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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에 드리워진 현실 빈곤층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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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에 드리워진 현실 빈곤층의 그림자
  • 전유진 소비자기자
  • 승인 2020.05.11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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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쾌거 안긴 영화 '기생충', 의류 브랜드 협업 소식에 반응 엇갈려
가난마저 빼앗겨 버린 현실 속 빈곤층의 어둠
출처- unsplash
출처 : unsplash

[소비라이프/전유진 소비자기자] 지난 2019년 5월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2020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관왕 쾌거를 이룬 영화 '기생충'이 한 의류 브랜드와 협업해 상품을 만든다. 이에 좋아하는 영화를 옷으로 만난다는 긍정적 반응도 있지만 영화로 가난을 전시하고, 의류로 치장한다는 부정적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논란의 시작은 지난 8일 영화 '기생충'과 의류 브랜드의 협업 상품이 정식 발매되며 올라온 콘셉트 사진이다. 기생충을 의미하는 'Parasite'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델들은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이 살았던 반지하 집을 연상케 하는 여러 배경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옷을 부각한다.

곰팡이가 잔뜩 슬고 천장 벽지가 뜯어져 나간 방. 연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지하실. 전파가 터지지 않는 낡은 화장실. 누군가에겐 몸을 뉠 수 있는 것만으로 소중한 삶의 터전은 영화 속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한 배경으로 전락하고 가난을 '멋'으로 치장한 모델들 앞에 현실 속 빈곤층은 잊히고 있다. 가난마저 미디어에 빼앗긴 빈곤층의 삶엔 그림자가 가득하다.

누리꾼들은 '실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엔 관심도 없으면서 가난을 치장하고 전시하려 든다'며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누리꾼은 가난도 '힙'이 되었다고 말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행에 밝다는 의미인 영어 단어 'hip'에 접사 '하다'를 붙인 신조어 '힙하다'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사회에 의해 가난이 유행으로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가난을 유희거리로 대상화하는 사회 앞에 그 주인은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다. 바로 영화 '기생충'의 주요 촬영지로 유명한 서울 마포구 아현1동 주민들의 이야기다. 영화 초반부 아들 기우가 친구 민혁과 술잔을 기울이며 부잣집 과외 제안을 수락했던 슈퍼가 있으며, 있는 자인 박 사장 가족과 없는 자인 기택 가족의 위치를 구분 짓는 계단이 존재한다. 이처럼 영화 속 가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아현1동은 영화의 흥행과 최근 아카데미상 수상에 일명 '기생충 관광'의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관광객들은 슈퍼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하기도 하고, 계단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분위기를 만끽한다.

수많은 관광객이 동네를 휘젓고 있는 탓에 주민들은 불안하고, 또 불편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 나오지도 않은 일반 주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관광객에 사생활 침해는 물론 '가난 전시'의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가난을 문화로 향유하는 거대한 사회 앞에 그 삶의 주인들은 무기력하다.

1975년 발표된 박완서 작가의 '도둑맞은 가난'에선 가난한 주인공이 좋아했던 '상훈'이라는 남자가 실은 부잣집 대학생이며, 별난 아버지 때문에 '가난장난'을 했음이 밝혀진다. 큰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라며 혼란스러워 한다. 45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그 내용은 오늘날과 다를 게 없다. 가난마저 훔쳐가는 사회 앞에서 빈곤층에 드리운 것은 어두운 그림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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