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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페르시아제국의 번영을 만든 단 하나의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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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페르시아제국의 번영을 만든 단 하나의 요소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23.04.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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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1세가 정립시킨 왕의 길과 역참
국가통합과 부를 쌓는 인프라 효과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오늘날 교통은 단순히 다닐 수 있는 길의 의미를 넘어섰다.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만큼 시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해 도로의 차량을 넘어 기존의 철도와는 다른 고속철도가 만들어졌다. 또 인간은 지리적인 제약과 거리를 이겨내기 위해 항공기라는 수단까지 만들어냈고 글로벌 이동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교통수단이 발전한 이유는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이려고 노력한 결과다.

이런 노력은 19세기부터 시작된 철의 생산과 함께 기술의 발전이 비슷한 시기에 시너지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빠른 교통수단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예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에 따르면 이런 노력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고대 중동의 페르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다리우스 1세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페르시아는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제도와 율령이 바로 서야 했고 조세를 잘 걷어야 했다. 문제는 인구 밀도가 높지 않던 당시에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가 이런 통치 행위를 하면서 유지한다는 게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제약을 넘어 제국을 다스려야 했던 다리우스 1세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혁신적인 교통 제도를 만들었다. 바로 역참이다.

BC 559년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이 된 키루스 2세는 9년이 지나 메디아 왕국을 정복한다. 이후 주변의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엘람까지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드넓은 영토를 가진 ‘ 페르시아'  라는 대제국의 시작을 알렸다. 여러 나라가 합쳐진 제국은 합쳐진 나라의 수만큼이나 많은 갈등 요인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각기 다른 종교와 풍습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이런 통합에 따른 갈등문제는 이미 신바빌로니아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었다.

정복지에 대한 차별과 토속종교를 탄압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던 신바빌로니아의 정책은 정복지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그로 인해 항상 갈등 관계로 인한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거기에 빈부 격차까지 심해지면서 비옥한 토지를 가졌던 신바빌로니아였지만 국력을 키우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키루스 2세는 처음부터 갈등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정복지의 토속종교와 지역의 풍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도록 했다. 또 군대를 단속하여 정복지에 대해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면서 현지 백성들의 불안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자 다양한 민족 간의 이질감도 도드라지지 않아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어 제국의 역량을 한곳으로 모으는 게 더 쉬웠다.

페르시아 제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모범적인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다스리며 안정을 다졌지만 그가 죽자 혼란에 빠진다. 이때 귀족 중 한 명이 나타나 페르시아 지배층의 혼란을 잠재운다. 그리고 왕이 되어 페르시아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 페르시아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페르시아 역사에서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다리우스 1(BC 550~BC 486)가 등장한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페르시아 곳곳에서 발생했던 혼란들이 하나씩 진압되었고 기세를 몰아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지략가이기도 했던 다리우스 1세는 군대를 운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오늘날 이란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서양과 동양의 경계로 불리는 헬레스폰토스(오늘날 다르다넬스라 불림)해협에서 동쪽으로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와 로마보다 앞서 대제국을 이룬다. 다리우스 1세는 치세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서양사에서 중요한 전쟁으로 기록되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페르시아가 대결했던 두 번의 전쟁은 이후에 펼쳐지는 페르시아의 전성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리우스 1세는 통치에 시스템을 결합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요 지역에 거점도시를 세우고 이들 간의 교류가 잘 이루어지도록 광역도로망으로 연결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광역도로망을 ‘ 왕의 길’ 이라고 불렀다. 광역도로망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역할을 잘 유지되도록 하려고 중간에 역참을 설치하여 효율성을 높였다. 광역도로망을 따라 설치된 100여 개에 달하던 역참에는 갈아탈 수 있는 말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또 말과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역참이 만들어진 이후 중요한 공문이나 급한 소식과 우편은 왕의 길을 통해 지방과 중앙을 오가게 된다. 이런 시스템을 갖춘 덕분에 지방의 소식은 빠르게 중앙에 전달되었고, 다리우스 1세의 의사결정이나 중앙에서 결정된 주요 정책은 왕의 길과 역참을 거쳐 페르시아 제국내 구석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멀리 있어 통제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반란을 시도하려는 지방의 관리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를 확인하는 일을 하던 중앙의 관리들도 왕의 길과 역참을 통해 오가며 페르시아 제국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런 시스템은 후대에도 이어져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여러 이슬람 제국이 유지되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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