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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유럽의 균형 추 역할을 하던 부르고뉴의 부(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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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유럽의 균형 추 역할을 하던 부르고뉴의 부(富)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2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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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산미(酸味)가 매력적인 벨기에 맥주가 있다. 맥주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맛봤을 ‘듀체스드 부르고뉴(Duchesse de Bourgogne)’다. 포도주를 발효시킨 발사믹 식초의 느낌을 주는 맥주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 맛 못지않게 유명세를 얻는 이유는 바로 병의 라벨에서 찾을 수 있다.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공작(Duck, Duka...)의 직위를 상징하는 여성형(Duchesse)호칭이다.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프랑스 부르고뉴가 아니라 지금의 벨기에도 한때는 부르고뉴공국의 영토였을 정도로 부르고뉴 공국은 왕국에 가까운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 벨기에에서 그녀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만들어진 맥주(Beer)라고 볼 수 있다. 

 부르고뉴는 비록 공작이 다스리는 공국이었지만 당시의 종주국이었던 프랑스를 능가하는 부(富)를 쥐고 있던 나라였다. 부르고뉴(Bourgogne)는 모두가 탐내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물질적인 풍요는 거래를 불러왔고 재화의 거래를 통해 발생한 상업의 발달은 부르고뉴의 가치를 유럽에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부르고뉴가 성장하고 부유해지면서 그들이 가진 부(富)는 프랑스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 프랑스 왕실의 눈엣가시이기도 했다. 

 이 부르고뉴를 이끌던 용담공 샤를 1세는 부국강병을 통해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 못지않은 나라를 만들 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르고뉴 전쟁에서 스위스와의 전투 중 참혹하게 살해(1477.1)되며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빈자의 죽음은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지만 부자의 죽음은 주변의 승냥이들이 몰려드는 계기를 만든다. 

 여성의 지위가 없던 시절 샤를 1세는 무남독녀 외동딸 하나를 두고 사망한다. 그녀가 바로 훗날 부르고뉴의 공작으로 불리는 마리(Marie de Bourgogne 1457년 2월 13일 ~ 1482년 3월 27일)다. 그녀는 발루아 가문의 샤를 1세와 부르봉 가문의 이자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를 1세의 사망으로 마리는 풍요로운 부르고뉴를 상속받게 된다. 그러나 풍요로움이 지킬 수 있는 자에게는 축복이었지만 지킬 수 없는 자에게는 혼란을 가져다주는 저주가 될 수도 있었다. 같은 발루아 가문이었지만 왕의 동생으로 시작된 왕자령이 부르고뉴의 시작이었다. 프랑스 왕실은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영토를 회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부르고뉴에 대해 욕심을 드러냈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자신의 아들(훗날 샤를 8세)과 마리와 결혼을 추진했다. 마리의 거절로 결혼이 무산되자 프랑스와 부르고뉴의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된다. 프랑스 조종을 받는 세력의 반란으로 마리는 감금까지 당하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마리와 루이 11세의 아들의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이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마리는 심복을 보내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자신과 부르고뉴를 보호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한다. 군대를 이끌고 부르고뉴에 도착한 막시밀리안은 마리를 구출하고 1477년 8월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의 상속지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의 통치가 안정되자 부르고뉴 영토였던 네덜란드지역의 삼부회의 지지를 받았다. 루이 11세는 부르고뉴를 되찾으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보내지만 1479년 8월에 있었던 ‘긴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이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면서 안정을 찾게 된다. 마리는 부유함을 상징하는 ‘la Riche’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만큼 부르고뉴가 가졌던 풍요로움은 유럽 여러 가문이 부러워하면서도 가지고 싶어 하는 대상이었다. 

 막시밀리안의 보호 아래 20세의 어린 나이로 부르고뉴를 통치하던 그녀는 1남 1녀의 자식을 낳아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482년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낙마사고를 당한 마리가 사망하면서 부르고뉴에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프랑스와 영토분쟁이 또다시 찾아오자 양측은 ‘아라스 조약’으로 분쟁을 마무리 짓는다. 루이 11세는 마리의 딸 마르가레테(Margarete d'Austria)와 샤를을 약혼 시켰다. 1483년 3살 때 프랑스 궁궐로 간 보내졌지만 샤를 8세가 1491년에 부르타뉴의 안과 결혼하면서 파혼되었다. 아들인 펠리페 1세는 아버지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야 했지만 막시밀리안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아들인 카를5세와 페르디난트 1세가 차례로 황제에 오른다.

결국 부르고뉴의 마리로부터 시작된 합스부르크가문의 후계 구도는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에스파냐에까지 영향을 주어 유럽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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