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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호] 언택트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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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호] 언택트 소비
  • 김정응 FN 퍼스널브랜딩 연구소 소장/작가
  • 승인 2020.05.11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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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출처 : pixabay

[소비라이프/김정응 소장] 몇 해 전에 시골 고향에 때아닌 난리가 났다. 동네 아주 가까이에 모텔이 들어선다는 것 때문이다. 충청도 양반의 산골 마을임을 감안하면 야단법석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나중에 그 모텔은 들어섰는데 놀랍게도 사람이 없는 이른바 무인모텔이었다. 그곳은 지금도 동네의 주홍글씨로 남아 흉물로 취급되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근처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왜 사람이 안 보이지?”​

연료 부족 경고 등이 깜박였다. 급한 대로 처음 나타난 주유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인적이 없는 셀프 주유소였다. 셀프 주유 경험이 없었던 터라 몹시 당황했다. 다행히 주유를 하긴 했지만 낯선 야간 국도변 주유소에서의 ‘사람 없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잠시 먼 나라 어느 곳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사람이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드문 것 같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식사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의 하나다. 어느 날 자주 이용하던 휴게소에 들렀는데 메뉴를 주문할 데스크가 보이지 않았다. 기계로 메뉴를 주문하는 키오스크로 바뀐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편리한 것 같지만 왠지 기계와 함께 식사를 한 것 같다고 푸념했다. 아내와 아이들의 핀잔이 이어졌다. 물론 키오스크는 이제 식당, 커피숍, 편의점 등 오프라인 매장에서 사람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바야흐로 세상은 ‘언택트(Untact) 시대’다. 사실 위에 소개한 이야기는 철 지난 일상의 에피소드이지만 바로 ‘언택트 소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언택트는 접촉한다는 의미의 ‘콘택트(Contact)’와 부정의 의미 ‘언(Un)’을 합성한 신조어다. 즉 ‘접촉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판매자와 소비자의 접촉을 최소화해서 정보를 소통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의 새로운 소비 경향을 말한다. 특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면서 ‘언택트 소비’는 유통가뿐만 아니라 금융, 패션, 뷰티 등 사회 전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나면 갑론을박 말들이 많다. “이런 게 바로 새로운 세상을 사는 거죠”, “삭막해, 사람 사이에 정(情)이라는 게 있는 건데”, “사람과 마주치기 싫어요”라는이 새로운 소비 트렌드는 특히 앞선 사용자(early adopter)가 아닌 필자에게는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일자리 감소, 디지털 소외 계층 발생 등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더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여러 상념이 머리를 휩싸고 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과학이나 기계 문명의 발달이 잘못 사용되면 인류를 낙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보 멍청이들이 사는 디스토피아 세상으로 이끈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 소설에 소비에 대한 내용을 더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작금의 ‘언택트 소비’가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소비야말로 미덕이라며 적극적으로 장려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신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스마트폰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오죽하면 스마트폰을 또 다른 인간의 장기(臟器)라고 부르겠는가? 기계가 주인이고 인간이 노예라는 말 또한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언택트 소비’라는 신 물결까지 접하고 보니 괜한 걱정 하나가 또 생겼다. 마치 우리가 편식을 해서 영양결핍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뭔가에 중독돼서 혼자 고립을 자초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모두가 무인도에서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만 같다. 한편으로는 인건비 절약을 위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우리 소비자들이 손 놓고 이용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왜 그런 주장을 했겠는가?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기계 문명 때문에 타락함으로 인간의 삶과 감정을 자연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한쪽으로 편향된 어떤 부작용에 대한 경고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의 비대면 소비 현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을 배제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미증유(未曾有)의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 냄새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랜만에 듣는 지인의 음성이 마치 ‘천사의 목소리’ 같았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적 거리는 멀어졌어도 마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을 것이다.

대면 즉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기업과 소비자 모두 노력해야 한다. 기업은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에 매몰되지 말고, 소비자는 언택트의 편리성에 빠져 사람과의 소비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러한 것이 정말 힘들다면 대신에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사람 냄새를 맡고 지내자. 독서, 예술 등 인문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자. 그러면 자칫 무인 소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간성의 빈곤을 조금이라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대면 즉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이제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 노력해야 할 때이다. 기업입장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소비자는 언택트의 편리성에 빠져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이 정말 힘들다면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사람 냄새를 맡고 지내자. 독서, 예술 등 인문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자. 그러면 자칫 무인 소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간성의 빈곤을 조금이라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사무실 맞은편 빌딩의 글판에 담긴 메시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 목필균 『함께하다』 中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함께하는 그곳이 진정 멋진 신세계가 아닌가 한다. 좋은 마케팅도 좋은 소비도 역시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 

스마트폰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오죽하면 스마트폰을 또 다른 인간의 장기(臟器)라고 부르겠는가? 기계가 주인이고 인간이 노예라는 말 또한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언택트 소비’라는 신 물결까지 접하고 보니 괜한 걱정 하나가 또 생겼다. 마치 우리가 편식을 해서 영양결핍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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