드, EBS, 다음,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국내·외 50여 콘텐츠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지금까지 4만5000여 편의 콘텐츠를 확보했다.하나로텔레콤은 교육콘텐츠 확보를 위해 학원관계사인 종로학평과도 콘텐츠계약을 맺었다. 이밖에 국내 유명학원 강사 180여 명의 인터넷동영상 강의콘텐츠 1만여 편을 서비스하고 있다. 또 올해 안에 IPTV 상용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IPTV가 상용화 되면 초고속인터넷망과 셋톱박스를 이용해 TV로 VOD, 생활정보, 게임, 거래형서비스 등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하나로텔레콤은 완결형 IPTV, 즉 다채널방송과 TV포털 서비스를 지원할 계획이다. 하나로텔레콤에 프리-IPTV 선두자리를 내준 KT도 IPTV법 제정에 따라 올해 초부터 메가TV 가입자 수를 본격 늘리며 추격의 고삐를 죄고 있다. KT는 막강한 영업력과 자금력, 마케팅 능력을 바탕으로 3월 2일 기준으로 메가TV 가입자 수 50만 명을 달성했다. 2월초 40만 명을 넘어선 지 불과 한 달 만에 10만 명의 가입자를 늘려 KT의 힘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KT는 가입자 증가세가 이어지면 메가TV 가입자 수가 연말목표치 150만 명을 무난히 넘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KT는 특히 하반기 지상파방송 실시간 전송이 이뤄질 경우 메가TV 가입자 수 증가세에 더욱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나를 즐겁게 하는 메가TVIPTV시장에서 KT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100메가급 가정 내 광가입자망(FTTH). KT는 올해만도 차세대인프라 구축에 9600억 원을 쏟아부어 FTTH보급률을 전체망의 67%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FTTH는 실시간방송서비스가 이뤄지더라도 안정적으로 IPTV를 제공할 수 있는 차세대네트워크로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KT측은 기대하고 있다. KT는 또 싸이더스FNH 등 콘텐츠 자회사를 거느린 데다 올해 콘텐츠분야에 1300억 원을 투입하는 등 콘텐츠경쟁력 강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메가TV는 드라마, 영화, 지상파방송 다시 보기, 교육 등 19개 분야 채널에 7만8000여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KT는 올해 IPTV시장 선두에 올라선 데 이어 장기적으로 2010년까지 IPTV가입자 수를 300만 명까지 늘릴 방침이다. 메가TV를 통해 유료방송시장에서 확실한 영역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IPTV를 통해 소비자들은 고화질의 콘텐츠를 원하는 시간에 이용할 수 있다. VOD서비스의 경우 이미 확보한 컨소시엄 참여 통신사업자의 콘텐츠와 지상파방송사업자를 통해 콘텐츠를 가졌다.KT는 SK텔레콤이 장악한 이동전화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집전화+초고속인터넷(메가패스)+이동전화(쇼)’를 묶어 3개 서비스 모두 기본료 10%를 깎아주는 상품을 내놨다. 또 ‘집전화+메가패스+IPTV(메가TV)’ 등 결합상품만 15종을 선보였다. 하지만 할인율은 모두 기본료의 10%에 머물러 아직 시장을 흔들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KT는 SK텔레콤에 맞서 결합상품에 정액제를 도입하는 방안과 하나의 단말기로 △2G(2세대 이통) △3G(3세대 이통) △와이브로를 모두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KT는 앞으로 메가TV를 방송 시청을 하면서 프로그램 추가정보 확인, 프로그램 내 특정 상품을 골라 살 수 있는 채널연동형 데이터방송서비스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이다. VOD시청 중 검색기능을 활용해 네티즌 의견, 블로거, 동영상이미지 등을 검색할 수 있는 검색연동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다.이와 함께 TV시청 중 화면에서 직접 투표를 하고, 곧바로 결과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티 풀(T-Poll)’ 서비스,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제작·편집해 메가TV를 통해 가입자간 공유가 가능한 ‘UCC서비스’도 선보일 계획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1 00:00
2008년이 시작됐다. 한해가 열리는 이맘때면 대중가요 <아침이슬>을 흥얼거리게 된다. 김민기(57) 작사·작곡,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새로운 분위기가 든다. 노래제목처럼 이른 아침 영롱하게 맺힌 이슬의 느낌부터가 새롭다. 3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들어도 전혀 묵은 노래 같지 않다. 한 때 각 학교 교가보다 더 잘 알려져 7080세대들에겐 더욱 친숙한 국민가요다.노래가 탄생한 건 1970년. 사회적·정치적 사실과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진 순수 서정적 곡으로 태어났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노랫말이 다분히 시적이다. 잔잔하게 깔리는 반주에 양희은의 낭랑한 목소리가 버무려져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청년음악가 김민기와 풋내기 여가수 양희은을 졸지에 스타로 떠오르게 한 이 곡은 숱한 얘기를 낳은 노래로도 유명하다. 운동권가요의 대표 격으로 방송금지가 되면서 더욱 주가를 올린 점이 특이하다. 피 끓는 젊은 대학생들이 독재정권과 맞서며 청춘을 불태웠던 저항의 노래 상징으로도 꼽힌다. <아침이슬>이 특히 1970~1980년대 의식 있는 젊은 세대들로부터 사랑받은 건 노래가 좋았던 점도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의 암울한 시대상황의 영향도 컸다. 