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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남자가수 강진(53)이 부른 대중가요 <땡벌>이 인기다. 노랫말이 재미있고 멜로디가 경쾌해 사랑을 받고 있다. 노래제목과 가사에 나오는 ‘땡벌’이란 단어부터가 특이하다. 한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맛을 준다. 땡벌은 땅벌의 경상도 사투리로 ‘땡비’ ‘땅삐’로도 불린다. 땅속에 집을 짓고 사는 토봉(土蜂)의 일종이다. 큰 몸집의 말벌이 여기에 속한다.  탤런트 겸 배우인 조인성을 비롯해 V.O.S의 김경록 등 여러 스타들이 <땡벌>을 애창곡으로 삼을 만큼 이 노래엔 뭔가를 끄는 매력이 배어있다. 지난해 노래반주기 전문기업 TJ미디어와 다음 노래방동호회 ‘놀방파’가 네티즌 3백여 명을 대상으로 ‘새 모임에서 분위기를 사로잡을 때 꼭 부르는 노래’를 집계했을 때 <땡벌>이 들어갔다. 1천5백35곡의 후보곡들 중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가 1위 △빅마마의 <체념>이 발라드곡임에도 2위 △소찬휘의 <티어즈>가 3위 △자우림의 <매직 카펫 라이드>가 4위를 차지했고 트로트곡으론 <땡벌>이 최대 지지를 얻은 것이다. 강진이 <땡벌>을 부른지 6년 만에 얻은 성과다.리메이크 곡…원래 나훈아가 불러그러면 히트곡 <땡벌>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이 노래는 원래 나훈아(본명 최홍기)가 작곡·작사하고 취입해 음반까지 냈다. 그러나 그의 다른 곡들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했다. 1947년 부산 태생인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 <물레방아 도는데> <잊을 수가 있을까> <강촌에 살고 싶네> <바보 같은 사나이> <해변의 여인> <울긴 왜 울어> <청춘을 돌려다오> 등 숱한 히트곡들을 쏟아냈다. 세계 최다의 히트곡(1백20 여곡)을 부른 가수로 앨범발표 수 2백여 장, 취입곡 수 2천6백여 곡(이중 8백여 곡이 자작곡)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나훈아의 원곡이란 걸 아는 이가 별로 없다. 또 노래가 방송을 타지도 못해 알려지지 않았다.그 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무명가수였던 강진이 아내(여성그룹 ‘희자매’ 멤버인 가수 김효선)와 가요계 선배인 나훈아를 찾아갔다. 나훈아 모창가수로 오래 무명시절을 보낸 강진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땡벌> 노래가 마음에 드니 줄 수 없느냐”고 했다. <땡벌>을 리메이크해서 음반을 내고 싶다는 얘기다.  나훈아는 한참 생각하다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그리고 가사를 약간 고친 뒤 반주녹음작업까지 해주면서 “강진 씨는 언제가 내 노래로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고 격려했다. 강진은 그렇게 해서 2001년 <땡벌>을 취입해 발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래나 가수가 뜨지 못했다. 그나마 노래방에서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게 들리는 가사에다 따라 부르기가 쉬워서다. 노래방에서부터 사랑을 받으며 대중들에게 서서히 먹혀들었다. 음반이 나온 지 3년 뒤인 2004년에야 히트곡 대열에 끼어들었다. 조인성이 불러 여성관객 인기몰이2006년 6월 중순 개봉된 액션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을 통해서도 <땡벌>이 퍼져 나갔다. 히트곡의 결정적 계기를 맞은 것이다. 조인성은 영화에서 조직폭력배 역할을 맡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땡벌>을 불러대며 여성관객들을 빠져들게 했다. 수준급의 노래실력에다 춤까지 곁들여 화제를 모았다. ‘국민 트로트 송’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영화에 이어 KBS-2TV의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서도 <땡벌>이 소개돼 히트곡 몰이에 가속을 붙였다. 졸지에 인기가수로 뜬 강진은 노래를 흔쾌히 준 나훈아를 찾아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땡벌>이 새로 각광받은 데는 근래 들어 대중문화 핵심소비층으로 떠오른 중·장년들에겐 익숙한 향수를, 신세대들에겐 참신한 흥겨움을 안겨준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대중들이 애창하는 트로트곡으로 영화, 드라마 등과의 짝짓기를 통해 시너지효과를 얻은 것도 한몫했다.  <땡벌>로 졸지에 ‘귀하신 몸’이 된 강진에 대해 궁금해 사람들이 많다. 그가 가요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86년. 20년 가까이 무명세월을 보냈다. 그랬던 그가 <땡벌> 덕분에 ‘매니저까지 두게 됐다’고 자랑할 만큼 바빠졌다. 그는 “최근 2~3년 활동이 지난 20년 동안 뛴 것보다 더 활발하다”고 말할 정도다. 밤무대가수에 머물렀던 그가 하루아침에 인기의 중심에 선 것이다. 밤무대를 빼고도 한 달에 수 십 건의 출연과 방송 오락프로그램, CF촬영, 인터뷰 세례를 받고 있다. 강진은 한 방송인터뷰에서 “<땡벌>이 뜨기 전엔 쉬는 날이 많았는데 지금은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을 정도로 바빠졌다”면서 “연락이 뜸했던 분들이 부쩍 건강을 챙겨주고 ‘잘 될 줄 알았다’면서 격려전화도 많이 걸어온다”고 싱글벙글이다. 후속곡으로 '화장을 지우는 여자'1986년 <이별의 신호등>이란 곡으로 데뷔했으나 무명와 다름없는 가수생활을 오래 해왔던 그는 <땡벌>의 히트로 비로소 빛을 보고 있다.‘대표곡을 갖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강진은 지난해 내놓은 <화장을 지우는 여자>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오랜 무명가수로서의 설움을 훌훌 털어버렸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후속곡 <화장을 지우는 여자>를 밀어붙이며 인기몰이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강진의 소속사 측은 “전국을 돌면서 방송하는 MBC 트로트순위 프로그램 ‘가요베스트’에서 10주 연속 2위를 차지, <땡벌>에 이어 다시 한 번 뜨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강진은 겸손해 한다. “1위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서운하지만 정상을 위협하는 2등이 오히려 더 좋은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뛰고 있다. 내가, 아니 트로트가 이렇게 뜨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역시 대중은 대중의 노래(트로트)를 원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9 00:00

소비자들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번지고 있다. 일본이 또 한번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독도를 자기나라 땅이라고 우긴다. 우리가 강하게 대응하면 쑥 들어갔다가 심심하면 한 번씩 생떼를 쓰는 모습이 웃긴다. 특히 일본 후쿠다야스오 총리가 중등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하기로 한 것에 대해 ‘당연한 주장’이라고 말한 7월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다시한번 마음을 적신다.   그런 분위기여서 그런지 8월이면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자주 방송전파를 탄다. 4대 국경일인 광복절(8월 15일)엔 단골노래로 불린다. 이 곡은 일본의 억지주장이 불거지면서 인기곡으로 떠오른 대표적인 대중가요다.   방송PD출신인 박문영 작곡·작사, 개그맨 출신 정광태 노래인 <독도는 우리 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1983년 초. 전두환 대통령시절로 5공 중반기에 탄생한 셈이다.  노래는 아주 우습게 만들어졌다. 사랑, 이별 등 통속적 소재로 만들어진 일반 대중가요와 달리 노랫말부터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상식들이 노래 중간 중간에 나오고 4분의 4박자의 빠른 템포에다 멜로디까지 경쾌해 다함께 부르면 더욱 흥겹다.KBS 코미디프로그램서 탄생  <독도는 우리 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까진 세 번에 걸쳐 사라질 뻔했던 우여곡절이 있었다. 노래는 방송 개그프로그램에서 비롯됐다. 작사가 손을 거친 노랫말에 곡을 붙여 가수에게 취입토록 하는 보통의 가요와 달리 노래태생부터가 이색적이다.  1982년 말 어느 날 KBS-TV 방송프로그램 ‘유머 1번지’ 개그작가였던 박문영 씨가 서울 여의도동 방송사사무실에서 열심히 원고를 쓰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유머 1번지’ 프로그램담당 김웅래 PD가 박 씨에게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노래가 없느냐?”고 물었다.   박 씨는 그 순간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어떻겠느냐?”고 답했다. 김PD는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담당PD의 OK사인을 받은 박 씨는 곧바로 방송사 도서실로 달려가 독도와 관련된 책과 자료들을 뒤졌다. 수집내용들을 바탕으로 그 자리에서 가사를 만들고 멜로디를 붙였다.  그 다음 주 TV방송 녹화장. 포졸 옷을 입은 임하룡, 정광태 등 4명의 개그맨들이 커다란 종이에 써 준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불러 무사히 방송을 내보냈다. 방송작가(박 씨)가 코미디담당PD 요청으로 개그용의 재미난 노래를 즉흥으로 만들어 시청자들을 웃게 만든 것이다.  박 씨는 방송프로그램의 코너를 마친 안도감에 가사를 적은 종이를 구겨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얼마 뒤 4명의 개그맨 중 뭔가 느낌을 가진 정광태 씨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수첩에 가사를 적어 호주머니에 넣고 나갔다.   개그용 노랫말로 쓰레기통에…정 씨는 이튿날부터 레코드회사를 찾아다니며 노래취입을 부탁했다. 