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공격하는 세균 이용 파지 치료제 개발 길 열려
[소비라이프 / 김요찬 소비자기자]
파지 치료제 난제 극복할 열쇠…인류 면역계의 고대 기원 파악에도 일조
내성균의 급증으로 기존 항생제가 무력화되는 '슈퍼버그'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세균만 골라 파괴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를 활용한 차세대 치료 기술의 결정적 난제가 풀렸다. 세균이 바이러스의 침투를 정밀하게 감지하고 스스로를 희생해 집단을 지키는 비상 방어 체계의 동작 원리가 밝혀진 것이다.
미국 유타 대학교 보건대학원 생화학과 샘 홉스(Sam Hobbs) 조교수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세균이 박테리오파지의 공격을 인지하고 면역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새로운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해당 연구 결과를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Science에 게재했다.
바이러스의 단백질 분해 효소가 당긴 세균의 '자기소멸' 비상벨
세균은 바이러스에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는다. 세균 역시 진화 과정을 통해 'CBASS'라 불리는 강력한 면역 방어 체계를 구축해 왔다. 이 시스템은 감염이 확인되면 해당 세균 세포를 스스로 희생하게 만듦으로써, 바이러스가 주변의 다른 세균으로 증식·전이되는 것을 차단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문제는 세포 자신의 사멸을 동반하기 때문에 오작동 없이 진짜 침입만을 정밀하게 판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그 감지 스위치가 역설적이게도 바이러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핵심 효소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박테리오파지가 침투할 때 분비하는 단백질 절단 효소(Protease)가 세균 내부의 특정 센서 단백질을 자르는데, 이 잘라진 단백질 조각이 곧바로 세균 면역계 전체를 가동하는 결정적 경보 신호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유전물질을 직접 노출하지 않더라도, 바이러스의 활동 자체가 세균의 감지망에 포착되는 셈이다.
기존 관념을 뒤엎은 발상…파지 치료제 개발의 새로운 이정표
그동안 학계에서는 세균이 주로 바이러스의 외래 유전체(DNA/RNA)를 직접 인식해 공격을 감지한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바이러스 단백질의 작용 결과물 자체를 인지하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면역 반응을 입증해냈다.
이 발견은 항생제 대체재로 주목받는 '파지 치료제(Phage Therapy)'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에는 박테리오파지를 환자에게 투여하더라도 세균의 강력한 면역 장벽에 막혀 치료 효과가 떨어지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세균의 CBASS 감지 시스템을 우회하거나 경보 스위치를 자극하지 않는 '지능형 파지'를 설계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억겁의 시간을 넘어선 면역의 역사…인간 면역계와의 접점
이번 연구는 미생물의 방어 기전을 밝힌 데서 나아가 인류 면역의 뿌리를 추적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균의 CBASS 시스템은 인간을 포함한 고등생물의 선천 면역 회로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이는 세균과 인간의 공통 조상이 존재했던 수십억 년 전 선사시대부터 이러한 바이러스 방어 기전이 보존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세균이라는 단순한 생물체 모델을 통해 인간 면역계의 복잡한 바이러스 대응 원리를 정밀하게 밝혀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에 규명한 센서 작동 구조를 바탕으로, 세균의 면역 망을 피할 수 있는 맞춤형 박테리오파지 제형 개발과 함께 인체 면역 질환과의 연관성에 대한 후속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