버려진 악보로 연습해 취입그래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다. 양희은이 불러 히트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민기는 이 노래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 때 여러 번 <아침이슬>에 애정이 없는 듯한 말을 자주 한 게 이를 뒷받침해준다.그러나 가수 양희은의 생각은 달랐다. 김민기가 노래를 만들었다며 불러주는 순간 ‘아주 좋은 곡’이라며 맘이 끌렸다. 작사 · 작곡가와 가수의 시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연습하면서 악보를 획~ 버리자 양희은은 이를 주워 자신의 노래로 소화시켜나갔다.‘꼭 녹음 해야겠다’고 작심한 양희은은 원작자(김민기)보다 먼저 <아침이슬>취입에 성공했다. 음반제작은 방송사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하면서 이뤄졌다. 빅 히트송 <아침이슬>이 있기까지엔 가시밭길을 걸어온 김민기의 지난날 삶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현재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부친이 6·25전쟁 때 북으로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는 바람에 유복자가 됐다. 경기중·고를 거쳐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대학 3학년 때인 1970년 <아침이슬>을 발표, 새내기 대중음악 작곡가로 명함을 내밀었다. 이듬해엔 독집음반을 내면서 가수로도 데뷔했다. 3선 개헌과 대통령선거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무렵이다.노래 못잖게 1971년 가을 그에겐 의미 있는 한 만남이 있었다. 저항시인 김지하와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김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문화적 체험을 한 그는 가톨릭문화운동, 국악대중화, 마당극운동 등을 펼치며 제도권으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취급받았다. 1971년 서울 신정동에서 야학을 시작했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도 뛰었다. 금관의 예수(1973년), 소리굿 아구(1974년) 공연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금지곡서 국민가요 ‘햇빛’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김민기 노래를 순수대중음악에서 현실비판적 의식가요로 재해석케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독집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환영회에 초대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레코드를 모두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방송금지에다 연행→조사→석방이 거듭되면서 ‘찍힌 인물’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택한 게 군 입대. 1974년 10월 카투사로 들어가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주한미군방송인 AFKN방송국. 사병근무지론 비교적 편안한 데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이슬> 노래 때문이었다.이듬해 전국이 유신헌법 찬반투표 거부운동으로 들끓었다. 대학가에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정치권 공방도 치열했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은 투표 당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종일 투표참가를 거부하는 집회와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행사 때 주요 음악레퍼토리는 김민기 의 노래. 그러나 이 사실이 당국에 들켜버렸다.그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김민기였다. 내복도 입지 않은 채 보름간 감방생활을 한 뒤 최전방으로 쫓겨났다. 이어 그해 6월 문공부가 발표한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에 따라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노래가 시의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김민기 노래가 운동권가요로 자주 불리면서 탄압은 더욱 거셌다. 그럴수록 운동권에선 더 불렀다. 탄압강도가 더해질수록 서정적 노래로 태어난 <아침이슬>이 의식 있는 가요로 의미를 갖춰갔다. 운동권학생들은 험난한 미래에 대한 고뇌의 결단을 할 때 <아침이슬>을 불렀다. 데모대 힘은 바로 <아침이슬>의 우렁찬 울림에서 솟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어느덧 김민기는 의식 있는 음악인으로 운동권투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김민기는 정작 자신이 ‘투사’로 불리는 것을 꺼린다. 어느 날 TV회견 때 “아무 의도 없이 만든 노래가 운동권에서 자주 불린다고 해서 기관으로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살아오면서 남들과 크게 싸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가수입문 때 만난 김민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1997년 김민기 헌정음반으로 <1997 아침이슬>을 내놨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김민기를 위한 것이었다. 김민기가 대중의 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진 사람은 바로 양희은이었다.음악인 김민기는 이제 한국적 뮤지컬창시자이자 연극·연출가, 기획자로 변신해있다. 해금 4년 만인 1991년 서울 대학로 뒤편에 극장(학전)을 만들어 지금껏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가 무대에 올린 뮤지컬작품은 독일 원작의 ‘지하철 1호선’. 연출, 편곡, 작사는 물론 배우도 직접 뽑고 모진 합숙훈련도 했다. 원작자 루트비히는 “원작보다 낫다”고 했고, 중국 대표작가 위화(餘華)는 “한류의 정수”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뉴시스, 시사저널, 일요서울(편집국장)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2 00:00