정 씨는 “음반의 맨 끝 곡에라도 좋으니 음반으로 내어달라”며 레코드사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개그맨이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도 그렇지만 가사가 장난스럽게 받아들여져 ‘안 된다’는 시각이었다. 정 씨 얘기를 들은 레코드사 직원들은 한결같이 “그게 노래냐!”며 손사래를 쳤다.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정 씨의 끈질긴 집념이 갸륵해(?) ‘대성음반’이란 조그만 레코드사에서 맨 끝 곡으로 <독도는 우리 땅>을 실어 두 달 뒤 음반을 냈다. 대성음반은 노래의 상품성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음반수록을 부탁한 젊은 개그맨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끼어 넣어준 것이다. 히트가 예감되는 곡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기가수가 부른 노래도 아닌 까닭이다.  음반 끄트머리에 끼어 든 <독도는 우리 땅>은 음반이 나오자 장난기 있는 일부 라디오PD들이 이 노래를 심심풀이로 방송에 띄웠다. 하지만 반응은 거의 없었다. 영향력 있는 공중파 TV방송사의 가요PD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이었다. KBS의 한 간부가 우연히 그 노래를 듣고 “어떤 PD가 그런 괴상한 노래를 트느냐”며 불호령을 내렸다. PD가 불려가 꾸중을 들은 뒤 사무실엔 “<독도는 우리 땅>노래를 방송에 일절 내보내지 말라!”는 경고문이 나붙었다.  그렇게 해서 <독도는 우리 땅>노래는 더 이상 전파를 타지 못하게 됐을 무렵 때마침 “일본국회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긴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독도문제가 매스컴의 초점을 받자 대통령 주재 청와대회의에 거론되기까지 했다. 그 때 전두환 대통령은 그 노래를 들었는지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우리는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있잖아!” 하며 일본 쪽 주장을 일축했다.  대통령 말에 놀란 당시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은 급히 가수(정광태)와 작곡가(박문영)를 불러 차를 대접하며 <독도는 우리 땅>을 만들어 취입한 것을 칭찬했다. 허 차관은 두 사람에게 “애로가 없느냐?”고 묻자 정 씨가 “KBS에서 노래를 방송금지곡으로 묶어놓고 있어 억울하다”며 사정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허 차관은 그 자리에서 KBS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금지 시키지 말라” 당부했다. 그 무렵엔 말이 당부이지 거의 지시나 마찬가지로 말발이 먹혔다.  두 사람은 문공부를 나와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가던 중 차안에서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 이 노래는 각 방송 가요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고 광복절을 전후해선 인기곡으로 가요차트에 오르곤 했다. 1983년 개그맨 정광태 씨 취입정 씨는 졸지에 유명연예인이 됐다. 노래가 본격 선보인 1983년 KBS가요대상에서 신인가수상까지 받았다. 1990년대 들어 몇 차례 일본이 독도문제로 시비를 걸어왔을 때도 방송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만큼 개그맨보다 인기가수로 더 유명세를 탔다.   정 씨는 2000년 여름 ‘윤독도’라는 별명의 한나라당 윤한도 전 의원(경남 함안·의령)을 중심으로 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독도를 찾았다. 2002년엔 뗏목탐사, 2004년엔 울릉도 도동항~독도 수영종단으로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코미디용 방송프로그램녹화 후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악보를 개그맨이 음반으로 되살렸지만 방송사가 틀어주지 않아 사라질 뻔했던 <독도는 우리 땅>은 흔히들 방송금지곡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정광태 씨는 2005년 3월 28일 밤 한때 자신이 일했던 KBS-1TV의 심야 보도프로그램 ‘뉴스라인’에 출연, 노래와 독도지키기 내용들을 들려줬다.                                  <'독도' 명칭은 전라도 남해안 발음 '독섬'서 유래>독도는 신라 지증왕때 우산도(于山島)라 불리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라고 불렸다.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 섬으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들어갔다.행정지명으로서 ‘독도’란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됐다. 현재 ‘獨島’로 표기되는 독도는 ‘외로운 섬’,’홀로섬’이 아니다. ‘돌섬’이 초기 이주민인 전라도 남해안 출신 사람들에 의해 ‘독섬’으로 발음되면서 ‘獨島’로 표기 됐다. 석도를 훈독 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된다.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명치시대 전에는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 부르다가 1905년 영토편입 뒤 부터 다케시마(竹島)라 부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섬을 발견한 선박의 명칭을 따라 이름을 붙였다.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꾸르호가 독도를 발견, ‘리앙꾸르 암(Liancourt Rock)’ 으로 명명했다. 1885년 영국함선 호네트호 또한 ‘호네트 암(Hornet Rock)’으로 이름을 지어 자기들 해도에 등록했다. 하지만 이는 섬을 바위로 표시한 것으로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사항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8 00:00

15개월째 딸꾹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남자가 있다. 잉글랜드 동부 링컨출신의 크리스 샌즈(24)가 주인공이다.  BBC방송에 따르면 샌즈는 2006년 9월 처음 딸꾹질을 시작, 2주일 만에 없어졌으나 2007년 2월 재발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샌즈는 2초 간격으로 딸꾹질을 하고, 때론 잠자는 중에도 터져 나오는 딸꾹질로 잠을 자지 못할 지경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샌즈는 그룹 ‘이벌리언트’의 백 싱어 역을 맡고 있다. 하지만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단 4번 무대에 섰을 뿐 그룹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요가·최면·물 마시기 등 100개에 이르는 방법을 썼고, 뇌와 가슴에 대한 스캔도 해봤다. 그러나 아무런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다. 샌즈는 “잠도 잘 못 자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오랜 기간 딸꾹질에 시달리다 보니 기진맥진해진다. 내 삶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샌즈는 새로운 수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노팅엄 퀸즈메디컬센터 의료진으로부터 ‘딸꾹질증상이 위의 밸브가 손상돼 생긴 위산역류증 때문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샌즈는 곧 손상된 위의 밸브를 회복, 위산역류를 막아주는 키홀 수술을 할 예정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2 00:00

7080세대 포크가수인 유심초의 간판곡 <사랑이여>는 한편의 시를 읽은 느낌이 든다. 1975년 데뷔한 유심초는 인천출신의 형(유시형)과 동생(유의형)으로 이뤄진 듀엣그룹이다. 아름다운 화음을 선보이며 가요계에 데뷔한 이들은 준수한 외모와 감미로운 하모니로 1970~80년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사랑이여>는 이명박 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기간 때 이 대통령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 때 ‘18번 노래’(애창곡)를 묻자 “노래방 세대가 아니다. 유심초의 <사랑이여>, 노사연의 <만남>, 양희은의 <아침이슬>, 윤항기의 <이거야 정말> 등을 좋아 한다”고 했다. 이중 <만남>은 가수와 친해서라며 ‘이 노래가 최고’라고 추켜세웠다.최용식이 작사·작곡한 <사랑이여>는 4분의 4박자, 슬로우록 풍이다. 별, 꽃, 꿈, 사랑 등의 단어가 노랫말 사이사이에 나와 친근미를 더해준다. 노래가 히트하자 다른 가수들도 리메이크해 불렀다. 특히 가요계 50년인 패티 김과 조영남이 듀엣으로 부른 <사랑이여>는 눈길을 끈다. <사랑이여>가 만들어지기까진 에피소드들이 많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 가수의 길로 가겠다’는 아들과 ‘절대 노래할 수 없다’는 완고한 가수출신 아버지의 줄다리기 끝에 탄생됐다.유심초 멤버인 두 아들은 중·고교 때부터 통기타에 능했다. 1970년대 초부터 고향인 인천의 다운타운무대에서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끼’가 있었던 셈이다. 형제가수 ‘유심초’ 1981년 취입 대히트두 살 터울인 이들은 1975년 가요계에 데뷔했다. 대학가와 다운타운에서부터 인기를 얻어 앨범을 낸 독특한 경우다. 음반을 낼 때 형 유시형씨는 한국외국어대에서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어와 무역학을, 동생 의형씨는 한양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의형씨는 노래동아리에서 활동했던 형이 친구들과 방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 나가면 몰래 그 방에 들어가 형이 부르던 트윈폴리오노래나 팝송을 흉내 내곤 했다. 형은 우상이었고, 자신도 노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형씨는 그런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자 ‘듀엣을 만들자’고 권했다. 