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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군도를 통합한 제국 스리비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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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군도를 통합한 제국 스리비자야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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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해골에 담긴 물의 사연으로 유명한 원효와 의상 못지않게 신라 불교계의 ‘인싸’였던 혜초. 그는 천축국(이하 인도)로 유학을 떠나면서 자기가 보고 겪은 일을 글로 정리하는데 그 기록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기록대로라면 혜초는 723년부터 727년까지 인도의 다섯(동남중서북)지역 외에도 오늘날 이란 일대와 중앙아시아까지 답사하고 당나라에 도착한다. 다녔던 나라의 종교와 문화, 생활상들이 담겨있어 역사기록이 적은 이들 지역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더불어 당나라 승려였던 혜림은 ‘일체경음의’에서 혜초가 인도를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이유로 학자에 따라 인도로 가던 혜초가 당시 동남아시아의 강국으로 도약하던 ‘스리비자야의 지배지역을 거쳤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한다.   

 스리비자야(Srivijaya, 또는 Sriwijaya)는 ‘영광스러운 승리’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대국은 육지에서 발생하였었다. 섬에서 발생한 국가 중에서 군소국을 넘어 대국으로까지 성장한 경우는 스리비자야가 처음이었다. AD659년부터 1377년까지 유지되었던 스리비자야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백제 말부터 고려 말까지 존재했던 국가다. 흥성쇠망이 있었지만 육지보다 조세나 물류의 이동처럼 통치가 어려운 해양 국가임에도 오랜 기간 유지될 정도로 강력한 국력 못지않게 국가운영 시스템이 잘 갖춰졌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중국 문헌에서 산푸치(三佛齊, Sān fú qí)로 불리던 스리비자야의 원류는 고대왕국인 칸톨리(Kantoli) 왕국이었다는 중국의 기록이 있다. 칸톨리는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쌓았던 나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수마트라 섬에 위치한 스리비자야는 칸톨리의 주변에 있던 팔렘방(Palembang)에 거점을 두고 성장하였다. 수마트라 일대를 장악하면서 인접해있던 자바 섬은 물론이고 바다에 펼쳐진 수많은 섬들을 차례차례 정복해갔다. 팔렘방에서는 무역으로 부를 모았고 자바 섬에서는 넉넉하게 공급되는 식량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주변의 통치가 안정을 이루고 국력이 커지면서 스리비자야는 바다 건너 육지로 진출하였다. 

 가까운 말레이반도를 시작으로 해안선을 따라 타이의 남부 해안가 일대와 매콩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메콩강줄기를 타고 중하류 주변을 장악하였으며 참파 지역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세력을 떨치면서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부상하게 된다. 훗날 앙코르 와트를 세우는 크메르제국도 당시에는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전성기를 맞은 강대국의 출현으로 인해 다른 나라의 해상활동이 감소하였다. 스리비자야의 통치를 받기 전에 ‘멜라유(Melayu)왕국’이 독립되어 있을 때만 하더라도 무역을 하던 여러 항구도시 간의 경쟁이 심했지만 스리비자야가 주변 섬과 육지의 나라들까지 정복하거나 지배하면서 지역의 갈등과 혼란은 안정화되었다. 다른 지역의 항구에서 무역활동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경쟁도 줄어들었다.

 스리비자야의 거점이었던 수마트라는 인도와 중국을 오가는 길목에 있다 보니 일찍부터 상거래를 하던 상선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특히 당시만 해도 배의 크기가 작아 큰 바다로의 항해가 위험하던 시절이어서 연안을 타고 항해를 하였기 때문에 스리비자야가 다스리던 말레이 반도에 있는 끄라고 지협을 통해 인도와 중국을 오가는 경로가 발달하였었다. 끄라고 지협은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 히말라야산맥 같은 자연지형물로 인해 서로 오가기가 쉽지 않았던 비단길이라는 육지의 길 대신 두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다.       

 교역을 위한 안정을 이룬 덕분에 8세기경부터는 배를 타고 인도를 넘어서까지 활발하게 움직이던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접촉이 잦아졌다. 또 중국에서도 당나라가 내치의 안정을 이루어 대외교역이 활발하던 때라서 스리비자야는 중계무역의 최적지로 주변에 알려지던 시기였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거래되던 재화는 꽤 멀리까지 유통되었다. 아라비아, 인도, 주변의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이나 탐라와 신라까지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스리비자야에는 수마트라, 자바, 말레이반도, 보르네오, 아라비아, 인도, 중국 등지에서 쌀, 면화, 금, 은, 상아, 면화, 주석, 등나무, 철을 비롯한 특산물과 육두구, 후추, 계피를 포함한 향신료, 도자기, 칠기, 비단 등 다양한 재화가 모여 상인 간의 거래가 계속 이루어졌다. 아라비아와 인도, 중국은 정기적인 배편이 오갈 정도였다. 교역되는 품목이 많다 보니 스리비자야의 특산품이 무엇인지를 헷갈릴 정도였다. 아라비아 상인과 인도 상인은 중국까지 바다의 위험을 무릅쓰고 갈 필요가 없었다. 중국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상인이 스리비자야의 팔렘방에서 모이면 교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재화가 모이면 거래가 빈번해지고 자연스레 부(富)가 쌓이다 보니 스리비자야의 경제적인 번영은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해상활동의 증가는 항해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배에서 필요한 기능을 요구하자 조선술이 성장하였다. 배의 크기 증가는 교역량의 증가를 불러왔고 배 크기와 배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당연히 해군력도 증강시켜야 했다. 이런 나비효과 바다는 예전보다 안전하다는 인식을 가져다주었고 바다를 통해 움직이는 재화의 공급과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당연히 무역항 간의 경쟁으로 통치가 어려웠던 주변 바다를 장악한 만큼 스리비자야의 해상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해상활동의 성장으로 험난한 사막보다 안전해진 바다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학문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혜초 외에도 불교유학을 위해 바닷길을 이용해 인도로 가던 당나라의 승려 의정이 스리비자야에 잠시 머물면서 산스크리트어 연구를 바탕으로 인도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스리비자야 불교의 수준이 인도에 못지않았다는 것과 경전을 비롯한 율(律)과 논(論)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불교국가였던 스리비자야가 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인도로 유학하는 승려들에게는 여비를 지원하였고 경전을 들여오기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 유명한 승려를 초청하는 경우도 있어 불교의 발전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지금은 스리비자야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중심지였던 팔렘방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도시에 이름을 올리며 과거의 영광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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