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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용병과 해상무역에 가장 뛰어났던 제노바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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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용병과 해상무역에 가장 뛰어났던 제노바 공화국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2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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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 / 이강희 칼럼니스트] 반도적인 특성 때문에 지형적인 특성을 말할 때 우리나라와 함께 거론되는 유럽 국가가 있다. 고대 로마의 유산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한 나라 이탈리아다. 반도의 지형을 가진 국가답게 3면이 바다라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발칸반도국가들과 인접한 동해인 아드리아해와 나폴리가 있는 이오니아해 그리고 서해인 티레니아해가 있다.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공국으로 갈라져 저마다의 세력을 확장하여 성장하다 보니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경쟁도 치열했다. 아드리아에서 왕성한 무역 활동을 하던 대표적인 곳이 베네치아였다면 티레니아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곳은 제노바(Genova)였다. 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곳이 베네치아라면 제노바의 상인들은 그 이전부터 지중해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두 세력은 지중해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하였다. 

  제노바가 유명했던 것은 해상무역 이전에 용병 때문이었다. 강한 지역색으로 인해 통일되지 못했던 이탈리아는 도시 국가형태로 성장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의 용병들보다도 제노바의 용병은 쇠뇌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쓰임새가 남달랐다. 인접국인 프랑스 편에서 싸웠던 제노바의 용병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위해 많은 활약을 한다. 몸을 가릴 수 있는 큰 방패인 ‘파비스’에 숨어 오늘날의 석궁과 비슷하게 생긴 쇠뇌라는 기계식 활을 사용했던 제노바의 쇠뇌병의 활약은 전투에서 두드러졌다. 이런 쇠뇌병의 활약은 잉글랜드의 장궁수의 등장으로 잠시 흔들리지만 전술의 변화로 이를 극복하며 쇠뇌병의 장점을 끌어올린 활약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화약이 사용되기까지 제노바의 쇠뇌병은 유럽에서 강력한 용병이었고 제노바가 부를 이루는 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지중해는 드넓은 대양에 비하면 거대한 항만이었다. 그렇기에 파고가 높은 대양에 비해 지중해는 잔잔했다. 항해술이 발달하여 대양으로 나가기 전까지 지중해는 여러 지역의 물자가 거래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항해시대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경제활동과 대외 활동이 이뤄지다 보니 지중해를 장악하는 것이 곧 당시 유럽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중해의 패권을 가진다는 것은 당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이었기에 여러 세력은 지중해의 패권을 가지기 위해 자주 다퉜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었던 파티마왕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지중해에서 힘 자랑을 했던 제노바는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튀니지의 지배자 술탄마저 차례로 제압하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다.

 제노바가 누리던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도 동시에 균열을 내게 된 사건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동로마(이하 비잔틴)의 황제는 로마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서열상 동로마 황제의 신하였던 교황은 비잔틴을 도와주면서 자신의 지위를 격상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이런 역학적인 이해구조 속에서 교황은 겉으로 가톨릭에 대한 이슬람의 종교적인 탄압과 비잔틴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십자군 원정을 결정하며 많은 왕족과 귀족 기사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이에 따라 1차 십자군 원정은 순수한 목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이후 십자군은 1차 원정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귀환하며 귀환했고 그들의 영웅담은 물론 그들이 가지고 온 전리품은 온 유럽에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유발했다. 더군다나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은 자신들이 가져온 전리품이 비싸게 거래되면서 돈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런 소문은 십자군 원정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소문까지 만들어내며 제2차 십자군 원정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원정이 이후에도 계속 준비되면서 동방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해운업이 성장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이윤을 남기는 베네치아의 성장은 제노바의 쇠퇴로 이어진다. 이런 환경은 두 세력 간의 갈등 관계로 이어지고 결국 이런 갈등 관계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25년간 있었던 네 차례에 걸친 전쟁(성 사바스 전쟁 (1256 ~ 1270년), 쿠르촐라 전쟁 (1294 ~ 1299년), 해협 전쟁 (1350 ~ 1355년), 키오자 전쟁 (1377 ~ 1381년))에서 벌어졌던 수 차례의 전투는 많은 희생을 낳았다. 강력했던 두 해상세력의 격돌은 많은 소모를 불러왔고 더 이상의 소모를 없애기 위해 승자 없는 전쟁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대외적으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제노바 독자적으로 활약하기가 어려웠다. 경쟁을 통해 아웅다웅하던 베네치아와 같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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