이렇게 팀을 이룬 둘은 전국대학축제를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찾아온 음반기획자 제안으로 1978년 첫 음반을 냈다. 제대(1974년)한 형과 대학생 동생은 가수 윤형주와 이종용의 도움으로 데뷔앨범 <너와의 석별>, <너>를 냈다. 그러나 활동이 순탄하지 않았다. 엄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수시로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가수보다 노래가 더 유명한 <너와 나의 석별>을 비롯해 가수 이종영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너>도 유심초의 노래다. 따지고 보면 <너와 나의 석별>(1978년)이 그들의 데뷔곡이자 첫 히트곡이다. 첫 앨범 수록곡 <너와 나의 석별>이 히트한 뒤 두 사람은 학업과 입대를 이유로 중간 중간 공백기를 가지면서도 짬짬이 활동했다.  그런 가운데 의형씨는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노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이 또다시 반대해 한 동안 가수의 길을 접었다. 그러길 2년이 흘렀다. 1980년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제 하고 싶은 노래를 불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노래 금지령’ 족쇄가 풀린 그들은 음반제작을 준비했다. 가수의 길로 본격 접어든 것은 1981년. 그해 발표한 앨범에서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히트하면서다. 길거리를 지나다니지 못할 만큼 인기였다. 지방공연 땐 팬들이 유심초가 탄 차에 올라타려고 해 백미러를 여러 번 망가뜨렸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바뀌어가는 가요계 분위기로 1985년 그룹을 해체했다. 3집 앨범을 내고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 것이다. 포크음악이 사양길을 걷자 형 시형씨가 미국 이민을 떠났다. 13년 만에 재결합…미사리 등에서 인기1990년대엔 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했다. 이들 형제는 2000년대 바람 새의 포크 부활캠페인 ‘잃어가는 우리 꿈을 위하여’ 덕분에 다시 뭉쳤다. 유심초가 해체된 뒤 라이브카페 붐이 일면서 뒤늦게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카페 최고인기곡으로 떠올랐다. 형 시형씨는 가수 백영규와 친한 벗 사이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유시형이 백영규가 부르도록 양보한 곡으로 훗날 크게 히트했다.동생 의형씨가 2001년 먼저 컴백한 뒤 2004년 2월 재결합,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다. 팀 해체 뒤 13년 만이다. 중년이 된 유심초는 요즘 다시 무대에 서고 있다. 세월은 갔어도 아름다운 하모니는 여전하다.“유심초란 이름으로 다시 활동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미국으로 떠나면서 음악세계에서도 완전 떠난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변에서 ‘언제 복귀하느냐’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 쪽에서 하던 사업이 있어 다시 음악을 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도 동생이 아니었으면 결정하기 어려웠을 거예요.”(형 유시형) 유심초의 재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의형씨다. 둘은 해체 뒤 가수가 아닌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시형씨나 국내에 남은 의형씨 모두 사업에 몰두하느라 노래와 담을 쌓고 지냈다. 유심초가 무대로 되돌아온 건 팬들의 뜨거운 요청 때문이다. 경기도 미사리 일대 라이브카페가 활성화되면서 유심초의 히트곡을 신청하는 팬들이 늘기 시작했던 것. 결국 의형씨는 미국에 있는 형을 대신할 기타연주자를 영입, 2001년부터 유심초란 이름으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2월 의형씨의 끈질긴 권유로 시형씨는 미국생활을 접고 돌아왔다. 유심초로 다시 뛰기 위해서다. 유심초는 미사리의 한 라이브카페와 계약을 맺고 무대에 섰다. 형제는 각각 슬하에 노래 솜씨가 빼어난 남매와 두 딸을 두고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10-01 00:00

봄이 완연해지면서 만남과 나들이가 잦다. 이 때 빠지지 않는 게 음악과 여흥이다. 그 중에서도 노래는 중요한 매개체다. 특히 사랑을 소재 삼은 게 자주 불린다. 웬만한 대중가요 제목엔 ‘사랑’이란 단어가 많이 붙어있다. 노랫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빠지면 안 될 정도로 단골가사들이 이어진다.가요 <사랑해>는 가사 처음부터 ‘사랑해’로 시작해 ‘사랑해’로 끝난다. 사랑의 종류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노래에선 연인과의 가슴 아픈 사연이 바탕에 깔려있다. 모임에서 부부나 애인끼리 노래를 부를 땐 이 노래가 으뜸 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슬로우록풍의 4분의 4박자로 부르기가 비교적 쉽고 내용도 다 함께 부르기가 좋은 까닭이다. 대중들 앞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뜻을 은근히 전하기 안성맞춤이라서 그럴까. 오경운 작사, 변혁 작곡…둘 다 ‘대학생’오경운 작사, 변혁 작곡, 라나 에 로스포 노래의 <사랑해>가 본격 알려진 건 1971년부터다. 라나 에 로스포가 1970년 말에 취입, 이듬해부터 방송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반응은 대단했다. 우리 한민족 노래 <아리랑> 버금가는 국민애창곡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결혼식, 약혼식은 물론 송년회, 사은회, 동창회 등 각종 모임에 <사랑해>는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 건 그보다 앞선 1969년. 작사가·작곡가가 잘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학생들 모임에서 애창되고 있었다. 물론 노래를 취입한 가수도 그 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사랑해>가 처음엔 라나 에 로스포가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가요가 아니란 얘기다. 라나 에 로스포는 이탈리아말로 ‘개구리와 두꺼비’란 뜻의 남녀혼성듀엣 이름이다.<사랑해>가 작사·작곡가 미상으로 대학가에서 불리자 통기타가수들도 노래가 좋다며 무대공연에서 자주 불렀다. 이때 은희와 라나 에 로스포를 결성한 한민이 서둘러 노래를 만든 사람 찾기에 나섰다. 전국을 수소문해서 찾은 작사가와 작곡가는 둘 다 대학생이었다. 작사는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오경운, 작곡은 서강대생이었던 변혁이 했던 것이다.이 두 사람은 어떤 연유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을까.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다. 작사가 오경운이 백혈병으로 숨져가는 자신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노랫말을 지었고, 이 사연을 전해들은 변혁이 군복무 중 여기에 곡을 붙인 노래다. 노랫말을 잘 새겨보면 병으로 가버린 애인과의 아픈 이별이 구구절절 묻어난다. 1절 가사 중간(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과 2절 가사 중간(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밤마다 그리는 보고 싶은 내 사랑아)이 그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그립고 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잘 드러나 있다.대학가에서만 알려졌던 <사랑해>가 라나 에 로스포의 취입으로 음반이 돼 나오고 노래 사연이 알려지면서 전국 젊은이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루아침에 히트곡이 된 건 말할 것 없다. 같은 대학생 입장에서 슬픈 사연에 동감했고 아픈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라 남녀만남에서 인기곡 1순위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더욱이 트로트가수들의 노래에 익숙했던 그 때 젊은이들에게 슬로우 록 리듬인 <사랑해>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섰던 것도 히트요소가 됐다. 그 중에서도 남녀 사이의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사랑해>는 제3공화국의 규격화 되고 굳어있는 사회분위기를 잠시나마 잊게 해줘 인기를 얻었다는 평도 빼놓을 수 없다. 노래에 얽힌 또 다른 사연으론 1971년 최고 히트곡이 되기까지 방송관계자들의 도움이 컸다는 점이다. 그 때 TBC(동양방송) 가요프로그램PD였던 임광호씨와 여자학사가수로 인기를 얻었던 김상희 씨의 남편(MBC PD 유훈근) 등이 적극 밀어준 것이다. 다른 가요들도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방송전파를 타지 않으면 쉽게 히트하기 어려운 터라 방송가 사람들 지원은 <사랑해>가 히트곡이 되는데 큰 힘이 됐다.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서 대표 함께 불러이와 함께 <사랑해>가 시대흐름을 잘 타 국민들의 눈길을 끌었다는 분석도 있다. 노래 취입 이듬해인 1972년 8월 30일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던 날 이 노래가 불린 것이다. 우리 측 이범석 수석대표와 북측 김태희 대표단장이 <사랑해>를 부르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돼 빅뉴스가 됐다. 이념과 체제가 배제된 가요인데다 남북이 사랑하는 애인처럼 헤어져선 안 된다는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어 양쪽 대표가 이 노래를 함께 부른 것. 남북대표가 손을 맞잡고 유행가를 합창한 건 남북분단 뒤 처음이자 마지막 있은 대사건으로 기록되는 감동적 장면이기도 했다.이 일이 있은 뒤 라나 에 로스포는 청와대로 초청 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참 좋은 노래를 부른다. 