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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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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대월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22.11.1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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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 / 이강희 칼럼니스트] 현대사에서 우리나라처럼 분단과 전쟁을 치룬 나라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가교역할의 위치다보니 예전부터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약 3,260km에 달하는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남아메리카의 칠레와 비슷한 인상을 가진 나라다. 해안선을 따라 여러 만(灣), 석호(潟湖), 강, 운하 그리고 바다에는 3,000여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의 이런 지형으로 인해 중국과 아라비아를 오가던 무역선들은 인근에 불어오는 폭풍이나 장마를 피하기 위해 이러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정박하여 선박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특히 베트남에 있던 항구들은 풍부한 음식은 물론 신선한 물을 구하는데 최적지였다.  

 한(漢)의 무제 시대부터 시작된 중국의 지배는 육조시대를 거쳐 당나라 때까지 약 1천년에 걸쳐 계속된다. 당이 멸망하고 5대10국시대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10국중 하나인 남한(南漢)을 물리치고 응오꾸옌이 939년에 최초로 베트남인을 중심으로 ‘대구월국(大瞿越國)’을 세우고 응오 왕조가 개창된다. 이후 여(黎)씨 성을 쓰는 ‘레 왕조’가 30여 년간 유지되다가 1009년 ‘리왕조’가 들어선다. 운남 지역의 남조가 멸망 후 새롭게 들어선 대리국 침략으로 잠시 힘든 시기를 보내지만 이를 물리치며 안정된 치세를 위한 기초를 다진다. 이후 1054년에 국호를 ‘대구월국(大瞿越國)’에서 ‘대월국(大越國)’로 바꾸고 말레이계인 참족이 세운 참파와 중국의 견제 속에서도 계속 성장하며 215년간 북부베트남을 지배했다. 치세기간동안 최초로 과거를 시행하는 등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나라의 중흥을 꾀했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의해 비정기적이어서 효과는 적었다. 2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리왕조도 진(陳)씨를 쓰던 ‘쩐왕조’의 등장으로 왕족이 몰살당하며 몰락한다. 그 와중에 어렵게 탈출한 왕족으로 알려진 인물 이용상이 후손을 데리고 고려에 귀화하여 ‘화산이씨’와 ‘정선이씨’로 터를 잡고 살았다.

 중국의 오랜 지배로 인해 베트남지역에서는 비단을 비롯한 직조직물은 물론 도자기를 비롯해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들던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재화는 역내교역과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위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졌고 만드는 기술도 계속 발전했다. 덕분에 무역시장에서 상인들이 탐내는 여러 재화를 많이 만들어내던 대월은 이익을 얻으려던 외국상인들에게 중국 못지않은 관심을 받았었다. 오히려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여기에는 해적들의 활약이 영향을 주었다. 해안에 자주 출몰했던 해적 때문에 골치를 앓던 중국이 대외교역을 아예 하지 않을 때에는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상인들이 대체재를 찾기 위해 베트남으로 모여들면서 대외무역의 중계지가 아닌 중심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고 이를 통한 이익을 많이 누렸다.   

 베트남은 기후와 지리적인 영향으로 농업이 발달하다보니 선박이 다니면서 필요한 곡식을 비롯한 해산물, 임산물 같은 식량을 구입하기도 유리해 중간기착지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서서히 역내교역은 물론 바닷길을 이용한 국제적인교역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당나라 때에 설치된 안남도호부로 인해 안남(安南)으로 불렸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인디카 종의 쌀은 ‘안남미(安南米)’라는 명칭으로 오늘날까지 불린다. 생산량이 풍부해 교역을 위해 오가는 선박에 식량으로 자주 쓰여 대외교역에서 명성이 알려졌었다. 

 여러 왕조를 거치지만 본격적으로 베트남이 성장하게 되는 시기는 15세기에 등장하는 ‘후(後) 레(Lê, 黎)왕조’ 때였다. 수로는 물론 내륙의 도로를 확장하여 각 지역에서 생산한 곡식과 임산물, 수공예품 같은 상품들이 오가는데 수월해졌다. 내륙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중국과 달리 여러 항구를 외국인들에게 개방하면서 교역외의 문화적 교류도 허용하였다. 이후에 들어선 막(Mac, 莫)왕조의 대월은 레 왕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외 교역을 위한 정책을 폈다. 

 막 왕조는 수도였던 탕롱(昇龍, Thăng Long, 하노이)를 중심으로 직물과 수공업을 산업화하여 생산과 상거래가 활성화되도록 장려했다. 특히 대외적으로 고가에 거래되며 부가가치가 높았던 도자기 제품을 개발하는데 노력했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처럼 당시 대월의 도자기 기술이 집약되어 만든 화람(華藍, Hoa Lam)이나 청화백자라고 불렸던 도자기는 대월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인 명품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짙푸른 청색인 암청(暗靑)과 백색의 조화가 일품인 청화백자는 대월의 도자기 역사에서는 물론 세계 도자기사에서 매우 중요한 예술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만든 이는 물론 만든 날짜까지 새겨지다보니 중국에서 만들어졌던 도자기와는 별도의 예술사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지리적 입지를 활용해 여러 침향, 율무, 사향, 같은 약재는 물론 시나몬, 카다몬, 칼람바크, 같은 향신료의 거래도 많았다. 쌀은 물론 소금, 설탕 등의 식재료와 진주처럼 귀한 물건도 빠지지 않았다. 대월은 이처럼 자연에서 얻는 상품은 물론 무역에서 수요가 많은 재화를 생산하여 상거래를 통한 이익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다. 시장거래가 활발해지자 편의성을 위해 주조했던 동전을 활용한 덕분에 대월의 상거래를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대월은 아라비아와 인도는 물론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상인들 외에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잉글랜드의 동인도 회사(EIC), 프랑스 동인도 회사(CIO)처럼 유럽에서 온 상인들과의 무역 관계도 유지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당시 외국 상인들 입장에서는 무역으로 큰 이익을 내기 위해 대월이 상당한 가치를 가졌던 곳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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