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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떠난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 ‘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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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떠난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 ‘가고파’
  • 왕성상 대기자
  • 승인 2023.06.30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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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마산태생 이은상 작시(作詩), 북한출신 김동진 학생 때 작곡
‘내가 좋아하는 가곡’ 1위…마산역 앞 등 창원시내 5곳에 노래비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져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찾아가자 찾아가 가고파라 가고파

 

 한 시대 대변하는 민족의 노래

국민애창가곡 가고파’(김동진 작곡, 이은상 작시)는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 경남 마산 앞바다를 배경지로 태어난 노래지만 출향인들 마음을 잘 말해주는 곡이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과 함께 한 시대를 대변하는 민족의 노래로도 꼽힌다. 노래를 듣거나 부르다보면 티 없이 뛰놀던 옛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차를 타고 마산역에 내리면 가고파가락이 잔잔하게 흐른다. 학창시절 배웠던 노래에 대한 추억과 가사에 취해 마산이란 정서가 가슴에 와 닿는다.

창원시내 마산산호공원 마산 자산동 통일공원 마산 석전동 무공수훈자기념비 자리 마산역 앞 돝섬(돼지섬)가고파노래비가 있다. 한 도시에 같은 노래비가 5개 있는 사례는 드물다. 그만큼 노래가 유명하다는 얘기다. ‘마산하면 가고파’, ‘가고파하면 마산으로 통한다. 해마다 51일 마산항 개항기념일엔 마산 가고파 큰 잔치가 열린다. 마산 노산동에 가고파 거리도 있다. 마산은 2010년 진해와 함께 창원시로 합쳐졌지만 올해로 개항 124년의 유서 깊은 항구도시다. ‘315의거’,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 19791016~20일 부산마산지역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시위사건) 등 우리나라 민주화 텃밭이자 물, 공기가 맑은 고장이기도 하다. 몽고간장, 무학소수, 폐결핵치료전문의료기관인 국립마산병원 등이 있다.

 

10절까지 통절형식(通節形式) 가곡

가고파10절까지의 통절형식(通節形式) 가곡이다. 4분의 3박자(사장조) 보통 빠르기로 부른다전주와 간주를 빼면 62마디다. 곡 중간에서 속도가 빠르게 바뀌며 4분의 4박자로 나가다 끄트머리대목에서 보통 빠르기 4분의 3박자로 바뀐다.

노래에 나오는 바다는 이은상이 나고 자란 마산 앞 합포만(현재 마산만)을 가리킨다. 진해만과 이어진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마창대교(길이 1.7), 국내 최초 해상유원지 돝섬랜드가 있다. 마산항, 마산자유무역지역, 국립마산병원, 마산어시장과 닿아있다. 마산로봇랜드, 해양드라마세트장, 저도연륙교(일명 콰이강의 다리), 진해해상공원 쏠라타워, 쌈지공원, 제비산전망대, 창원의집, 로망스다리, 창원단감테마공원, 주남저수지 등이 볼거리다. 아귀찜, 아귀포, 벚꽃빵, 진해콩, 주남오리빵, 미더덕찜, 미더덕비빔밥 등 향토먹거리도 많다.

가고파노랫말은 이은상이 29살 때인 1932년 초에 쓴 시조다. 이화여전 교수로 있을 때다. 모두 10수로 그해 15일 서울서 탈고(脫稿),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처음 알려졌다.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란 부제가 달렸다.

작곡자는 북한출신음악인 김동진. 1933년 평양 숭실전문대 문과 2학년생이었다. 19살 때다. 그는 현대시조를 가르치던 양주동 선생으로부터 시를 배우면서 악상이 떠올라 단숨에 4(1~4)까지 작곡했다. 양 선생이 일본 도쿄 유학시절 함께 지낸 벗 이은상의 가고파시조를 소개하자 김동진의 마음에 울림이 온 것이다. 그는 현제명 독창회때 자작곡 가고파를 듣고 나는 저보다 더 나은 곡을 작곡하리라결심해 작곡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악상은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대목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1973년 그는 나머지 6장의 작곡을 끝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전편 네 수이다. 후편은 전편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경쾌하면서도 무게 있는 곡으로 평가된다. 20대 때 작품을 60대에 마무리한 김동진은 최고의 가곡작품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1974년 경남대학교 마산 완월강당에서 가고파 노래 전·후편 공연때 지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고파는 평양 신암교회와 신정교회에서 불리다 테너 이인범에 의해 널리 알려져 인기가곡이 됐다. 어릴 적 고향을 떠올리는 마음, 마지막 부분의 남성적 중후함이 국민애창곡이 된 것이다. 1984MBC가 조사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가곡’ 1위에 뽑혔다. 199912월 월간조선이 작곡가·성악가 1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가고파는 우리나라 최고가곡으로, 김동진은 최고작곡가로 선정됐다. 우리 민족의 대표정서인 향수를 시와 곡의 조화 속에 어떤 노래보다도 잘 나타냈다는 호평이었다. 노래가 유명해지자 같은 제목의 영화 2편이 1967, 1984년 개봉됐다.

 

이은상, 시조시인이자 사학자·언론인

이처럼 유명한 가고파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노랫말을 쓴 이은상이 친일파이자 비민주적 사람이란 것. 마산시민들은 마산이 4·19혁명의 단초가 된 3·15의거와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부마민주항쟁 숨결이 서린 곳으로 그를 친일친독재인물이라며 비난했다. 마산역 앞 가고파노래비에 페인트를 뿌리고 이은상 비난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반론도 없지 않았다. “마산과 조국을 사랑한 이은상 선생은 3·15의거를 폄하하지 않았다”, “마산이 낳은 문인등 옹호의 목소리가 높았다.

마산역  가고파 노산 이은상시비
마산역광장 노산 이은상 '가고파'노래비 제막식 (2013.2.6) 

시조시인이자 사학자인 이은상은 19031022일 마산서 태어나 1982918일 세상을 떠나 국립서울현충원(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는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 1923년 그만뒀다. 창신학교 교원으로 있던 중 1925년 일본 와세다대 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45년 호남신문사 사장, 1950년 이후 청구대(현재 영남대서울대 교수로 몸담았다.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지냈다.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재단이사장,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국정자문위원도 맡았다.

 

목사아들 김동진, ‘한국의 슈베르트

작곡가 김동진은 1913322일 평남 안주에서 목사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찬송가 등으로 서양음악을 접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해선 바이올린과 피아노, 작곡교육을 받았다. 1936년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한 뒤 귀국, 1939년 만주 신경교향악단원으로 일했다. 광복이 되자 중앙교향악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평양예술문화협회에서도 주도적으로 일하다 월남했다. 6·25전쟁 땐 육군종군작가단원으로 수십 곡의 군가를 작곡했다. 1963~1978년 경희대 음대 교수, 음대학장을 지냈다. 한국인의 심성을 아름답게 보듬어준 그는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렸다. ‘봄이 오면’, ‘목련화100편 넘는 가곡을 작곡했다. 군가, 동요 등을 합치면 500편 이상 된다. 그는 노년에도 음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84세이던 1997년 오페라 춘향전을 발표, 화제가 됐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 등 친일행적 논란으로 가슴 아파했다. 그는 2009731일 노환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6.

 

필자 왕성상은?

마산중·,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등록(865), ‘이별 없는 마산항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노래강의와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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