어둡고 침침한 노래보다 온 국민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이런 노래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칭찬을 받아 한동안 화제가 됐다.20대 나이에 시대를 초월한 불멸의 연가를 만든 두 주인공은 나이 60줄의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지낼까. 또 애인을 병으로 보낸 뒤의 일은 어떠했는지 후일담들이 궁금해진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9-30 00:00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다들 특별한 게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그게 비로소 예술이 되는 거죠.”국내 처음으로 ‘카메라박물관 카페’를 열어 5년째 운영해 오고 있는 누드사진작가 최영(62)씨의 예술관이다. 그는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술을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특별할 게 없다고 말한다. 나를 위해서 열정을 쏟고 거기에 ‘창작’이 보태어지면 그게 바로 예술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자기를 나타내고 보여줄 수 있는 무대에서 하는 모든 게 예술이란다.최 작가는 미국에서 20여 년간 누드사진작가로 뛰다 귀국, 2003년 서울 충무로에 카메라박물관 카페를 열었다. 그곳엔 45년 동안 모은 카메라들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또 곳곳에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카페를 찾는 손님들 대부분은 카메라만 둘러보지 않는다. 한쪽을 차지해 앉아 차를 마시는 여유를 갖기도 한다. 마치 카페처럼 곳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다른 박물관에선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날을 잡아서 찾아야하는 기존 박물관과는 달리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휴관일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가 모은 카메라와 액세서리는 약 1000점.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막연히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박물관카페를 열었다”며 박물관을 열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는 미국에서 알아주는 누드사진작가다. 시카고, 뉴저지, 뉴욕 등지에서 19차례 누드사진전을 가졌다. 이뿐 아니라 아시아사람으로선 유일하게 영국 BBC방송의 “미국 누드의 흐름”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전시회는 ‘이게 나야’ 라고 보여주는 것”그가 누드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된 데엔 남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갖고 있던 승부욕 때문이었다. 그는 1970년도 국내에서 하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일하던 어느 날 동료가 분수대 야경과 불꽃사진을 찍는데 같이 가자고 권했다. ‘어두운 밤에 찍은 사진이 얼마나 잘 나오겠느냐’는 생각에 재미삼아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다음날 동료가 보여 준 사진엔 분수대와 불꽃이 아름답게 수놓여져 있었다. 한 눈에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사진을 보여주던 동료가 “자네는 절대 나같이 찍을 수 없을 것”이라며 승부욕을 자극했다. 이 ‘사건’이 사진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됐다. 그 길로 ‘나도 사진을 하겠다’며 백화점을 찾아 엽서사진들을 샅샅이 찾아봤다. 평소에 관심 밖이었던 사진엽서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리고 사진관을 운영하던 동료를 찾아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진관련 책들도 빠짐없이 읽었다. 출판된 사진집을 보면서 사람 몸의 아름다움에 빠져 누드사진에 관심을 쏟은 게 지금에 이르게 됐다.사진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뒤 <아리랑>사진기자였던 선배를 따라 참가상이라도 받아 볼 요량으로 새한칼라사진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의 박물관엔 빼곡하게 들어찬 카메라 이외에도 많은 작품사진들이 걸려 있다. 전시회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다. 그는 후배 사진작가들이 전시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박물관 한 쪽을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여기서 열린 전시회는 <월간 영상>이란 잡지에 그가 쓴 사진 평론과 함께 실린다. 그의 박물관에선 어느 누구나 전시회를 가질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그는 이제 막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초년생에게도 “미국에선 7살짜리도 전시회를 연다”며 전시회를 하라고 권한다. 실력이 늘 때를 기다리다 보면 ‘평생 전시회를 갖지 못 한다’는 생각에서다. 사진을 배우겠다며 찾아 온 고등학생에게 사진을 가르쳐 주고 전시회를 갖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정도 연륜이 있어야 전시회를 가질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실력이 있어야 하고 연륜이 있어야 전시회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남들 보기에 형편없는 사진이라도 한 번 두 번 전시회를 열다보면 연륜이 쌓이게 된다는 것. 그는 이어 “전시회는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이게 나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단다.“사진을 잘 찍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그냥 느낌이 닿는 대로 셔터를 누르면 그것이 곧 예술인거야.”최근 준전문가용카메라가 값 싸게 나오면서 디지털카메라 사용인구가 늘었다. 자연히 사진에 취미를 갖게 된 사람들도 동시에 늘었다. 이들은 사진을 잘 찍기 위해 책을 보기도 하고, 동호회를 쫓아다니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최 작가는 사진을 잘 찍는 노하우는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찍으라’고 조언한다. “사진을 정말 잘 찍는 사람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해서 사진작가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반문한다. “한 사진작가가 절벽위에서 사진을 찍다 아래로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였어. 살기위해 기를 쓰고 올라오다 바위틈에 피어 있는 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찍었어. 그러나 그 작가의 감동이 사람들에겐 전해지지 않아. 사람들에겐 꽃을 찍은 것에 불과해. 그때 그 감동은 사진을 찍은 작가만이 느낄 수 있어. 안 그래?”등단시인…저서 12권 펴내최 작가는 다수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삶터 문학>을 통해 ‘사랑이 들린다’ ‘무인도’ ‘화산역’ 등의 시로 등단했다. 그의 시에선 낯선 두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경험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가 펴낸 시집엔 직접 찍은 누드사진과 쓴 시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가 펴낸 시집으로 ‘사랑으로 떠난 슬픈이여 누구에게든지 불 타거라’ ‘겨울 나그네’ ‘사랑은 홀로 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그는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1·4후퇴 때 부모를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1970년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 누드사진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까지 30여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작품집과 시집 등 12권의 책을 냈다. 또 최영 작가 홈페이지(www.ppknude.com)에서 그의 작품과 사진분야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9-30 00:00

