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상의 금융칼럼 ③] 국내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관투자자 육성과 ETF 활성화
한국 자본시장이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글로벌 선진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체질부터 바꿔야 한다. 그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가 장기·안정적인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투자자의 역할 확대다.
국내 증시는 외국인 투자자의 자금 유출입에 따라 시장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개인투자자 역시 기관과 비교하면 정보력과 분석 능력, 위험관리 수단 등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
따라서 외국인과 개인 중심의 수급 구조를 보완하고 연기금·보험사·공제회·자산운용사 등 장기 기관자금이 시장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관투자자의 장기자금과 ETF(상장지수펀드)를 연결한다면 자본시장의 안정성과 투자상품의 다양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 기관투자자를 단순히 ‘증시를 떠받치는 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투자와 기업가치 제고를 이끄는 시장의 중심축으로 육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첫째, 기관투자자의 장기자금을 끌어들이는 세제·비용 체계를 검토해야 한다
기관투자자의 자금 집행을 유도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장기투자에 적합한 세제와 비용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연기금, 보험사, 공제회 등이 장기투자 목적의 펀드나 ETF에 투자할 경우 투자기간과 상품의 성격에 따라 세제상 인센티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단기매매가 아니라 장기적인 자본 공급에 정책적 혜택을 집중하는 방식이다.
운용비용을 낮추는 방안도 중요하다. 기관이 대규모 자금을 장기간 ETF나 펀드에 위탁할 경우 규모의 경제에 맞는 수수료 체계를 적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다만 세제 지원이나 정책자금은 단순히 ‘국내 주식을 산다’는 이유만으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 장기투자 기간, 운용성과, 책임투자, 기업가치 제고 효과 등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공적 연기금의 역할을 ‘단기 수익률’에서 ‘장기 자본시장 육성’까지 확대해야 한다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은 국내 자본시장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장기투자자다. 이들 기관의 투자 방향은 개별 종목뿐 아니라 시장 전체의 투자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연기금 운용성과를 평가할 때 단기적인 수익률뿐 아니라 장기 수익률과 위험관리, 책임투자, 기업가치 제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AI·바이오 등 미래 성장산업이나 기업 밸류업과 관련된 ETF도 장기투자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연기금에 특정 산업이나 특정 ETF 투자를 일률적으로 의무화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연기금의 최우선 원칙은 어디까지나 수익성·안정성·독립성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투자 대상을 직접 지정하기보다는 연기금이 독립적인 투자 판단 아래 장기 성장산업과 기업가치 제고 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기관이 안심하고 ETF를 거래할 수 있는 시장 인프라가 필요하다
기관투자자가 ETF 시장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려면 상품의 다양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대규모 거래에서도 가격 충격과 거래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장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
기관의 위험관리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채권혼합형, 자산배분형, 헤지전략형 등 다양한 ETF의 개발을 촉진하고 새로운 상품의 상장·운용 규제도 시장 변화에 맞게 지속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ETF의 유동성공급자(LP) 제도 역시 중요하다. 매수·매도 호가 간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기관의 대량 주문이 시장가격을 크게 움직이지 않도록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기관투자자를 위한 대량매매(Block Deal)와 장외 거래 인프라 등을 효율화해 대규모 자금의 시장 충격비용을 줄이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ETF 시장의 진정한 선진화는 상품 수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시점에 적정한 가격으로 대규모 거래를 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데 있다.
넷째, 기관투자자를 ‘장기 주주’로 육성해야 한다
기관투자자 육성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기관의 주식 보유 비중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기관이 장기 주주로서 투자기업의 경영을 감시하고 기업가치와 주주가치 제고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을 높이고 기관투자자가 합리적인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장기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도 보다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일정 기간 이상 장기투자하는 기관에 거래비용이나 제도상 혜택을 차등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장기보유 자체만을 우대해서는 안 된다. 장기간 보유하면서도 기업 경영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는 ‘수동적인 주주’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보유와 책임 있는 주주권 행사를 함께 평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기관 대 개인’ 아닌 자본시장의 균형이 목표다
한국 자본시장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투자자가 많거나 외국인 투자자의 영향력이 크다는 데서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인투자자는 시장의 중요한 참여자이고 외국인 투자자 역시 국내시장에 유동성과 글로벌 투자자금을 공급한다.
문제는 특정 투자주체의 비중이 아니라 시장의 균형이다.
외국인 수급 변화에 시장이 지나치게 흔들리고 개인투자자가 정보 비대칭과 높은 변동성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구조라면 이를 보완할 장기투자 주체가 필요하다.
연기금·보험사·공제회·자산운용사 등 전문적인 분석 능력과 장기자금을 갖춘 기관투자자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여기에 ETF를 장기투자와 자산배분의 핵심 수단으로 연결한다면 국내 증시는 단기적인 매매 중심 시장에서 장기적인 자산형성 시장으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도 이제 기관투자자에게 단순히 “국내 주식을 더 사라”고 요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제와 비용체계 개선, 연기금 운용평가 개편, ETF 유동성 인프라 확충, 장기투자 인센티브,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정책이 필요하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길은 단기간에 주가지수를 끌어올리는 데 있지 않다.
장기자금이 좋은 기업을 찾아 투자하고, 기관이 책임 있는 주주가 되며, 그 성과가 ETF와 펀드를 통해 국민의 자산 증식으로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한국 자본시장이 진정한 선진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유호상 금융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