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5:17 (화)
[지구를 떠도는 富] 진주무역의 중심지 주바라(Zubarah)
상태바
[지구를 떠도는 富] 진주무역의 중심지 주바라(Zubarah)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7.07 16: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다이아몬드, 오팔, 옥,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토파즈 수정처럼 보석이라 불리는 대부분은 땅속에 묻혀있는 광물을 캐낸 것이다. 땅속의 여러 원소들이 지각운동에서 발생하는 열에너지의 영향으로 각각의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광물성 보석들과는 다르게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이 있다. 바로 진주다. 바닷속 생물인 조개에서 만들어지는 진주는 보석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는 조개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분비물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조개는 이물질이 낄 때 자신을 보호하려고 껍질 바로 밑의 외투막에서 방어 물질을 뿜어낸다. 이것으로 이물질을 감싸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막이 두껍고 단단해지면서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살려 진주를 유럽에 알린 사람이 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다. 그녀는 자신의 연회를 재미없어하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재밋거리를 위해 자신이 귀에 차고 있던 진주 귀고리장식에 있던 진주 하나를 떼어내어 식초에 담아 녹여서 마셨다고 한다. 양식으로 생산되는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 진주는 굉장히 귀했기 때문에 소수의 권력층에게만 허락된 보석이었다.  
 
진주는 아라비아를 대표하는 상품 중에 하나였다. 걸프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던 진주는 오래전부터 아라비아지역의 대표적이 수출품이었다. 걸프지역의 진주는 고려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유럽까지 거래되면서 동서양에 이름을 떨치며 보석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진주는 여름에 주로 채취되었는데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카타르의 고대도시 주바라(Zubarah)는 고대부터 진주 생산지로 유명세를 얻었던 곳이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원주민들이 정착해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주바라. 그들은 진주를 배에 싣고 출항해 인도양을 거쳐 중국과 페르시아를 오가면서 바다를 통해 교역을 하였다. 주바라는 9세기경인 이슬람 초기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발달하여 내륙에 있는 정착촌과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페르시아 만의 긴 해안선을 타고 요새로 형성된 여러 무역도시들과 오랜 시간 동안 경쟁하였을 것이다. 1800년대 말에 양식을 통해 진주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한 일본이 1916년부터 대량생산을 하면서 희소성이 덜해졌지만 진주의 유명세는 여전했다. 

동서양의 교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던 아라비아반도는 3세기경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무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아시아에서 수입한 구리, 향료, 백단향 등과 아라비아에서 나는 염료(자색), 의류, 대추야자와 금, 은, 진주 같은 귀금속을 교역하였다. 진주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주성분인 석회 외에도 미네랄과 생리활성물질이 들어있어 예로부터 왕과 왕족들의 자양강장제나 항노화제로도 애용됐다. 

7세기부터 우마이야(661~750) 왕조와 아바스(750~1258) 왕조를 거치면서 무역과 상업이 전성기를 맞았고 8세기 중반부터는 주바라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진주의 유명세가 아시아에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수요가 증가했다. 생산되는 양이 한정되었던 만큼 진주의 가격은 지금의 다이아몬드보다도 가치가 높았다. 이런 희소성으로 인해 당시 세계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중국 황실로도 진주가 수출되었다.

생산지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으로도 알려졌던 주바라의 진주는 유럽의 여러 왕실로 팔렸다. 지금도 남아있는 유럽왕실의 왕과 여왕들의 초상에는 그들이 착용했던 진주로 만든 장식들이 그려져 있다.

진주를 착용할 수 있었느냐는 부(富)와 명예 외에도 권력을 상징했다. 카타르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주바라는 진주무역의 중심지였던 이력답게 다양한 문화권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생산하던 각양각색의 진주로 만든 여러 형태의 장식품은 물론이고 진주교역을 통해 얻었을 각 나라와 시대의 화폐와 토기, 중국식 도자기와 페르시아의 도자기가 발견된다. 이는 진주를 통한 무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막의 모래바람의 덕택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유적들은 아직도 극히 일부에서만 시작해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주바라를 비롯한 주요 해안 도시에서 꾸준했던 도시 무역과 진주 채취와 관련된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 어떤 고가품보다도 비쌌던 진주 수출로 꾸준히 번성하였던 주바라는 인도양과 아라비아반도, 서아시아에 걸친 지역과의 진주교역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해안도시와 토후국 간에 있었던 진주 채취와 무역은 여러 소국들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 나아가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르시아만 연안에 여러 아라비아 국가가 출현해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