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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씁쓸한 과일의 나라 마자파힛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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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富] 씁쓸한 과일의 나라 마자파힛 제국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15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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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AD 7세기경에 자바 섬의 서부에 자리를 잡은 순다(Sunda)왕국과 갈루(Galuh)왕국은 통합과 분리를 반복하며 안정적인 치세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중부에서 동부까지는 여러 세력이 통합과 분열을 이어가며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혼란의 이유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더불어 불교, 힌두교와 같은 종교적인 영향까지 있었다. 혼란을 추스르고 중동부를 통합하여 세운 나라가 싱하사리(Singhasari)다. 자바섬을 중심으로 1275년의 말라유 원정과 1284년에 발리원정을 통해 수마트라 남부, 지금의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섬 남부, 슬라베시섬 남부, 부루, 암본, 스람까지 영향권에 두었다. 베트남지역의 참파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대내적으로 안정을 기하던 싱하사리의 치세에 역사는 가혹하게도 몽골이라는 거대한 산을 만나게 했다. 몽골의 침입을 대비하던 중 내부갈등까지 겹치면서 크르타나가라(Kertanagara)왕은 반기를 자야카투앙(Jayakatwang)에게 암살당하고 싱하사리는 멸망한다.

 암살당한 왕의 사위였던 라덴 비자야(Raden Vijaya)는 무리를 이끌고 마두라 섬으로 피했다. 이후 자바 섬 동쪽 타리크(Tariq) 지역에 터를 잡은 라덴 비자야는 목재가 풍부했던 숲을 개간하여 벌목한 목재로 도시를 세웠다. 사람들은 일하면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숲에 있던 마자(Maja)라는 과일을 먹었는데 쓴맛(pahit)을 냈다. 쓴맛을 맛보며 세워진 도시는 사람들에 의해서 ‘마자파힛(Majapahit)’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 역사는 물론 동남아시아역사에서 최강국으로 이름을 올리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가 된다.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말과 수레를 사용해서 수많은 영웅들이 제국을 세우기를 반복했다. 드넓은 만주에서도 제국의 흥망이 계속되었다. 발을 디딜 땅에서는 수많은 제국의 역사가 이루어졌지만 이동이 어려운 바다에서 이뤄지기는 쉽지 않았음에도 마자파힛은 동남아시아일대의 섬을 정복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룩해냈다. 가을에 수확한 고추를 말리려고 마른바닥에 뿌려놓듯 수많은 섬이 바다위에 펼쳐진 동남아시아. 그곳에 마자파힛이 해상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후대에 라덴비자야의 손자 하얌 우룩(Hayam Wuruk, 재위1350–1389)황제 때에 이르러 마자파힛은 본격적으로 제국으로 발돋움한다. 대외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떨쳤다. 자바섬에서 출발한 해상원정으로 서쪽으로는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을 정복하였고 보르네오 섬과 동쪽으로는 슬라베시 섬, 술루, 민다나오(필라핀 남부), 말루쿠 일대와 소순다열도를 비롯해 뉴기니 섬 서부지역과 오스트레일이아 북쪽까지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내치가 안정되면서 14세기에 정치적 안정은 물론 경제·사회·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게 된다. 

 마자파힛 제국은 거대한 무역루트의 중심에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네치아에서부터 이집트, 아라비아,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 주변과 중국(원)은 물론 조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무역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재화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무역선을 타고 ‘머나먼 여행’ 떠나기를 반복했다. 마자파힛의 명성도 당연히 뻗어나갔다. 해상무역은 재화만의 교류에서 멈추지 않고 문화와 종교, 예술양식까지 계속 이어졌다. 교류를 통해 전파된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 아라비아의 이슬람은 마자파힛이 겪게 될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공예품에서는 종교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예술품이 남아 있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마자파힛(인도네시아) 역사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해준다. 

 마자파힛은 조선왕조실록에 조와국(爪哇國)또는 조와국(爪蛙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실록에는 조와국에서 온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태조 때부터 태종 때까지 등장하며 오랜 시간 무역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의 내용을 유추해보았을 때 조선과 조와국의 20년 가까이 이어지던 교류는 뱃길을 막고 노략질을 하던 왜구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이후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이슬람세력의 유입으로 제국은 조금씩 쇠약해져갔다. 결국 이들 세력에 의해 조금씩 힘을 잃어가던 마자파힛 제국은 1527년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축소되어 제국은 종말을 고하지만 자바 섬 동쪽에 있는 발리 섬으로 옮긴 마자파힛의 후계는 섬을 지배하며 1908년 시점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런 영향으로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슬람보다는 힌두교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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