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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동남아 실크로드의 중심 푸난(Fu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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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동남아 실크로드의 중심 푸난(Funan)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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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오늘날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그들이 있는 지역을 인도차이나반도라고 한다. 그 땅에는 세계에서 길이로는 12번째로 약 4,020㎞에 걸쳐 흐르는 수량은 10번째로 많은 강이 흐르고 있다. 이 거대한 물줄기는 인도차이나반도를 구성 국가들의 국토를 적시며 젖줄로서의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가 메콩(Mekong)이라고 부르는 이 강을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문명을 이어왔다. 특히 메콩 하류에는 상류에서 물과 함께 흘러온 유기물이 쌓이다 보니 토지는 농사짓기에 좋았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먹거리를 찾아 메콩델타(MekongDelta) 또는 ‘코친차이나(CochinChine)’라고 불리는 삼각주 지역으로 몰렸고 이 지역에는 ‘푸난(Funan)’이라는 도시가 세워지게 된다. 푸난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계속 모이면서 세력을 확장해 하나의 나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漢書)에는 ‘扶南(부남)’이라고 표현된 이 나라는 AD1세기 말, 역사에 등장하여 6세기 중후반 크메르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이어지며 번영을 누렸고 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가 성장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다와 닿아있는 지리적인 특성에 따라 일찍부터 항구가 발달하였다. ‘옥에오(Óc Eo)’라고 불리는 동남아시아의 고대 국제 무역항은 메콩을 통한 내륙으로의 운송은 물론 동·서양을 이어주는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으며 고대 문화를 발전시켰다.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하는 곡식은 강을 타고 내륙까지 공급될 수 있어 영토가 확장되었고 바다에서 펼쳐진 교역으로 이국의 재화가 교류되면서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지금의 베트남과 캄보디아 일대는 물론 태국, 말레이반도, 미얀마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에 푸난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당시 옥에오에는 인접한 인도와 중국은 물론 아라비아와 유럽의 상인들이 몰려와 서로 가져온 재화를 거래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고대 로마시대의 금화가 유적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푸난의 주된 수출품은 구슬이나 원석을 가공한 석영, 자수정, 홍옥, 금 같은 귀금속과 코끼리나 상아, 코뿔소 뿔, 어류 깃털, 동물의 가죽, 향나무 등 다양했다. 판시만 (Fan shih-man)왕 치하에서 푸난은 안전한 해상교역을 위해 주변 일대를 장악하고도 남을 막강한 함대를 구축한다. 함대는 주변의 여러 지역으로 뻗어나가 푸난의 대외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반도의 여러 지역을 포함해 수마트라와 자바, 보르네오 등 큰 섬들의 여러 거점들을 차지해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장악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물론, 관료제를 도입하는 등 선진제도를 도입해 국가 체계를 세우며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고 잉여 재화는 해안가의 외국 무역상에게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상인들의 신뢰를 얻어 옥에오를 중심으로 교류가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옥에오는 무역풍이 부는 지대에 있다 보니 해상교류에 유리했다. 후한서에 대진국과 안돈왕이 등장한다. 대진국은 고대 로마를 지칭하는 것이고 안돈왕(安敦王)은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를 말한다. 당시 그리스·로마·이집트의 상인들이 그러했듯이 안돈왕(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령을 받은 로마(대진국) 사신은 아라비아와 인도를 거쳐 옥에오에 도착한 뒤에 일남으로 다시 이동해 후한에 교역 품을 보냈을 것이다.

이때가 AD166년으로 후한의 11대 환제(桓帝) 때다.  혼란기인 삼국시대 조조의 조나라에 막혀 실크로드 교역이 어려웠던 손권의 오나라는 교역을 위해 해상루트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때 대상이 되었던 곳도 바로 푸난의 옥에오였다. 

 일본서기에 543년 ‘가을 9월에 백제 성왕이 사신 세 명을 통해 부남의 물품과 노예 2명을 보내왔다.’는 기록을 통해 백제가 부남과의 교류가 직·간접적으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옥에오는 한반도부터 시작된 동아시아와 로마로부터 시작된 서양의 문화가 교류되는 고대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되는 유적 발굴을 통해 금화 외에도 힌두문화가 엿보이는 인도문자 새겨진 유물이나 한나라의 청동거울, 각종 동전, 구슬과 장신구 등은 옥에오가 단순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푸난의 문화를 잉태하는 자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에오에서 발굴되는 유물의 특징은 가공 기술의 섬세함이다.  

 여러 색과 모습을 가진 유리구슬이 많이 발견된다. 유리로 만든 것 이외에도 여러 보석 원석을 깎고 다듬는 작업을 통해 원형이나 육각형, 원통형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가공할 수 있었는데 최근 연구를 통해 백제의 유리 유물과 옥에오에서 발견되는 유리 유물의 성분이 유사하다는 결과가 계속 나오면서 두 지역 간의 역사적인 교류를 연구하는 등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에서 건너온 비단은 로마의 귀족들이 애용을 했고 진주와 호박 같은 귀금속은 중국 왕족이 애용했다. 바다를 통한 활발한 교류는 간다라 미술을 받아들이면서 힌두 양식까지 결합되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낸다. 푸난이라는 강력한 해상제국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 지배를 공고히 하여 한동안 풍요로운 해양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해상왕국으로 번성하던 푸난은 5세기가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중에 하나가 말라카해협이다. 해상교역의 중심이 말라카로 이동하면서 끄라 지협과 연계된 옥에오를 찾는 이가 줄었고 또 하나 중국인이 무역에 적극 뛰어들면서 중계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새롭게 일어선 북쪽의 진랍(眞臘, Zenla, 천라, 크메르)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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