 조운파 작사, 조운파 작곡, 주병선 노래인 대중가요 <칠갑산> 노랫말은 한편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콩밭, 베적삼, 산마루, 산새소리 등의 단어들이 친근감을 더해 준다.목소리를 가다듬어 감정을 넣어 차분히 부르면 가슴 한구석에 뭔가 찡함이 오는 것 같다. 복받쳐 터지는 슬픔의 감정을 구슬픈 가락 속에 잘 담아낸 우리나라 대중가요 최고 명곡 중 하나다.1989년 7월10일 반도음악에서 음반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4분의 3박자, 슬로우 왈츠 풍으로 힘든 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 어머니, 누나를 떠올리게 한다. <칠갑산> 노래가 탄생해 히트하기까진 여러 사연들이 있다. 10년 간격으로 노래취입이 두 번이나 이뤄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두 명의 가수가 노래취입을 제각각 다른 시점에 한 것이다. 더욱이 몸이 불편한 한 아주머니가 방송에서 눈물로 열창, 대중들에게 본격 알려지게 된 이력도 갖고 있다. 칠갑산 자락서 성장한 조운파씨 작사이 노래는 음악인 조운파 씨가 자신의 고향(부여) 부근 칠갑산의 농촌아낙네 모습을 소재로 태어났다. 그는 “산기슭 화전민인 한 아낙네가 가난 때문에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애처로운 얘기는 가난을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온 우리앞 세대들 얘기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8년 가을 어느 비오는 날 조 씨가 고향으로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칠갑산을 지나게 됐다. 스산한 늦가을 한티고개를 넘어가는데 차창밖엔 아낙네들 여러 명이 밭을 매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일하는 아낙네들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는 문득 어려웠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그들 가운데 ‘민며느리로 시집와 전형적인 시골여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난 것이다. 그의 생각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갔다.베적삼을 입은 아낙네는 홀어머니가 너무 가난해 읍내 부잣집으로 민며느리(며느리를 삼으려고 민머리인 채로 데려다 기르는 계집아이)로 보낸 딸이었다. 어머니는 굶지 말라고 보내면서도 마음이 아파 수시로 콩밭으로 달려갔다. 콩밭은 민초들의 힘든 삶터요, 아낙네는 가난을 어렵게 이겨낸 상징적인 세대다. 부잣집으로 민며느리 보낸 사연 담겨<칠갑산>엔 이처럼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어린 딸만 데리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한 모녀의 가슴 아픈 삶이 깃들여져 있다. 어느 중농 집안에서 ‘다 크지 않은 어린 딸이지만 민며느리로 보내주면 밭뙈기 한 쪽을 떼어주겠다’는 말에 고생을 해도 배는 곯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딸을 일찍 시집보낸 한 어머니의 한이 스며들어 있다. 조 씨가 내리는 빗속에서도 일하는 한티고개 아낙네들을 노래소재로 삼은 것도 그 옛 생각들이 불현듯 났기 때문이다.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조 씨는 칠갑산 자락인 그곳에서 자라면서 어려웠던 시절 농촌의 흙냄새를 맡으며 음악성과 문학성을 키워왔다. 산기슭에서 밭뙈기 한 쪽을 부쳐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민가들의 힘든 삶을 보아왔고 동네사람들의 티 없이 깨끗한 서민적인 순박함도 느끼면서 성장했다. 음악적 영감이 떠오른 조 씨는 그 때 생각들을 메모했다. 어느 날 그는 노래로 만들기로 하고 1978년 가사와 곡을 제자(가수 윤상일)에게 줘 취입토록 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무명음반으로 레코드가게 공간만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칠갑산>이 음반의 후반순서에 담겨있어 특별히 관심을 갖는 음악애호가 아니고선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자연히 팔린 음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가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개되고 불려 학생들의 인기곡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하길 10여 년. 노래가 거의 잊혀져갈 무렵 대학가요제출신 가수인 주병선이 이 노래를 다시 취입하게 됐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주병선의 맑은 음색과 창법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주병선은 추계예술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던 1988년 MBC대학가요제에서 <칠갑산>을 불러 금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1978년 가수 윤상일 씨가 처음 발표한 것을 리메이크해 부른 것이다.특히 주병선이 부른 <칠갑산>이 방송을 타고 있던 어느 날 ‘주부가요열창’ 프로그램에서 한 가정주부(주진주씨)가 불러 결정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몸이 불편한 이 아주머니는 자신의 이야기 같은 이 노래를 감정에 북받쳐 눈물로 열창, 시청자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대와 방송국 객석이 감동으로 하나가 됐다. 냉정해야할 심사위원들의 가슴도 울렸다. 가정주부 부르면서 국민가요로 ‘인기’그날 방송된 모습과 노래는 한순간 가요계의 화제 거리로 등장했다. ‘눈물의 열창사건’이 크게 알려지면서 <칠갑산>은 각종 모임, 노래방, 방송프로그램 등으로 번져나가 국민가요로 자리 잡았다. 음반이 날개 돋치듯 팔렸고 방송전파도 자주 탔다. <칠갑산>은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시로 북한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 있도록 했다는 ‘남한가요 20곡’ 가운데 들어있다. 흔히 말하는 ‘연변가요’로 불리면서 중국 조선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뒤 북한으로 흘러들어간 노래 중 하나다.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눈물과 애틋한 한이 가락과 노랫말에 절절히 배어있다. 전통음계인 궁상각치우, 즉 도레미솔라 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악성격의 가요라 할 수 있다. 고향 가며 한티고개 아낙네 모습 그려충남 청양군 장평면, 대치면, 정산면에 걸쳐 있는 칠갑산은 노래가 히트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주변가게들도 장사에 재미를 봤다. 이 산은 작사·작곡가 조운파, 가수 주병선, 눈물의 열창 아주머니가 만들어낸 명소가 되면서 삶의 향수를 자아내게 하고 자연 속의 쉼터로도 한 몫하고 있다. 노래제목이기도한 ‘칠갑산(七甲山)’은 청양에 있는 561m 높이로 계곡이 깊고 비탈이 가파른 편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칠갑산을 ‘충남의 알프스’라 부른다. 1973년 3월 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가졌다.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七甲山이라 일컬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이기도 하다. 이 산은 서울에서 3시간쯤 걸린다. 정산면 소재지에서 20분 거리다. 칠갑터널을 지나기 전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봄엔 철쭉꽃으로 유명하다. 산 8부 능선까지 차가 갈 수 있다. 거기에 조선말기 독립운동가 최익현 선생 동상이 있다. 또 ‘칠갑산 노래공원’ 입구(천장호수 위)엔 가사에 나오는 홀어머니와 딸의 조각상 ‘콩밭 메는 여인상’도 서있다. 하지만 요즘 그곳엔 콩밭 매는 여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9-01 00:00

사랑을 주제로 한 여가수 최진희의 노래 <사랑의 미로>는 진한 감흥이 돈다. 슬로우 고고 풍으로 잔잔히 흐르는 멜로디 구절구절이 가슴을 적신다. 여기에다 의미 있는 노랫말과 끈끈하게 호소하는 듯한 최진희의 해맑은 목소리가 어우러져 대중들 인기를 사로잡는다.지명길 작사, 김희갑 작곡의 이 노래는 북한에까지 널리 퍼져 수 년 전부터 인기유행가로 유명하다. 특히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술자리 등에서 이 노래를 목 놓아 부른다는 데서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한다. 북쪽에선 가사를 일부 고쳐서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흥미를 더해준다.“그토록 다짐을 했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 자주 위해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 / 그대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식이다.거부할 수 없는 같은 핏줄의 한 민족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노랫말 내용이 좋은데다 곡조가 부드럽고 따라 부르기 쉬운 까닭이기도 하다. 더우기 사상성만 강조되는 북한가요에 염증난 주민들도 이 노래가 인간 공통심리인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인다는 게 가요전문가들의 분석이다.태원이 부른 <나의 사랑>이 원조남북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랑의 미로>는 언제 어떻게 나왔고 얽힌 에피소드는 없을까. 이 노래는 최진희 보다 먼저 태원이란 가수가 1978년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이다. 그 때의 곡명은 <나의 사랑>. 그러나 태원은 이 노래로 재미를 못 봤다. 취입 후 음반을 냈지만 전혀 빛을 보지 못했던 것. 노래가 뜨지 못하자 그냥 태원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한 곡쯤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묻혀버린 노래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83년 되살아났다. 멜로디에 애착을 갖고 있던 작곡가 김희갑 씨가 이 곡을 다른 가수에게 줘 다시 부르도록 했다.그는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던 그룹 ‘한울타리’ 멤버 최진희를 생각했다. 평소 음악적으로 가까이 지내면서 창법이 뛰어나고 목소리컬러도 독특해 키울만한 가수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 최진희가 솔로가수로 변신해야할 사정이 생겼다.5년 뒤 ‘한울타리’싱어로 취입, 히트1983년 여름 한울타리의 <그대는 나의 인생>이 대히트를 기록하는 가운데 팀이 졸지에 해체된 것이다. 김희갑 씨는 한울타리의 2집 앨범계획을 멈추고 그룹싱어(리더 보컬)였던 최진희의 솔로음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 씨는 태원이 불러 알려지지 않았던 <나의 사랑>을 <사랑의 미로>란 제목으로 바꾸고 작사가 지명길 씨에게 가사를 맡겨 최진희의 데뷔곡으로 줬다. 그해 여름 킹레코드사에서 노래연습을 시키며 가요지도를 꾸준히 했다. 김희갑 씨 판단은 적중했다. 음반이 방송을 타면서 노래가 뜨기 시작했다. <사랑의 미로>는 그해와 이듬해 히트곡으로 인기절정을 누리며 신인가수 최진희의 주가를 크게 높였다. 