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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경제사] 러시아를 러시아답게 만든 스트로가노프 家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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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경제사] 러시아를 러시아답게 만든 스트로가노프 家門
  • 이강희 칼럼리스트
  • 승인 2023.11.2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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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몰락 단초 만드는 등 500여 년간 세계사 주요 부분 막후영향력

차르란 호칭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이반 4세를 우리는 과거 이반 뇌제(雷帝, 일본식)’라고 불렀고 최초의 차르(또는 짜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통치기간 동안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많은 이를 숙청했던 것으로 알려진 차르 이반 4세는 당시 러시아인들에게는 권력의 무게만큼이나 굉장히 무서운 존재였다. 그가 차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예상되지 않나(?) 싶다.

이반 4세가 즉위했을 때 오늘날로 따지면 정치후원금을 그에게 냈던 가문이 있다. 러시아가 제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근원을 따질 때 자주 언급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으로 러시아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문의 기원, 3가지 설()

그 가문의 이름은 스트로가노프(: Cтроганов, :stroganoff)’. 가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다만 △루스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브고로드에서 시작된 가문이라 설() △로스토프에서 기원했다는 설 △모스크바가 가문의 시작이라는 등의 설이 있다.

스트로가노프가문의 영광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스피리돈(: Спиридон, :Spiridon)이다. 14세기 후반 무렵에 그가 아르한겔스크로 이어지는 드비나(Dvina, : Двина́)강 유역에 터를 잡으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후손인 세르게이(13)백작이 1923년에 숨지면서 스트로가노프가문의 기나긴 역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오랜 시간 러시아가 러시아다워지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러시아가 유럽의 변방이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시점마다 주어졌던 역할은 유럽사에서 막중했다. 작게는 발트연안의 한자동맹과 연계된 활동을 하였고 북유럽국가와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가 유럽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다. 특히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오스만, 잉글랜드, 프랑스가 힘을 합쳐 러시아를 상대해야 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과 볼셰비키 혁명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 동안 러시아가 등장하는 세계사의 주요 부분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트로가노프가문은 차르의 권력을 등에 업고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서 부()를 쌓는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부는 러시아영토 확장과 함께 계속됐다.

알렉산드로 스트로가노프 백작(1733-1811) 초상화 (출처, 네이버 블로그 - 하늘 독수리 날다)
알렉산드로 스트로가노프 백작(1733-1811) 초상화 (출처, 네이버 블로그 - 하늘 독수리 날다)

 

우랄산맥 일대에서 얻은 철로 무기 생산

우랄산맥 일대에서 얻은 철로 무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북유럽국가와 전쟁을 치르는데 관여해 공을 세운다. 스트로가노프가문 출신 인사가 세우는 공만큼 그들이 누리는 경제적 권한은 커져갔다. 그들은 사고파는 단순한 무역을 넘어 소금, 모피, 제련 같은 생산활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솔료노예호수(Солёное озеро)에 염전을 시작으로 소금사업에 뛰어들었다. 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모스크바는 물론 시베리아까지 진출하게 된다. 소금을 팔 수 있는 지역이 중부러시아까지 확대된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곳도 넓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피와 생선을 사고파는 일에도 관여하게 된다. 넓어지는 영토만큼 모피를 살 수 있는 지역도 늘었고 그들의 부도 계속 불어났다. 특히 지배층만 향유했던 포도주를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어 그들과 지배층과의 관계는 밀접했다. 17세기까지 나라에서 전매했던 구리와 철 같은 금속을 다루는 일에도 뛰어든다. 18세기에 세운 구리제련공장(1726년 오룔 고로도크 근방)을 시작으로 빌림바이(Билимбай, 1734년 우랄 서쪽)와 유고 캄스키(Юго-Камский, 1748년 페름 동남쪽)에 제철공장을 세워 금속제련사업에 뛰어든다.

이때 공장을 세우고 운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공장을 세웠다. 이 중에서 좋은 가격을 제안 받거나 직접 운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팔거나 임대하기도 했다.

 

러시아문화 만드는 데 앞장

스트로가노프가문은 부를 통해 러시아문화를 만드는 데에도 앞장섰다. 1750년대에는 자택에 도서관을 지어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도서를 사들이는데 많은 재력을 사용했다. 자신의 가문과 친한 주변지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했다. 덕분에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당시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잉글랜드, 프랑스, 도이칠란트의 여러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런 활동들 덕분인지 러시아에선 스트로가노프가문에게 몇 가지 특권을 줬다. 스트로가노프가문 사람들이 잘못을 했을 땐 러시아 차르가 주관하는 법정에만 설 수 있었고 면세권이란 특권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스트로가노프가 차지하는 영향력의 정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에도 정교회를 위한 수도원과 성당을 짓는 등 재정적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전쟁과 영토 확장과정에서 재정이 빈약했던 러시아의 차르를 대신해 각종 비용과 사병을 동원, 공을 세우면서 넓은 영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스트로가노프가문의 재정적 활동은 러시아성장을 위해 이바지한 부분이 되었고, 이는 다시 스트로가노프가문에게 이권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막대한 이익이 소수에게 쏠린다는 점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정경유착의 표본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던 부일배(附日輩)나 오늘날의 재벌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나라가 있어야 자신들 존재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스트로가노프가문의 모습을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름 부자라고 자신하는 분들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림으로 배우는 경제사

저자_이강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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