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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에 로스포의 <사랑해>국민애창곡으로 ‘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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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에 로스포의 <사랑해>국민애창곡으로 ‘38년’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08.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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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완연해지면서 만남과 나들이가 잦다. 이 때 빠지지 않는 게 음악과 여흥이다. 그 중에서도 노래는 중요한 매개체다. 특히 사랑을 소재 삼은 게 자주 불린다. 웬만한 대중가요 제목엔 ‘사랑’이란 단어가 많이 붙어있다.

노랫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빠지면 안 될 정도로 단골가사들이 이어진다.

가요 <사랑해>는 가사 처음부터 ‘사랑해’로 시작해 ‘사랑해’로 끝난다. 사랑의 종류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노래에선 연인과의 가슴 아픈 사연이 바탕에 깔려있다.

모임에서 부부나 애인끼리 노래를 부를 땐 이 노래가 으뜸 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슬로우록풍의 4분의 4박자로 부르기가 비교적 쉽고 내용도 다 함께 부르기가 좋은 까닭이다.

대중들 앞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뜻을 은근히 전하기 안성맞춤이라서 그럴까.


오경운 작사, 변혁 작곡…둘 다 ‘대학생’

오경운 작사, 변혁 작곡, 라나 에 로스포 노래의 <사랑해>가 본격 알려진 건 1971년부터다. 라나 에 로스포가 1970년 말에 취입, 이듬해부터 방송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반응은 대단했다.

우리 한민족 노래 <아리랑> 버금가는 국민애창곡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결혼식, 약혼식은 물론 송년회, 사은회, 동창회 등 각종 모임에 <사랑해>는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 건 그보다 앞선 1969년. 작사가·작곡가가 잘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학생들 모임에서 애창되고 있었다.

물론 노래를 취입한 가수도 그 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사랑해>가 처음엔 라나 에 로스포가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가요가 아니란 얘기다. 라나 에 로스포는 이탈리아말로 ‘개구리와 두꺼비’란 뜻의 남녀혼성듀엣 이름이다.

<사랑해>가 작사·작곡가 미상으로 대학가에서 불리자 통기타가수들도 노래가 좋다며 무대공연에서 자주 불렀다. 이때 은희와 라나 에 로스포를 결성한 한민이 서둘러 노래를 만든 사람 찾기에 나섰다.

전국을 수소문해서 찾은 작사가와 작곡가는 둘 다 대학생이었다. 작사는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오경운, 작곡은 서강대생이었던 변혁이 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어떤 연유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을까.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다. 작사가 오경운이 백혈병으로 숨져가는 자신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노랫말을 지었고, 이 사연을 전해들은 변혁이 군복무 중 여기에 곡을 붙인 노래다.

노랫말을 잘 새겨보면 병으로 가버린 애인과의 아픈 이별이 구구절절 묻어난다. 1절 가사 중간(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과 2절 가사 중간(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밤마다 그리는 보고 싶은 내 사랑아)이 그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그립고 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잘 드러나 있다.

대학가에서만 알려졌던 <사랑해>가 라나 에 로스포의 취입으로 음반이 돼 나오고 노래 사연이 알려지면서 전국 젊은이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루아침에 히트곡이 된 건 말할 것 없다.

같은 대학생 입장에서 슬픈 사연에 동감했고 아픈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라 남녀만남에서 인기곡 1순위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더욱이 트로트가수들의 노래에 익숙했던 그 때 젊은이들에게 슬로우 록 리듬인 <사랑해>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섰던 것도 히트요소가 됐다.

그 중에서도 남녀 사이의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사랑해>는 제3공화국의 규격화 되고 굳어있는 사회분위기를 잠시나마 잊게 해줘 인기를 얻었다는 평도 빼놓을 수 없다.

노래에 얽힌 또 다른 사연으론 1971년 최고 히트곡이 되기까지 방송관계자들의 도움이 컸다는 점이다. 그 때 TBC(동양방송) 가요프로그램PD였던 임광호씨와 여자학사가수로 인기를 얻었던 김상희 씨의 남편(MBC PD 유훈근) 등이 적극 밀어준 것이다.

다른 가요들도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방송전파를 타지 않으면 쉽게 히트하기 어려운 터라 방송가 사람들 지원은 <사랑해>가 히트곡이 되는데 큰 힘이 됐다.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서 대표 함께 불러

이와 함께 <사랑해>가 시대흐름을 잘 타 국민들의 눈길을 끌었다는 분석도 있다.

노래 취입 이듬해인 1972년 8월 30일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던 날 이 노래가 불린 것이다.

우리 측 이범석 수석대표와 북측 김태희 대표단장이 <사랑해>를 부르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돼 빅뉴스가 됐다. 이념과 체제가 배제된 가요인데다 남북이 사랑하는 애인처럼 헤어져선 안 된다는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어 양쪽 대표가 이 노래를 함께 부른 것.

남북대표가 손을 맞잡고 유행가를 합창한 건 남북분단 뒤 처음이자 마지막 있은 대사건으로 기록되는 감동적 장면이기도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라나 에 로스포는 청와대로 초청 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참 좋은 노래를 부른다. 어둡고 침침한 노래보다 온 국민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이런 노래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칭찬을 받아 한동안 화제가 됐다.

20대 나이에 시대를 초월한 불멸의 연가를 만든 두 주인공은 나이 60줄의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지낼까.

또 애인을 병으로 보낸 뒤의 일은 어떠했는지 후일담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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