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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동남아시아의 부가 쌓였던 호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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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동남아시아의 부가 쌓였던 호이안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7.2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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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이안 관광지의 모습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한국인이 많이 찾는 베트남. 하노이부터 호치민(사이공)까지 길게 뻗은 베트남 국토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관광도시 다낭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중계무역과 부(富)를 이끌었던 무역도시 호이안(Hoi An)을 만날 수 있다. 외국인의 발걸음은 다낭보다 호이안에 먼저 닿았던 것이다. 

투본(Thu Bon)강가에 자리한 도시 호이안은 BC 2세기경부터 항구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점차 무역 중심지로 발전을 했다. 꾸준한 성장을 통해 15세기 즈음에는 베트남 역사에서 강력한 왕조였던 참파(Champa)의 주요 거점 항구로 발전하였다. 
 
가장 번성했던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는 다른 아시아 상인과 유럽 상인의 교류의 장이 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상업,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다. 베트남에는 이 시기(17세기)에 아라비아, 인도, 중국, 일본 같은 아시아국가 외에도 포르투칼, 프랑스 같은 기독교 국가의 상선과도 교류를 했다. 

이 과정에서 호이안은 무역도시로도 번성하였지만 유럽의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였던 곳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응우옌(Nguyen) 왕조의 왕들이 무역에 적극적이어서 19세기에도 무역항으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호이안은 다낭을 비롯한 항구들이 부상하기 전까지 15~19세기에 걸쳐 인도차이나반도를 중심으로 아라비아, 인도, 중국, 일본을 비롯한 주변을 이어주며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했다. 
 
과거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파월 한국군은 당시 다낭에 주둔했던 미군과 달리 호이안에 사령부를 두었다. 북베트남의 주된 표적이었던 미군이 주둔한 다낭과는 다르게 호이안은 20세기 혼란스러웠던 정치 이념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가 적었다. 전략적인 요충지가 아니다보니 많은 건축물이 전쟁 기간 중에도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된 상태로 남아있어 호이안은 1999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15~19세기 동안 국제 무역항의 역할을 해 온 호이안은 주로 중계무역의 역할을 담당하다 보니 베트남의 현지 문화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문화도 남아 있어 다양한 문화양식이 결합된 항구의 옛 모습을 잘 보존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투본 강의 하류에 위치한 호이안은 바다와 가까워 교역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에도 유리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는 여러 가지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의 환경적인 부분은 호이안이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하는데 안정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했다. 식량을 구하기에 유리했기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어 베트남 사람들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한 흔적이 남아있다. 
 
17세기 중국의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인해 안정을 찾아 헤매던 중국인들이 하나, 둘 호이안을 찾게 된다. 자연스럽게 소문은 퍼져 혼란을 피하려는 중국 출신 화교들이 대거 호이안으로 들어오면서 중국문화도 자연스럽게 유입된다. 

중국출신의 상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졌고 거상으로 알려진 떤키(Tan ky)의 집을 포함해 호이안에서 자리잡은 푸젠 출신 화교들이 모여 만든 푸젠(福建, 복건)회관이 1697년에 만들어진다. 이후에도  광동출신들이 모여 1786년에 세운 광조회관 외에 중화회관과 조주회관, 해남회관도 지어지면서 다른 지역 출신의 화교들도 꾸준히 친목모임을 가지게 되고 중국 상인 특유의 꽌시(關係,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중국문화의 영향이 그대로 이곳의 지역 색이 되었다. 

호이안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지금도 발견되고 있는 도자기 유적을 통해 현지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들여와 인도, 아라비아와 교역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인도, 아라비아의 유향이나 인도의 커리, 시나몬 같은 향신료와 여러 재화도 들여와 중국과 일본에 중계무역을 하면서 많은 부(富)를 축적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앞서 언급했던 나라들 외에도 대만, 류큐(중세 일본 오키나와현에 있었던 왕국의 이름), 네덜란드의 상선과의 교류가 있었던 흔적들이 호이안 곳곳에 남아있어 무역중심지로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역의 중심지는 점차 다낭으로 옮겨졌다. 돈과 재화가 다낭으로 몰리면서 호이안은 쇠락했지만 다이내믹한 명성만큼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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