야구로 치면 홈런을 친 꼴이었다.최진희는 <사랑의 미로>로 가요계정상에 올랐다. 소속 음반회사도 지구레코드사로 옮기는 등 여러 변화가 왔다. <물보라>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꼬마인형> <미운 사람>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도> <슬픈 고백> <외로운 여자> <카페에서> <낙엽> <여심> <눈물의 승차권>등 많은 인기곡들을 내놓고 가요계를 열심히 뛰고 있다. 최진희는 학창시절 합창부장을 맡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져왔다. “음악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아 학교 조회시간 애국가 제창 때 앞에서 지휘를 해 전교생이 다 알아주는 학생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집안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목소리가 뛰어나고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탤런트인 고모 등이 그녀의 끼를 발동시키는데 한 몫 한 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워낙 엄격해 최진희 부친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딸이 지금의 인기정상가수가 된 것이다.북한공연을 세 번 갔다 온 최진희는 2002년 9월 27일과 29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MBC평양특별공연 때 <사랑의 미로>를 불러 객석을 뜨겁게 달궜다. 그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자 관중들이 따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가하면  KBS·SBS의 북한 공연 때도 단골가수로 유명세를 입증했다. 최진희는 <사랑의 미로>에 이어 또 한번의 히트곡 대열에 도전하고 있다. 올 2월에 신곡이 나올 예정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6 00:00

2008년이 시작됐다. 한해가 열리는 이맘때면 대중가요 <아침이슬>을 흥얼거리게 된다. 김민기(57) 작사·작곡,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새로운 분위기가 든다. 노래제목처럼 이른 아침 영롱하게 맺힌 이슬의 느낌부터가 새롭다. 3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들어도 전혀 묵은 노래 같지 않다. 한 때 각 학교 교가보다 더 잘 알려져 7080세대들에겐 더욱 친숙한 국민가요다.노래가 탄생한 건 1970년. 사회적·정치적 사실과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진 순수 서정적 곡으로 태어났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노랫말이 다분히 시적이다. 잔잔하게 깔리는 반주에 양희은의 낭랑한 목소리가 버무려져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청년음악가 김민기와 풋내기 여가수 양희은을 졸지에 스타로 떠오르게 한 이 곡은 숱한 얘기를 낳은 노래로도 유명하다. 운동권가요의 대표 격으로 방송금지가 되면서 더욱 주가를 올린 점이 특이하다. 피 끓는 젊은 대학생들이 독재정권과 맞서며 청춘을 불태웠던 저항의 노래 상징으로도 꼽힌다. <아침이슬>이 특히 1970~1980년대 의식 있는 젊은 세대들로부터 사랑받은 건 노래가 좋았던 점도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의 암울한 시대상황의 영향도 컸다. 버려진 악보로 연습해 취입그래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다. 양희은이 불러 히트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민기는 이 노래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 때 여러 번 <아침이슬>에 애정이 없는 듯한 말을 자주 한 게 이를 뒷받침해준다.그러나 가수 양희은의 생각은 달랐다. 김민기가 노래를 만들었다며 불러주는 순간 ‘아주 좋은 곡’이라며 맘이 끌렸다. 작사 · 작곡가와 가수의 시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연습하면서 악보를 획~ 버리자 양희은은 이를 주워 자신의 노래로 소화시켜나갔다.‘꼭 녹음 해야겠다’고 작심한 양희은은 원작자(김민기)보다 먼저 <아침이슬>취입에 성공했다. 음반제작은 방송사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하면서 이뤄졌다. 빅 히트송 <아침이슬>이 있기까지엔 가시밭길을 걸어온 김민기의 지난날 삶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현재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부친이 6·25전쟁 때 북으로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는 바람에 유복자가 됐다. 경기중·고를 거쳐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대학 3학년 때인 1970년 <아침이슬>을 발표, 새내기 대중음악 작곡가로 명함을 내밀었다. 이듬해엔 독집음반을 내면서 가수로도 데뷔했다. 3선 개헌과 대통령선거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무렵이다.노래 못잖게 1971년 가을 그에겐 의미 있는 한 만남이 있었다. 저항시인 김지하와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김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문화적 체험을 한 그는 가톨릭문화운동, 국악대중화, 마당극운동 등을 펼치며 제도권으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취급받았다. 1971년 서울 신정동에서 야학을 시작했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도 뛰었다. 금관의 예수(1973년), 소리굿 아구(1974년) 공연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금지곡서 국민가요 ‘햇빛’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김민기 노래를 순수대중음악에서 현실비판적 의식가요로 재해석케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독집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환영회에 초대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레코드를 모두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방송금지에다 연행→조사→석방이 거듭되면서 ‘찍힌 인물’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택한 게 군 입대. 1974년 10월 카투사로 들어가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주한미군방송인 AFKN방송국. 사병근무지론 비교적 편안한 데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이슬> 노래 때문이었다.이듬해 전국이 유신헌법 찬반투표 거부운동으로 들끓었다. 대학가에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정치권 공방도 치열했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은 투표 당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종일 투표참가를 거부하는 집회와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행사 때 주요 음악레퍼토리는 김민기 의 노래. 그러나 이 사실이 당국에 들켜버렸다.그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김민기였다. 내복도 입지 않은 채 보름간 감방생활을 한 뒤 최전방으로 쫓겨났다. 이어 그해 6월 문공부가 발표한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에 따라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노래가 시의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김민기 노래가 운동권가요로 자주 불리면서 탄압은 더욱 거셌다. 그럴수록 운동권에선 더 불렀다. 탄압강도가 더해질수록 서정적 노래로 태어난 <아침이슬>이 의식 있는 가요로 의미를 갖춰갔다. 운동권학생들은 험난한 미래에 대한 고뇌의 결단을 할 때 <아침이슬>을 불렀다. 데모대 힘은 바로 <아침이슬>의 우렁찬 울림에서 솟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어느덧 김민기는 의식 있는 음악인으로 운동권투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김민기는 정작 자신이 ‘투사’로 불리는 것을 꺼린다. 어느 날 TV회견 때 “아무 의도 없이 만든 노래가 운동권에서 자주 불린다고 해서 기관으로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살아오면서 남들과 크게 싸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가수입문 때 만난 김민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1997년 김민기 헌정음반으로 <1997 아침이슬>을 내놨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김민기를 위한 것이었다. 김민기가 대중의 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진 사람은 바로 양희은이었다.음악인 김민기는 이제 한국적 뮤지컬창시자이자 연극·연출가, 기획자로 변신해있다. 해금 4년 만인 1991년 서울 대학로 뒤편에 극장(학전)을 만들어 지금껏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가 무대에 올린 뮤지컬작품은 독일 원작의 ‘지하철 1호선’. 연출, 편곡, 작사는 물론 배우도 직접 뽑고 모진 합숙훈련도 했다.  원작자 루트비히는 “원작보다 낫다”고 했고, 중국 대표작가 위화(餘華)는 “한류의 정수”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뉴시스, 시사저널, 일요서울(편집국장)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2 00:00

