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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흔든 엘레오노르의 부(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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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흔든 엘레오노르의 부(富)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23.02.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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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서 근대는 물론 세계 제1차 대전 직전까지 경쟁을 하던 유럽의 대표적인 두 나라를 꼽으라면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있다. 유럽에서 벌였던 백년전쟁에서부터 나폴레옹시대를 거쳐 아프리카에서 벌어졌던 파쇼다사건까지 단순한 힘겨루기나 경쟁을 넘어 두 나라의 관계는 앙숙이었다. 중세시대 이런 두 나라의 왕과 결혼생활을 하며 유럽의 무게중심 추(錘) 역할을 하던 여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레오노르(잉: Eleanor, 프: Éléonore, 라: Alienora)다.

 아키텐(잉: Aquitaine, 프: d'Aquitaine, 다키텐이라고도 불림)의 상속녀이자 한때는 프랑스 왕 루이 7세(Louis VII)의 왕비(1137년~1152년 3월 11일)였지만 결혼을 무효화한지 8주 만에 노르망디공작이면서 앙주백작이었던 헨리와 결혼(1152년 5월 18일~1189년)하게 된다. 헨리는 외할아버지인 헨리 1세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1153년 1월부터 잉글랜드를 침공하게 되는데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스티븐이 사망하면서 1154년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단순한 왕위 교체를 넘어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Henry II, 프: 앙리 2세, 이하 헨리 2세)가 역사에 등장함과 동시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 프: 플랑타주네)왕가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결혼무효로 프랑스 왕비자리를 버렸던 엘레오노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배우자의 정치적 행동으로 인해 잉글랜드 왕비에 오르는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역사적으로도 흔치않은 사례를 남기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새로운 결혼은 사망한 이후에도 한동안 프랑스에는 비수가 되었고 잉글랜드에는 축복을 내리는 결과가 가져오면서 역사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엘레오노르는 갑부인 아버지(아키텐의 공작 기욤 10세)의 딸로 태어난다. 10촌 관계였던 루이 7세와의 결혼에서는 두 딸(마리, 알릭스)을 낳았고 10살 정도 어렸던 8촌 관계의 헨리 2세와의 결혼에서는 두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죽은 첫째 윌리엄(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부터 청년 왕으로 불리는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 제프리 2세, 마틸다, 엘레오노르, 조안 등 5남 3녀를 낳는다. 엘레오노르는 아버지로부터 아키텐·가스코뉴의 공작 작위와 푸아티에의 백작 작위를 이어받은 상속녀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단순히 가진 게 많은 걸 떠나 그녀가 지키기에 과도했다. 그래서 이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보호 장치가 필요했다. 

 엘레오노르의 아버지는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자신의 딸과 자신이 이뤄놓은 영지를 지켜줄 강력한 보호 장치를 찾게 되는데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다. 둘은 오랜 시간 결혼을 유지했지만 엘레노오르는 교황에게 불행한 결혼을 끝내달라고 당당히 요구하여 근친혼을 이유로 15년 만에 이혼이 아닌 결혼무효를 이끌어냈다. 두 달여(약 8주)가 지나 새로운 결혼을 하며 또 다른 굴레가 만들어지지만 이마저도 여성의 지위가 약했던 중세시대를 살았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물론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결정이었다. 엘레오노르의 새 남편은 앞서 언급한대로 잉글랜드의 헨리 2세다. 

 잉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내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아키텐·가스코뉴와 푸아티에의 영지를 가진 엘레오노르는 단순한 배우자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프랑스의 영지였지만 잉글랜드가 소유하다보니 실질적인 주인 역할은 잉글랜드가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정작 왕국의 땅이었음에도 실질적인 혜택을 볼 수 없었고 이들이 하는 통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키텐은 오늘날 부르고뉴와 함께 프랑스산 포도주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보르도가 있는 지방이다. 그만큼 포도주 생산에 있어서는 내노라 하던 지역이다 보니 이전에는 유통량이 적어 값비싼 가격 때문에 귀족들만 누리던 프랑스산 포도주였다. 보르도지역은 새롭게 들어선 잉글랜드왕실의 지배를 받는 영토였고 포도주가 다량으로 들어오면서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일반서민까지 즐기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간혹 보르도의 포도주를 12세기에 잉글랜드왕실에서 구매하면서 보르도의 포도주가 유명해졌다고 하는 자료가 있는데 이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아키텐은 주변에 프랑스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인 리무쟁이 있을 정도로 농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아키텐은 바다를 끼고 있어 배로 아키텐에서 생산한 재화를 잉글랜드로 실어 나르기에도 유리했다. 덕분에 잉글랜드에는 아키텐의 농산물까지 공급되면서 잉글랜드의 살림살이가 좀 더 여유로웠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영지를 합쳐 헨리 2세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12세기에는 앙주제국(잉: Angevin Empire, 프: L'Empire Plantagenêt)이라고도 부른다. 그만큼 프랑스영토의 상당부분을 지배했지만 훗날 발생하는 백년전쟁의 여러 불씨중의 되기도 하는 역사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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