‘소리 없는 살인자’ 청소년 우울증 사소한 일 짜증낼 땐 의심해봐야 … 주위 관심·대화가 ‘명약’ 우울증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우울증지수가 평균 46.2로 우울증 경계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증은 40~50대 갱년기 여성들에서 주로 생기지만 갈수록 나이대가 낮아지고 있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는 요즘 청소년들도 예외가 아니다. 매년 청소년의 2~3%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올해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이제 성적 발표만 남겨두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의 한숨보단 내 자녀의 정신건강에 더욱 힘써야 할 때다. 수년간의 노력이 결과로 나타나므로 기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땐 지나친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불러 올 수 있다. 비단 수능을 마친 고교 3학년생뿐만 아니라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도 불릴 만큼 흔한 질병이다. 신경전달물질이 완전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 되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생긴다. 우울증은 심리 사회학적(애착관계, 정신분석학적), 생물학적 원인(신경내분비, 신경전달물질, 유전적소인)등 많은 원인에 따라 복합적으로 생겨나는 병이다. 정신과 전문의는 이들 원인 중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중요 포인트로 꼽고 있다. 부모, 형제 중 우울증이 있을 경우 아이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그렇잖을 때보다 세 배나 높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의 사망, 부모 이혼 등 환경적 요인에 따라 생기기도 한다. 집중력 떨어지고 게임에 쉽게 빠져 청소년 우울증은 학업, 가족, 친구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이나 이혼 또는 부모에게 폭행을 당했거나 하는 환경적 스트레스에 따라 병이 생긴다. 특히 지나친 학습 요구가 있을 경우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발병되기도 한다. 최근엔 학업은 물론 인터넷, TV, 휴대폰 등의 영향으로 생긴 수면부족이 우울증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이고 절망적 태도와 같은 심리적 좌절감도 주요 원인이다. 청소년 우울증은 집중력을 떨어뜨려 학업을 게을리 하게 만든다. 짜증을 자주 내며, 공격성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우울증이 심하면 자해나 자살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자살 생각에 영향을 주는 심리·사회적 요인 연구’에선 절망, 스트레스, 가정환경 등과 함께 우울한 감정이 자살에 미치는 주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기분이 나쁘거나 안 좋은 경우 △특별히 기분 나쁠 일이 없는데도 계속 기분이 우울하거나 좋은 일이 있어도 별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경우 △학업성적이 떨어지거나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 △사소한 일에도 기분이 많이 상하거나 짜증을 내면 일단 우울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우울증은 성격이나 의지가 약해 생긴 병이 아니다. 의학적 질병으로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과전문의는 우울증 치료엔 뭣보다도 ‘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관심을 나타내고 도움주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청소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청소년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고 청소년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게 좋다. 증상이 오래 지속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거나 자해·자살 충동이 있는 경우 전문가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우울증치료 방법은 다양하다. 개인정신치료, 놀이치료, 인지행동치료, 가족치료 등이 그것이다. 심할 땐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며 80~90%가 치료될 수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31 00:00
