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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동남아시아 발전의 트리거 남조(南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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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동남아시아 발전의 트리거 남조(南詔)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22.11.0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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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우리가 학창 시절 삼국시대나 중국 왕조에 대해 배우면서 접하는 북방민족에 흉노가 있다. 중국으로부터는 흉노라 불렸지만 유럽에서는 훈족이라 불렸다. 명칭만 달랐을 뿐 활약상은 같았다. 좋은 표현으로 용맹함이지만 나쁜 표현으로 포악함이었다. 그들은 게르만족 이동에 영향을 주면서 훗날 로마의 멸망으로 게르만이 유럽을 차지하게 되는 트리거 역할을 했다. 동남아시아에도 이런 트리거가 있었다. 바로 남조(南詔). ··일이 말하는 남조(南朝)와는 다르다.

남조는 지금의 중국 지도에서는 운남성(雲南城, 이하 윈난지역에 해당한다.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나라로 남조는 특이하게 연명(連名하여 왕의 이름을 지었다. 부자연명(父子連名)이라 하는데 부친 이름 끝 자와 아들 이름 첫 자를 같게 만드는 거다. 예를 들면 자니윤()-윤서결에(), 에리카김()-김거니()처럼 ’, ‘이라는 공통 글자를 넣고 이어가는 형식이다.

사천성(四川省, 이하 쓰촨)의 일부와 윈난에 이르는 지역에는 이족()과 바이족(), 타이족을 중심으로 여러 소수민족이 연합해서 세운 몽사(蒙舍詔), 나시족이라 불리는 납서족을 중심으로 세운 월석(越析詔)을 비롯해 낭궁(浪穹詔), 등섬(邆賧詔), 시랑(施浪詔), 몽수(蒙嶲詔) 등의 육조(六詔세력이 합종연횡을 통해 다투고 있었다. 그중 남쪽에 있던 몽사조(蒙舍詔)가 육조를 통합하여 653년 나라를 세워 대몽(大蒙)이라고 부르다가 728년부터는 남조라고 불렀다. ‘()’라는 글자는 이 지역에서 왕()이나 지역() 나라()를 의미한다. 불교국가였던 남조는 윈난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전성기에는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일대까지 세력을 넓히며 성장하였고 이들 지역에 불교가 뿌리내리는데 영향력을 미치며 902년까지 유지되었다.

남조가 자리한 지역의 역사는 꽤 깊다. 중국의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남벌을 위해 향하는 남만 지역이 남조가 있던 운남 일대다. 이 지역은 중국과 티벳이 연결되는 곳으로 티벳족은 물론 버마족과 타이족 외에도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는 한족의 생활권이 확장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긴 소수민족들은 한족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침입이 쉽지 않으면서도 살기에 적당한 곳을 찾았는데 평균 고도 1,980m인 운남은 남쪽이면서도 높은 고도로 인해 기후가 덥지 않아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비옥한 토지에 강수량과 일조량도 많아 농사를 지으며 살기에 좋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남에는 혼란을 피해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고 오늘날 운남성에 거주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소수민족만 이족(), 타이족(), 나시족(纳西), 티베트족(), 몽골족(蒙古), 바이족(), 좡족(), 하니족(哈尼), 먀오족(), 회족(), 리수족(傈僳), 라후족(拉祜), 와족(), 야오족(), 징포족(景颇), 부랑족(布朗), 부이족(布依), 아창족(阿昌), 푸미족(普米), 누족(), 지노족(基诺), 더앙족(德昻), 수이족(), 만주족(滿), 두롱족(獨龍)을 합쳐 25개의 민족이다. 윈난의 8시와 8개 자치구에 살고 있다. 이 중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은 이족(500만 명)이다. 윈난 인구가 5천만이 넘는 상황에서 거의 10%에 육박하고 있다.

남조는 대국이 아니다 보니 토번과 중국 사이에서 지역의 균형을 맞추는 균형추 역할을 했다. 당이 숙적으로 여기던 토번과 연합하여 당에 침공했으나 패배하면서 믿었던 토번에게 배신을 당하고 군신관계를 맺는다. 이에 무리한 요구와 강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토번에 당해야만 했던 남조는 불만이 많았고 당은 이런 남조에게 접근하여 반간계를 펼쳤다. 토번은 위구르와의 대립에 남조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이에 응하는 척하며 남조는 군사를 보냈고 토번군의 경계심이 약해졌을 때 후방에서 공격을 감행해 토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토번에서는 내분이 일어 국력을 모을 수 없었고 남조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없었다. 반대로 당은 숙적 토번이 사라지면서 한시름 놓게 된다. 남조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당으로부터 여러 하사품과 혜택을 받게 되었다. 남조는 당과의 관계는 물론 내치에서도 안정을 이루었다.

윈난 일대의 토지는 비옥했고 농산물의 생산이 안정적이어서 국력은 강성해지면서 칭제 건원하기도 한다. 당이 안록산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남조는 당을 자주 침략했다. 당의 변방 행정조직인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일대는 물론 촉의 성도까지 군사를 이끌고 움직일 정도로 남조는 성장해있었다. 당시 당은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릴 정도로 약해져있었기 때문에 남조의 위협을 통제할 수단과 힘이 없었다.

이후 남조의 세력이 커지고 확장되면서 피해를 입던 버마족은 지금의 버마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 타이족은 지금의 타이로, 라오족도 남조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지금의 라오스로 이동했다. 남조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많은 민족들이 이들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이동했다. 남조와 당의 전쟁을 틈타 베트남도 독립을 했다. 이렇듯 지금의 동남아시아의 형태가 자리를 잡는데 남조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조의 발흥이 오늘날의 동남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남조는 소금, 뽕나무, (), 말을 당, 토번을 비롯한 주변 나라와 교역하며 성장을 하였지만 왕권이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쇠락해졌고 여러 부족이 난립하면서 혼란을 겪다가 대리국이 건국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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