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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술 이야기]소주의 전래와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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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술 이야기]소주의 전래와 활용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23.01.0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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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민의 삶을 살던 몽골이 테무진에 의해 1206년 통일이 되면서 세계역사는 요동치게 된다. 테무진은 쿠빌라이를 통해 대칸에 오르고 오늘날에는 칭기즈칸으로 불린다. 직후인 1207년부터 휘하의 장수와 성장한 아들들에게 각지로 나가 세상을 정복하라고 지시한다. 몽골군은 기세를 몰아 기마 병력을 앞세워 금 서하, 서요를 멸망시킨다. 

서요를 멸망시키면서 맞닿게 된 국경은 페르시아의 새로운 강자 호라즘 왕조였다. 1220년부터 시작된 전쟁은 ‘우르겐치의 학살’ 같은 유명한 사건을 남기며 1231년에 호라즘의 멸망으로 결말을 맺는다. 페르시아가 몽골에 의해 무너진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레반트지역에서는 십자군이 오가며 간헐적으로 원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 가져간 증류기법을 활용해 증류주를 만들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위스키와 브랜디가 나오게 된다. 

당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는 증류가 일반적이었다는 증거가 유럽이 십자군전쟁을 통한 받아들인 증류기술이다. 아라비아의 변방이던 레반트 지역을 정복한 십자군은 전리품으로 증류기와 증류기술을 습득한다. 페르시아의 중심도시들을 점령한 몽골은 어땠을까? 몽골은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기술자는 살려서 전리품과 함께 당시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으로 보냈다. 

기술자들 중에는 증류기법을 알고 있는 장인과 전리품 중에는 증류기가 있었을 것이다. 카라코룸에서 증류가 이뤄졌다. 말 젖으로 만든 아이락(Airag)과 함께 새로운 전통주 아르히(arkhi)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르히를 몽골군은 새로운 보급품으로 장착하게 된다. 새로운 보급품을 가지고 몽골군은 또다시 말을 탔다. 세상을 정복하려고 달리며 도착한 곳이 당시의 고려였다. 

칭키즈칸에게서 칸을 이어받은 오고타이의 명령을 받아 살리타는 1231년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살리타의 말발굽으로 시작된 침략은 1259년까지 9차례에 걸쳐 28년간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문화재가 유실되고 국토는 피폐해졌지만 복구보다는 일본원정을 준비하던 몽고군의 의지대로 고려의 국력은 징발되어 원정을 위한 자원으로 쓰여 졌다. 
쿠데타로 칸의 자리를 차지한 쿠빌라이는 1차 원정이후 2차 일본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고려의 서울인 개경에 몽고군의 대본영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세웠다. 전초기지(前哨基地)는 합포에 두었고 삼별초를 토벌하고서 제주에는 원의 직할령인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원정 때 사용할 말을 키우는 목장을 만들었는데 이곳들의 공통점은 소주로 유명한 명소라는 것이다. 몽골군은 앞서 언급한대로 호라즘왕조를 정벌하면서 얻은 기술로 증류주인 아르히를 만들어 마셨다.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로 온 1만여 명의 몽골군은 원정을 대비하면서 합포로 집결했고 음료용보다는 의약품으로 쓰일 아르히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농사로 얻은 수확물로 술을 빚어 마셨는데 쌀이나 밀 같은 곡류로 빚는 술과 과일과 쌀로 같이 넣어 빚는 과실주들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발효주의 특성상 알코올 도수가 20도를 넘지 않았다. 

이럴 때 증류기술이 들어와 소주를 만들어 마시면서 탁주와 청주, 소주의 구성이 확립되었다. 그 당시에는 불이 붙는다고 해서 화주(火酒),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이 이슬처럼 보인다 해서 노주(露酒), 땀처럼 흐른다해서 한주(汗酒)로 불렸고 마시면 기운이 난다고해서 기주(氣酒)라고도 불렸다. 아랍에서는 증류나 땀을 의미하는 ‘아라크(Arak)’라고 불렸다. 이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 ‘아랄길(阿剌吉)’인데 우리는 평양 쪽에서는 ‘아랑’이라 불렀고 개성 쪽에서는 ‘아락’이라 불렀다고 한다. 증류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솥에 탁주를 넣고 그 위에 소줏고리를 올려 술을 만들었는데 들어간 탁주의 양보다 나오는 소주의 양이 적어 값이 비쌌다.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졌던 거라 어떻게 보면 지금의 양주였던 셈이다. 문종의 장례를 치르면서 쓰러진 단종에게 소주를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단순한 술이라기보다는 약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서민들도 소주는 약으로 사용하며 귀하게 다루었다. 증류에 사용되는 도구와 기술의 발달로 왕실이나 특권층이 즐기는 사치품에서 가마솥과 소줏고리를 활용한 증류가 일반화되면서 점차 일반백성들까지 소주를 빚어 마시게 되었다. 소주는 특히 조선에서 많이 만들어마셨는데 조선시대에 새로운 농지를 만들면서 농업생산량이 증가했고 당연히 인구도 증가해 선순환이 이루어지면서 가능했다. 그럼에도 날씨로 인한 흉년이 드는 경우에는 곡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곡식이 부족해져서 술 빚는 것을 막고자 금주령이 자주 내려지기도 했다.  
이때에도 소주가 아닌 농사짓는 농민이 마시던 농주와 훈련을 마친 군인들에게 베푸는 호궤에서 쓰이는 술은 예외로 했다. 또 약으로 쓰이는 술은 예외로 하여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몸이 좋지 않아 ‘약주’를 마시는 것이라는 핑계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증류는 물과 알코올의 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한다.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는데 먼저 일반적인 1기압일 때 물은 100도에서 끓지만 소주의 주성분인 에탄올은 약 78도에서 끓는다. 그래서 물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액체를 받으면 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상압증류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산에서 밥을 하면 물이 낮은 온도에서 끓어 밥이 설익는 것과 같이 기압이 낮으면 끓는점도 낮아지는 것을 증류기에 적용해 낮은 온도에서 끓어오르는 알코올을 증류하는 방식인 감압증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소주들은 90%의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알코올의 도수를 낮춰서 판매되는 게 대부분이다. 높은 도수의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주조장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비용의 절감을 이유로 전통방식인 상압증류보다는 일본에서 들어온 감압증류로 소주를 만들고 있다. 최근에 연예인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소주도 위탁생산을 하면서 상압증류로 만드는 소주와 감압증류로 만드는 소주가 섞여있다. 

이강희_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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