노사연 <만남>“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만추이다. 가을걷이와 겨울을 준비하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결실을 계절을 맞아 갖가지 만남들도 잦다. 야유회, 등산대회, 체육대회 등에서 삶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어우러진다. 그런 모임에선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로 나가는 노사연의 <만남>노래가 곧잘 불린다. 부르기 쉬고 노랫말 뜻이 깊어 여러 모임에서 자주 애창되는 대중가요다. 194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대중음악 50년 사 베스트 50곡 중 40위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만남>이 만들어진 건 1986년. 21년 전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발표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 이 노래와 함께 모임 때 자주 불리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다.작곡가는 ‘노래 문외한’ 막내 이모부 <만남> 작곡가는 최대석 씨. 노래를 부른 노사연의 막내 이모부다. 미국서 사업을 하는 최 씨는 노래엔 문외한으로 알려져 흥미롭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록의 이 노래 작사가는 박신. 노래는 노사연이 많은 사람들과의 적극적 만남을 통해 가수가 됐다는 것을 잘 아는 작사가·작곡가의 합작으로 태어났다. 마치 <만남> 가사처럼 말이다.1978년 단국대 성악과 2학년생 신분으로 MBC주최 제2회 대학가요제에 출전, <돌고 돌아가는 길>(김욱 작사·작곡 / 4분의 3박자, 왈츠 곡)로 금상을 받아 가수가 된 노사연은 <만남>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공부와 노래를 겸해야하는 학생가수신분인데다 이렇다 할 곡마저 내놓지 못해서였다. 특히 대학 신입생 시절 첫 미팅 때 자신의 뚱뚱한 몸매를 본 남학생들이 던진 모멸감의 말로 충격 받아 결행한 무리한 살빼기에서의 후유증도 한 요인이었다. (노사연은 태어났을 때 4.8kg로 우량아였다.)그런 가운데 노사연이 가요제 입상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어느 날 담당교수가 그를 불렀다. “성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던지 택하라!”는 경고를 내린 것이다. 1977년 1월 경희대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떨어져 2차인 단국대 성악과에 2등으로 합격, 학교를 다녔지만 클래식보다 가요 쪽을 택해 가수 길을 걷고 있었던 터라 그는 전과를 결심했다. 어릴 때 이모인 대중가수 현미를 동경, “노래를 해볼까”하고 대학가요제를 지원해 입상한 그로선 중대한 선택이었다. 국문학과로 옮긴 노사연은 1983년 발표한 <님 그림자>(김욱 작사, 작곡 / 4분의 4박자, 트로트곡)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창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았으나 인기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초대받은 행사장에서 다른 여자가수들에게 출연순서를 빼앗기는 등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다. 개그맨 저리가라 할 만큼 웃겨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래하면서 장기인 재치·개그·유머로 부족함을 메워갔다. 10년의 무명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만남> 취입과 방송출연이 그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던 어느 날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다. 음반이 나온 지 한참 뒤의 일로 거기서 첫사랑인 여고 체육선생님과의 만남 얘기, “노사연! 너를 쭉 지켜봤는데… (아! 두근두근, 쿵쿵) 너 혹시…. 투포환 안 해볼래?”로 뒤집어지는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 코미디언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관중들을 웃겼다. 그를 처음 보거나 잘 몰랐던 사람은 가수보다 개그맨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어려워하며 자꾸 존댓말을 쓰더니 급기야는 상석으로 앉히더라고 했다. 노사연의 꾸밈 없는 모습에 <만남> 노래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1992년 <만남>으로 가수왕에까지 올랐다. 노랫말 구절처럼 “우연”이 아니라 그것은 가수데뷔 10년만의 “바람”이었다.그는 1957년 3월 3일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노양환 씨(1987년 작고), 어머니 김화선 씨(평양출신으로 북한 원로무용가 최승희 제자) 사이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 근무지 이동에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자랐다. 화천초등·중학교를 거쳐 화천실업고 1학년을 다니다 춘천여고에 재입학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그는 요즘 남편(가수 이무송)과 가끔 무대에 선다. KBS-1TV 주말 밤 음악 프로그램인 ‘콘서트 7080’에 부부가 나와 열창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기독교 신자로 어린 아들과 함께 교회에 다닌다. 그 곳에서 가족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며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해 눈길을 끈다. 인기 연예인 가족에다 구김살 없는 노사연의 구수한 입담까지 곁들여져 신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올 한해도 결혼, 미팅, 입학, 입사 등 만남의 의례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들 삶은 어떻게 보면 노사연의 노래 <만남>처럼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경남도민일보, 뉴시스, 시사저널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 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