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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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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08.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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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여자>는 1980년대 ‘조용필 시대’ 개막을 알렸던 대중가요다. 100만장 판매신화를 낳은 우리나라 가요 역사에서 불멸의 명곡이기도 하다. 드라마작가 배명숙 씨가 가사를 쓰고 조용필이 곡을 붙이고 취입까지 한 노래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풍으로 조금 느린 듯 한 멜로디에 조용필의 뛰어난 가창력이 어우러져 호소력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노래는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은 아주 단순하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인 1979년 어느 날이었다. 중견작가 배명숙 씨가 동아방송(DBS) 라디오드라마인 ‘창밖의 여자’ 대사를 쓰게 됐다. 그는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를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하던 중 문득 ‘가수 조용필’ 생각이 났다. 마침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조용필은 배 작가 제의를 반갑게 받아들여 주제가를 작곡하고 부르게 됐다.


드라마작가 배명숙과 인연

조용필이 배 작가와 인연이 된 건 3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디오드라마 ‘돌아오지 않는 강’의 주제가를 만들면서다. 배명숙 작사, 임택수 작곡으로 만들어진 주제가를 처음엔 포크가수 김세환에게 취입토록 했다. 그러나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미성과 곡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방송사 관계자가 조용필을 데리고 와 노래를 시켜봤다.    결과는 만족했다. 그래서 드라마 주제가는 조용필에게 돌아갔다. 그 때 사람들은 ‘조용필이 머잖아 대단한 가수로 클 것’이라 믿었다. 조용필은 그 때부터 노래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만들어진 <창밖의 여자>는 한동안 조용필이 대마초사건으로 교도소에 있으면서 연인을 소재로 쓴 곡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건 헛소문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라디오드라마 ‘창밖의 여자’ 주제가일 뿐이다. 풍문이 계속 나돌자 조용필은 노래사연을 직접 설명했다.

“라디오드라마 주제곡일 뿐입니다. 곡은 내가 썼지만 가사는 드라마에 맞춘 겁니다. 작사가 배명숙 씨가 써준 것을 그대로 읽은 거죠. 제 실제상황과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배명숙 씨가 전화로 불러준 노랫말을 듣고 1979년 말 곡을 붙였다고 했다. 그 때 조용필은 오랜만에 방송에 나가는 것인 만큼 곡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노래를 만들기까진 채 10분도 안 걸렸다. 빨리 만든 곡이 더욱 대중성 있고 좋은 경우가 많다는 가요계 속설이 먹혀든 것이다. 1980년대를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노래로 ‘조용필 음악’의 시작이라고 봐도 지나침이 없다.


‘조용필 시대’ 연 드라마주제가

<창밖의 여자>는 대히트했다. 드라마가 나갈 때마다 프로그램 앞뒤로 노래가 전파를 타면서 큰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 바람에 한 달로 잡혔던 드라마방송 기간이 두 달로 늘어났다. 노래는 라디오방송차트에서 19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음반은 1980년 3월 10일 지구레코드( http://www. choyongpil.net)가 만들어 팔았다. 1980년 봄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던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의 가요인생을 확 바꿔 놨다. 대마초사건으로 가요계에서 사라질 뻔 했던 그를 부활시키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이 노래가 없었다면 ‘오빠부대’ ‘절대 가왕’ ‘국민가수’란 타이틀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가 전파와 길거리 스피커를 수 놓던 때가 ‘1980년 봄’이란 시점을 떠올리면 더욱 가슴이 시린다. 정치규제에 묶여있던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 등장하고 시위대학생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5·18광주사태 등 격동의 정치계절에 <창밖의 여자>를 비롯해 <단발머리> <한오백년> <대전블루스> <슬픈 미소> 등 조용필의 노래가 줄줄이 애창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창밖의 여자>는 대중들에게 굉음이 가슴을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안겼다. 기존의 정형화된 틀을 가진 애상조의 가요였지만 편곡과 연주는 이전 음악들과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평생 사슬이 될 뻔했던 대마초사건에 따른 활동정지 기간에 그는 판소리창법을 배워 우리 고유의 소리를 체득하는 고난의 과정을 거쳤다. 이를 통해 얻은 깊고 거대한 울림으로 그의 노래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로 바뀌어 나타났다.   <창밖의 여자> 마지막 대목인 ‘차라리 / 차라리 / 그대의 흰 손으로 / 나를 잠들게 하라’에서 절절하게, 그리고 후려갈기며 포효하는 소리는 가슴이 뚫리는 쾌감을 안겨준다.   특히 노래가 시작되기 전의 신디사이저 연주는 독특한 분위기다. 게다가 조용필의 목소리는 듣는 이를 압도한다. 소름끼치는 목소리는 노래탄생 때의 암울했던 군사정권 상황과 맞물리면서 더욱 빛이 났다. 참담했던 시절 대중들은 그 한을 조용필의 목소리로 달랬다.


조용필 ‘가수인생’ 40년 맞아

올해 58세인 가왕(歌王) 조용필은 가수인생 40년을 맞았다. 주변에선 ‘40’이란 숫자에 입이 딱 벌어지지만 정작 조용필 자신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몇 주년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걸 생각하고 의식하면 너무 조이는 느낌이 들어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냥 무대만 생각할 뿐이다.”

그는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을 시작으로 이어진 40주년기념 대형 야외공연을 가졌다. 조용필의 40주년 프로젝트로 ‘대중문화예술인을 위한 연구소(YPC종합예술연구소)’ 세우기를 추진 중이다.

경기도 화성시 주관으로 이뤄지는 연구소는 400평 규모로 방음장치, 녹음실, 조명실, 컴퓨터영상시설 등이 들어선다. 1987년부터 연말가요대상 수상을 거부하고 1993년부터 방송활동을 중단한 채 공연에만 매달려온 그의 꿈이 40주년을 맞아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조용필은 1968년 애트킨스밴드를 결성해 미8군 밤무대로 데뷔, <킬리만자로의 표범> <고추잠자리> <허공> 등의 수많은 노래로 우리 가요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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