손가락 사이에 있던 담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더니만 담배가 다시 나타났다.이름 석자만 대면 금방 알만한 국내 유명 마술사라 해도 그의 뒤에는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국내 유명 마술사를 키워낸 정하성 회장(52).그에게 마술은 세상 그 자체다.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짠하고 나타는 게 마술이다. 그러고 보면 변화무쌍한 세상의 모든 것도 그러하다. “세상에서 만들어져 가는 모든 것이 마술입니다” 정회장의 마술관이다.그는 1987년 영국 출장길에서 처음 마술을 접해 1991년 미국에서 프로 과정을 거친 뒤 마술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그가 처음 마술을 시작할 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BBC방송의 한국에이전트로 일하면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주위의 반대도 많았다.그 무렵 한국사회에서 마술은 그저 광대 노름에 지나지 않았고 마술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 정 회장역시 처음 4년 동안은 취미로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그러나 ‘마술에서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서 1991년 프로과정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은결·최현우 등 제자 키워내 “1987년 영국 출장 때 처음 마술을 보고 반했어요. 흥미로웠죠. 그래서 출장기간 동안 마술을 배워서 친구들한테 보여 줬어요. 다들 신기해하더라고요. 그것이 마술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그는 한국마술의 대부이다. 그로부터 마술을 배운 사람만 어림잡아 700여명이 넘는다. 직종도 의사·국회의원·자영업자·보험설계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배웠다.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마술사들이 그에게 배웠다. 이은결, 최현우 마술사가 그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그는 마술을 시작한 뒤로 한국에서 마술을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술 학원을 운영하기도 하고 마술 카페를 차려 보기도 했다. 공연도 수차례 열었다. 그 결과 지금은 마술이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많은 마술사들이 설 수 있는 공연장 수도 늘어나고 마술카페도 생겨났다. 또 후배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세계마술대회에서 후배들이 우승할 수 있도록 돕는 큰 목표도 가졌다. 그의 목표대로 2006년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마술대회에서 그의 제자 이은결 마술사가 재너럴매직부문에서 우승했다. 그가 후배를 양성한지 10년 만에 이룬 성과다.“제가 처음 마술을 시작할 때 한국마술 시장은 시장 자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마술을 생활속의 문화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술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학원도 운영하고 마술카페도 차렸었습니다. 마술카페는 서울 역삼동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실패했어요. 우리나라 식사문화가 공연을 보면서 식사하는 문화가 아니었어요.그러나 지금은 전문공연장과 마술카페가 생길 정도로 많이 성장했습니다.”이제 마술은 문화예술장르를 넘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다.동아인재대학과 동부산대학이 마술을 정식학과로 개설하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정하성 회장이 발로 뛰며 노력한 결과이다. 이들 대학에 마술학과가 개설될 때 교과 과정 및 학생선발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그는 세계에서 한국 마술문화를 대표하는 귀빈으로 대접받는다. 그가 목표한대로 마술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것. 부상중인 중국 마술시장 ‘공략중’정 회장은 이제 한국에서 국제무대로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다.한국마술시장이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후배들이 자리 잡기엔 한국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에서다.그가 내다보는 대안은 중국시장이다. 중국은 2009년 세계마술대회를 베이징으로 유치해 마술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날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마술시장을 잡기 위해 1년의 반 이상을 중국에서 지낸다. 미리 터를 잡기 위해서다.후배들이 넓은 세상에서 활동했으면 하는게 그의 바람이다.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중국마술인들의 텃새가 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생의 관계로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오히려 한국의 연출기법과 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마술사들도 많다고 한다.우리나라의 마술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연출기법과 기술이 중국보다 크게 앞서 아시아를 대표하고 있다.세계마술대회는 3년마다 열리는 ‘마술사들의 올림픽’이다.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로 열리는 마술인들의 축제이다.정하성 회장은 1987년 마술을 시작해 유러피언 매직션(European magician) 마술수업과 91년 뉴욕 세계마술협회(New York I.M.S) 프로과정을 수료했다.1997년 세계마술협회(I.M.S) 한국 대표로 선임됐다. 지금은 한국프로마술인협회 회장으로 뛰고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2 00:00

 최백호 <내마음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연말연시에 부르는 ‘오빠 가수’ 노래  겨울의 문턱이다. 만추(晩秋) 끝자락의 붉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뚝 뚝 떨어지며 앙상한 속살을 드러낸다. 스치는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럴 때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쓸쓸해진다. 감성의 연륜은 고목의 나이테처럼 가는 세월 속에 결코 속일 수 없는 것. 차 잔을 들며 듣는 초겨울의 노래가 더욱 따뜻함으로 성큼 다가온다. 감상적 맛을 물씬 풍기는 가요,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을 한껏 느끼게 한다. 이 노래는 최백호(57)의 대표곡이랄 정도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최종혁 작곡으로 최백호가 작사하고 그가 직접 불렀다.애조 띤 멜로디와 뭔가를 말하려는 듯 한 노랫말이 마음을 잡아당긴다.   상당수 가요들이 그렇듯 한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지난날 무슨 사연들이 있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한다. 그 속엔 삶이 녹아있고 사랑과 이별, 기쁨과 아픔이 배여있다. 최백호가 부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영일만 친구> <낭만에 대하여> 등을 불러 널리 알려진 최백호는 1950년 4월 23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제2대 국회의원이었던 부친(최원봉)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부정(父情)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보냈다. 생활이 서서히 어려웠던 건 말할 것 없다. 부산 태생 … 아버지 일찍 여의어 부잣집 아들로 남부러울 게 없었던 최백호는 갑작스럽게 기우는 가세를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다. 정의감이 강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횡단보도에 어린이들이 지나가는데 이를 무시하고 달리는 승용차를 보고 끝까지 따라가 따끔하게 주의를 준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처럼 매사에 당당했던 최백호의 젊음에 또 한 차례 큰 아픔이 왔다. 부산 가야고등학교를 졸업, 한창 혈기왕성할 때인 20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과 방황의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둥지 잃은 여린 새끼 새처럼 삶의 날개를 열심히 퍼덕였지만 허사였다. 사회초년생인 최백호에겐 기댈 마음의 언덕이 필요했다. 그래서 벗 삼은 게 노래와 글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자유인으로 음악을 가까이 했다. 노래는 그에겐 곧 생활이 되어버렸다. 최백호의 노래와 화법, 글쓰기는 갈수록 깊이가 있었다. 취입한 노래 가사는 대부분 직접 쓴 것이고 가끔 작곡도 했다. 부르는 노래를 잘 새겨보면 그의 이력을 어렴풋이나마 살필 수 있다. 군 제대 후 부산시내 음악 살롱무대를 돌며 노래활동을 했던 최백호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인기를 모았던 가수 하수영에게 발탁, 1976년 가을 가수로 데뷔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31년 전 일이다. 그가 맨 처음 신고한 곡이 바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다. 이 노래는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말하는 듯 하지만 전혀 아니다. 저 세상으로 떠난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어린 나이 아버지를 잃고 늘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자 쓸쓸함 마음 어디 둘 곳이 없어 만든 노래다. 스무 살 가을 돌아간 어머니를 그리면서 뒷골목을 거닐다 쓴 눈물의 가사에 자신이 직접 부른 것이다. 