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떠도는 부(富)] 십자군이 가져온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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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십자군이 가져온 탐욕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2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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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 사실은 교회 권위를 세우기 위한 행동
성전에 대한 고결함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중세유럽은 나라별로 왕의 통치를 받았지만 그 위에는 교회가 있었다. 봉건제의 특성상 수도와 인근의 중요지역은 왕이 직접적으로 다스렸지만 지방 영지는 왕과 계약관계를 맺은 기사나 귀족이 다스렸다. 그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영향력을 떨쳤던 것이 바로 로마교회의 주교이자 가톨릭의 수장으로 최고권위를 가졌던 교황이다.

교황은 유럽 국가들의 왕위계승과 왕실의 결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혼할 때도 교황청에 요구해 교황이 혼인무효를 인정해야만 했다. 물론 교황이 이해관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아 갈등을 빚는 경우가 있었고 이로 인한 불만은 결국 종교개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교황이 국가를 상대하면서 영향력을 키웠다면 각 지역에 있던 수도원과 교회들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황과 교회의 영향력이 절정에 이른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바로 ‘십자군전쟁’이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크고 작은 나라가 성장과 쇠퇴를 거듭했고 서서히 혼란이 멈추어가던 서유럽은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로마노스 4세는 1071년에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던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잃었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면서 격변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너무 약해진 제국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1095년 3월 피아젠차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사절단을 만나 요청사항을 듣고 로마교회의 오랜 굴레였던 동로마황제로부터의 종속을 끊어낼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십자군을 구성하기 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1095년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열리던 클레르몽 공의회에 유럽의 성직자 300여 명을 모아놓고 여러 문제를 논의하다가 27일 이슬람교도가 정복한 성지를 해방시키고 동로마제국을 구하자는 메시지를 내놓는다. 이슬람과 싸우다가 쓰러진 자는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성전을 펼치는 데 동참하라고 열변한다.

르 퓌(Le Puy)의 주교였던 귀족 출신, 몽테유의 아데마르(Adhemar de Monteil) 지휘 아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던 십자군은 이슬람과의 여러 전투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쾌거를 거뒀다. 에데사에 최초의 십자군 나라인 에데사 백국을 시작으로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약탈은 유럽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물건들이 유럽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약탈 과정에서 전해진 증류법으로 유럽에는 ‘생명의 물(Aqua Vite)’이란 새로운 문물이 전해져 이것은 오늘날의 위스키와 브랜디(꼬냑, 그라빠), 보드카 같은 술이 만들어진 계기가 됐다.

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세우고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십자군의 성공을 홍보하기 위해 예배 중에 강론을 하며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이 이교도들을 무찌르는 과정을 미화했다. 작가와 화가들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십자군을 미화하는 그림과 문학 작품을 만들었다. 이를 보고 읽으면서 십자군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졌고 이후에 이어진 원정대 지원자들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십자군이 가져온 약탈품들은 유럽에서 고가에 거래됐고 십자군에 참여해 많은 약탈품을 챙기겠다는 계산법이 생기면서 유럽의 영주들은 성전에 대한 고결함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된다.

1차 십자군이 아나톨리아에서 실패했다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았겠지만 성공한 십자군은 교황과 왕들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해와 재화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이후로도 200여 년 가까이 이어졌다. 또한 유럽의 눈을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지리적인 소통은 물자와 지식의 교류를 낳아 유럽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이강희 칼럼니스트
이강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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