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5:17 (화)
[지구를 떠도는富] 초신성의 아름다움 같았던 란쌍 왕국
상태바
[지구를 떠도는富] 초신성의 아름다움 같았던 란쌍 왕국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5 0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히말라야 산맥과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여건상 드넓은 대륙으로의 진출이 어려웠던 동남아시아는 이름도 독자적인 지명이 아닌 중국과 인도의 이름을 붙여서 지어진 인도차이나반도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었던 인도차이나에서 주축세력이었던 타이족 버마족, 베트남족, 크메르족은 시대를 달리하여 인도차이나의 맹주 자리를 차지했거나 양분하여 세력을 과시했었다.

라오스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르게 오랜 시간 통일 왕조가 세워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구심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토착민족의 다양성이 너무 강했고 각각의 여러 소왕국이 서로의 잘남을 뽐내며 난립(亂立)을 하였고 지역 전체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중요시되기보다는 각각의 존재감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환경을 가진 라오스 족이다 보니 다른 민족과 달리 이지역의 역사에 있어 큰 비중을 가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라오스 족이 동남아시아 역사의 주 무대에서 아예 옵저버의 역할만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방향성을 잡지 못하던 라오스족이 인도차이나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를 연 것은 란쌍 왕국이었다. 

 ‘란쌍(Lan Xang) 왕국’은 라오스 족이 세운 왕조로 1353년부터 1707년까지 약 355년 간 지금의 라오스 일대와 주변을 다스렸다. 란쌍 왕국은 오늘날 라오스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역사의 줄기다. 오랜 기간에 걸쳐 통일 왕조를 유지하다보니 경제, 정치, 사회에 걸쳐 안정된 통치를 통해 라오스만의 문화적인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왕국의 이름인 란쌍이라는 자체가 ‘코끼리 백만 마리’를 의미한다는 것으로 당시의 란쌍 왕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강력한 왕국들 중 한자리를 차지했었다. 란쌍 왕국은 라오스의 역사에 있어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이런 이유로 라오스인은 라오스의 새로운 전성기를 꿈꿀 때 란쌍 왕국을 떠올리기도 한다.  

 라오스의 역사와 정치구도는 파응움(ຝ້າງູ່ມ)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변화를 시작한다. 파응움의 조부는 수바나 캄풍으로 라오스 북부의 루앙프라방 주변을 다스리던 군주였고 파응움의 부친은 그 뒤를 이을 왕세자였다. 파응움은 어린 나이에 당시 인도차이나의 강대국이었던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9세의 양자가 되어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자야바르만 9세는 파응움과  자신의 딸이 혼인하도록 하였고 덕분에 파응움의 입지는 시간이 갈수록 탄탄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크메르 제국 내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343년에 세상을 떠난 파응움의 할아버지 수바나 캄풍의 뒤를 이으려던 후계자들로 인해 루앙프라방에서는 왕위계승분쟁이 발생했다. 수바나 캄풍이 후계구도를 제대로 정하지 않고 세상을 뜨게 되면서 여러 후계자가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왕위를 잇겠다고 주장했다.

 이 때 크메르 제국에는 파응움이 있었다. 세력의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고자 했던 크메르제국은 파응움에게 군사를 주어 왕위 쟁탈전에 나서도록 지원했다. 내부분란과 함께 흑사병이 돌면서 국력이 약해져가던 크메르의 영토를 새롭게 나타난 란나와 수코타이가 조금씩 빼앗아가던 상황에서 이들에게 집중해야했다. 크메르는 다른 지역에서의 또 분쟁보다는 자신들과 연대할 수 있는 굳건한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루앙프라방의 왕위는 매우 중요했다. 인도차이나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크메르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파응움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1만여 명의 크메르군을 이끌고 크메르와 가까웠던 루앙프라방의 남부지역부터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한 파응움은 결국 비엔티안을 점령하고 당시 루앙프라방의 실권을 쥐고 있던 자신의 삼촌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1353년에 파응움은 루앙프라방의 왕위를 차지한다. 파응움은 루앙프라방이라는 명칭을 대신해 ‘백만마리의 코끼리’라는 의미를 가진 ‘란쌍’을 국호로 사용했다. 당시 대외무역과 비옥한 토지를 가졌던 메콩 강 일대에 군사력을 보강하여 지배력을 확고히 하면서 영향력을 높여나갔다.