일종의 사모곡(思母曲)인 셈이다. 모정 그리며 가사 직접 쓴 ‘데뷔곡’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지면 서러움이 더해요~’라고 한 첫 소절부터가 가슴이 아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계절이 가을이고, 무성한 나뭇잎들이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처럼 자신을 보호해줬던 어머니의 무수한 음덕이 낙엽처럼 사라지고 나면 서러움이 더해진다는 허전함을 노래한 것이다.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음반판매량이 늘면서 ‘신인 가수 최백호’ 알리기에 충분했다. 정감 있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깔리면서 노랫말에 은근한 감칠맛이 난다는 평이었다. 애수에 찬 이 노래는 음반이 석 달 만에 6천여 장 팔리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이듬해인 1977년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로 나가는 <입영전야>와 <그쟈>가 담긴 2집 음반까지 잇달아 히트하며 인기가수 대열에 끼었다.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도 꽤 알려졌다.이 후 인기탤런트였던 김자옥(지금은 가수 오승근씨 부인)과 결혼, 세간의 이목을 끌었으나 얼마 못 가서 갈라섰다. 이혼과 방황 등 곡절을 겪은 그는 1984년 재혼, 새 가정을 꾸며 안정을 되찾았다. 아내와 딸 하나를 두고 있다.이어 <영일만 친구> <고독>과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준 <낭만에 대하여>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도 발표했다. 통속적인 남녀 사랑타령에서 벗어나 인생을 관조하듯 깊이 있는 인생관을 펼쳐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새로 편곡해 다시 음반에 실은 <보고 싶은 얼굴> <열애> 등도 맛과 흐름은 같다.최백호는 2003년 데뷔 28주년을 맞아 신곡 <청사포>가 담긴 베스트앨범(제목=‘최백호 히스토리’)을 냈다. 2000년 <어느 여배우>를 내놓은 뒤 3년만이었다. 신곡 <청사포>는 그의 고향인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 아래의 아담한 포구이름으로 ‘푸른 모래의 작은 항구’란 뜻을 갖고 있다. 한 여인의 추억을 회상하는 포크와 트로트가 접목된 분위기 곡으로 먼저 취입한 <낭만에 대하여>와 꽤 닮았다. 세월의 허무함, 인생의 외로움, 덧없음을 그려낸 것이다. 첫사랑, 옛 친구, 군 생활과 관련된 추억의 노래를 주로 했던 최백호의 맛을 안겨준다.    국민고독가수로 불릴만한 국내 최대 낭만파 가수 최백호는 요즘 방송인으로서도 맹활약 해 인기를 모았다. 2006년 4월 24일부터 2007년 3월까지 매일 오후 6시부터 KBS 해피FM(106.1MHz) ‘최백호-김민희의 라디오챔피언‘ 프로그램 진행자로 전파를 탔다. 취미는 축구, 특기는 그림그리기. 가수, 작곡가, 작사가, 방송인, 화가 이외에도 1995년 3월부터 대중가요 노랫말 만들기 모임인 시락회 회원으로도 뛰고 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낙엽지면 서러움이 더 해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라 /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 비라도 우울히 내려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하얀 겨울에 떠나요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뉴시스, 시사저널, 일요서울(편집국장)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 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31 00:00

노사연 <만남>“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만추이다. 가을걷이와 겨울을 준비하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결실을 계절을 맞아 갖가지 만남들도 잦다. 야유회, 등산대회, 체육대회 등에서 삶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어우러진다. 그런 모임에선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로 나가는 노사연의 <만남>노래가 곧잘 불린다. 부르기 쉬고 노랫말 뜻이 깊어 여러 모임에서 자주 애창되는 대중가요다. 194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대중음악 50년 사 베스트 50곡 중 40위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만남>이 만들어진 건 1986년. 21년 전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발표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 이 노래와 함께 모임 때 자주 불리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다.작곡가는 ‘노래 문외한’ 막내 이모부 <만남> 작곡가는 최대석 씨. 노래를 부른 노사연의 막내 이모부다. 미국서 사업을 하는 최 씨는 노래엔 문외한으로 알려져 흥미롭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록의 이 노래 작사가는 박신. 노래는 노사연이 많은 사람들과의 적극적 만남을 통해 가수가 됐다는 것을 잘 아는 작사가·작곡가의 합작으로 태어났다. 마치 <만남> 가사처럼 말이다.1978년 단국대 성악과 2학년생 신분으로 MBC주최 제2회 대학가요제에 출전, <돌고 돌아가는 길>(김욱 작사·작곡 / 4분의 3박자, 왈츠 곡)로 금상을 받아 가수가 된 노사연은 <만남>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공부와 노래를 겸해야하는 학생가수신분인데다 이렇다 할 곡마저 내놓지 못해서였다. 특히 대학 신입생 시절 첫 미팅 때 자신의 뚱뚱한 몸매를 본 남학생들이 던진 모멸감의 말로 충격 받아 결행한 무리한 살빼기에서의 후유증도 한 요인이었다. (노사연은 태어났을 때 4.8kg로 우량아였다.)그런 가운데 노사연이 가요제 입상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어느 날 담당교수가 그를 불렀다. “성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던지 택하라!”는 경고를 내린 것이다. 1977년 1월 경희대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떨어져 2차인 단국대 성악과에 2등으로 합격, 학교를 다녔지만 클래식보다 가요 쪽을 택해 가수 길을 걷고 있었던 터라 그는 전과를 결심했다. 어릴 때 이모인 대중가수 현미를 동경, “노래를 해볼까”하고 대학가요제를 지원해 입상한 그로선 중대한 선택이었다. 국문학과로 옮긴 노사연은 1983년 발표한 <님 그림자>(김욱 작사, 작곡 / 4분의 4박자, 트로트곡)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창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았으나 인기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초대받은 행사장에서 다른 여자가수들에게 출연순서를 빼앗기는 등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다. 개그맨 저리가라 할 만큼 웃겨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래하면서 장기인 재치·개그·유머로 부족함을 메워갔다. 10년의 무명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만남> 취입과 방송출연이 그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던 어느 날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다. 음반이 나온 지 한참 뒤의 일로 거기서 첫사랑인 여고 체육선생님과의 만남 얘기, “노사연! 너를 쭉 지켜봤는데… (아! 두근두근, 쿵쿵) 너 혹시…. 투포환 안 해볼래?”로 뒤집어지는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 코미디언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관중들을 웃겼다. 그를 처음 보거나 잘 몰랐던 사람은 가수보다 개그맨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어려워하며 자꾸 존댓말을 쓰더니 급기야는 상석으로 앉히더라고 했다. 노사연의 꾸밈 없는 모습에 <만남> 노래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1992년 <만남>으로 가수왕에까지 올랐다. 노랫말 구절처럼 “우연”이 아니라 그것은 가수데뷔 10년만의 “바람”이었다.그는 1957년 3월 3일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노양환 씨(1987년 작고), 어머니 김화선 씨(평양출신으로 북한 원로무용가 최승희 제자) 사이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 근무지 이동에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자랐다. 화천초등·중학교를 거쳐 화천실업고 1학년을 다니다 춘천여고에 재입학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그는 요즘 남편(가수 이무송)과 가끔 무대에 선다. KBS-1TV 주말 밤 음악 프로그램인 ‘콘서트 7080’에 부부가 나와 열창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기독교 신자로 어린 아들과 함께 교회에 다닌다. 그 곳에서 가족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며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해 눈길을 끈다. 인기 연예인 가족에다 구김살 없는 노사연의 구수한 입담까지 곁들여져 신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올 한해도 결혼, 미팅, 입학, 입사 등 만남의 의례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들 삶은 어떻게 보면 노사연의 노래 <만남>처럼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경남도민일보, 뉴시스, 시사저널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 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