 비슷한 시기 타이지역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수코타이를 대신해 우통이 아유타야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워 다스리고 있었다. 아유타야가 강해질수록 크메르의 세력은 약해졌고 제국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크메르의 서쪽 영토를 차지하며 크메르의 수도였던 앙코르까지 점령한 아유타야는 란쌍 왕국과 경계를 접하게 된다. 1356년에 파응움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팽창하는 아유타야 왕국을 견제하려고하자, 급격한 확장으로 숨고르기를 시전하려던 아유타야는 란쌍 왕국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크메르와는 다르게 란쌍 왕국에게는 사신을 보내면서 금과 100마리의 코끼리를 비롯한 여러 선물을 준비했다. 아유타야의 우통 국왕은 자신의 딸과 파응움 왕의 혼인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파응움 왕은 북쪽으로는 중국과 동쪽으로는 베트남과의 국경을 확정하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며 국력을 키우는데 노력했다. 파응움 왕은 국경의 안정을 통해 주변나라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등의 업적을 남겼지만 아유타야 이전의 수코타이 왕국과 오랜 전쟁을 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이미 잃은 후였다. 귀족층은 그들대로 불만을 표시하며 파응움 왕을 폐위시킨다. 1371년 아들인 삼 센 타이에게 왕위를 빼앗긴 파응움은 루앙프라방에 있는 왕궁으로 강제 유폐되었고 이후 여러 설이 있지만 1380년 즈음하여 이곳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 센 타이 왕은 아버지를 이어 인근의 란나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고 주변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란쌍왕국의 위치를 드높였다. 명나라의 공식적인 책봉을 통해 왕권을 인정받아 통치력도 강화하였다.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업적을 남겼던 삼 센 타이왕은 안정적으로 란쌍왕국을 다스리며 중흥을 이끌었던 왕으로 기록되어있다. 

 뒤를 이어 1416년에 왕위에 오른 란 캄 다엥 왕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자 한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1400년 대월의 쩐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소제가 외척이자 실권을 쥐고 있던 호꾸이리에게 황위를 찬탈당하면서 왕조가 교체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이 시기를 대월의 ‘호 왕조’라고 부른다. 대월과 명목(서류)상 주군관계를 맺고 있던 명(明)에서는 이를 찬탈로 규정하고 대월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여 찬탈했던 세력을 내쫓았다. 명의 황제 영락제는 대월을 주단위로 나누어 직접적인 통치를 강압적으로 하였다. 명은 동화정책을 시행하면서 현지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다. 대월의 특산물로 중국에서 귀하게 대우받던 비취옥과 금이 명나라로 반출되었고 여러 분야의 장인들이 압송되었다.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대월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서적이나 예술품은 재가 되거나 부서졌다. 대월현지에 대한 배려가 없이 명의 입장에서만 진행된 강압통치에 불만을 품은 각 지역의 호족들은 1418년 반란을 일으킨다. 1427년까지 지속되었던 이 반란을 역사에서는 ‘람선봉기(藍山起義)’라고 한다. 

 대월의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 명나라는 란쌍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명나라의 군대는 란쌍 왕국이 지원해준 3만 여명의 군사와 100여 마리의 코끼리를 활용해 대월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하지만 레러이(黎利)가 일으킨 반란만은 유지되었다. 결국 길어지는 반란으로 손실이 증가하고 레러이의 세력이 유지되자 명은  화친을 맺고 철군을 하게 된다. 란쌍 왕국은 반란초기에는 레러이 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명나라에 대한 병력지원을 하면서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1428년부터 1440년까지 8명(남7, 여1)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과 비엔티안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며 나라전체가 어지러웠다. 1456년에 차카파트 왕이 1456년 즉위하면서 혼란했던 시기는 종결된다. 이런 혼란을 틈타 베트남은 란쌍 왕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한다. 당시 대월(베트남)은 ‘람썬 봉기’ 때 명나라에게 병력을 지원하며 협력했던 란쌍 왕국에게 협력했던 것 때문에 생긴 감정으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대월은 18만 대군으로 란쌍 왕국을 공격하면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큰 피해를 입힌다. 이후 왕들은 이때 입은 피해가 워낙 컸기에 으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인 갈등을 줄이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보다 내치에 집중하면서 란쌍의 경제적인 발전은 물론 문화가 성숙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런 결과로 위쑨(재위 1500년~1520년)왕 때에는 란쌍 왕국의 첫 번째 고전문학이 집필되었다. 위쑨 왕은 이외에도 대승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승려들을 교육시켜 학문적 발전으로까지 이어졌으며 란쌍 왕국 전역에 여러 사찰을 지으면서 웅장하면서도 장대한 건축물을 짓는 등 여러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뒤를 이은 포티싸랏 왕, 쎄타티랏 왕도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란쌍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루었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중 가장 강하면서도 부유한 왕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중  라오스를 다스린 포티싸랏 왕(재위 1520년~ 1550년)은 란쌍왕국 역사에서 명군중의 명군으로 이름이 높다. 경쟁국이었던 란나와 아유타야의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왕비를 맞이하여 외교적인 안정을 이뤄 대외적인 안정은 물론 내치적으로는 백성들의 정서를 통일하기 위해 힌두교, 정령 신앙 등을 억제하면서 불교가 진흥되도록 노력하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포티싸랏 왕은 불교의 성장은 물론 비엔티안으로 궁과 거처를 옮기며 경쟁국이던 베트남과 아유타야 왕국의 침입으로부터 방어가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고히 함은 물론 란나의 왕이 사망하자 자신과 란나의 공주 사이에서 낳은 아들 쎄타티랏을 란나의 국왕으로 임명하게 만들어 란나 왕국을 흡수/통합하였다. 이시기가 란쌍 왕국이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시기로 라오스의 전통문화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던 시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