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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타이의 최대 문화 왕조 아유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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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타이의 최대 문화 왕조 아유타야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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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199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인에게 알려진 아유타야. 아유타야는 타이의 역대왕조 중에서 풍요로웠다고 전해지는 왕조 중에 하나다. 우통 왕이 1350년에 건국한 아유타야는 미얀마의 침략으로 1767년에 망할 때까지 417년간 유지되면서 흥망성쇠의 시간을 갖는다. 오늘날 타이의 대표적인 문화로 알려진 불교도 이때 찬란한 꽃을 피운다. 

문화를 꽃피운다는 것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유타야는 확장정책을 통해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꾸준히 통합하면서 경제적인 규모를 키웠다. 
 
타이(태국)는 지금도 베트남에 이어 세계 3위 쌀 수출국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기후와 지리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먹거리가 풍부했던 아유타야는 백성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내치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고 넘치는 쌀은 중국과 여러 섬 지역으로 수출을 하여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타이는 1516년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시작한 이래로 방문했던 포르투갈 인에 의해 ‘세계 무역의 중심지’라고 불렸을 정도로 왕성한 교역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지역의 특성상 유럽과 아프리카, 아라비아, 인도에서 오는 교역 물자와 조선, 중국, 유구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지역과 주변국에서 오는 교역물자가 모이는 위치였다. 이런 지리적인 장점을 활용해 정부가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에 가장 번성했던 크메르의 문화를 비롯해 중국과 인도, 아라비아, 유럽의 요소가 결합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다.
 
특히 왕조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이념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사끄띠나’라는 계급체계를 확립했다. 불교에도 힘을 실었다. 이렇게 집중시킨 역량의 결집은 성장을 가져왔다. 특히 19개의 성곽 시설을 통해 외부의 침입과 공격을 막았다. 도시에는 5백여 곳에 이르는 사원이 있었고 각 사원마다 수많은 불상과 탑이 있었다. 주요 도로도 약 55km정도의 길이 포장되어 있을 정도로 세련돼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번성하는 아유타야의 풍요로움은 주변의 시샘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웃인 버마(미얀마)는 아유타야의 풍요를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결국 1767년에 대대적인 침공을 한 버마로 인해 아유타야는 잔인하게 유린당한다. 철저한 파괴를 위해 아유타야의 주요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지르는 것을 넘어 사원에 있던 수많은 불상의 머리를 잘라 지금까지도 당시의 참혹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불상의 얼굴에 치장된 귀금속을 가져가기위해 필요한 부분만 약탈했다는 것이다. 버마는 도시의 곳곳에 자리했던 아유타야의 풍요로움을 취하기 위해 모든 곳을 폐허로 만들었다. 아유타야의 대부분은 잔인하게 짓밟혔고 철저하게 파괴되어 폐허만 남았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포르투갈, 조선(섬라곡국(暹羅斛國)으로 알려짐)에까지 알려졌었던 아유타야의 태평성대와 풍요로운 영화는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 버렸다. 
 
훗날 타이의 다른 왕조는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방콕에 자리잡는다. 지금은 국제적인 대도시로 알려진 방콕과는 다르게 아유타야는 유적을 보러오는 관광객을 통해 명맥만 유지하는 도시가 되었다. 손상된 채 버려졌던 유적에 대해 타이정부는 1969년부터 공식적인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1976년에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야유타야는 역사공원으로 세상에 다시 알려진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타이정부는 유네스코가 기획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아유타야가 등재될 수 있도록 신청 했고 1991년에 유네스코는 아유타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풍요로움의 역사는 방콕에 바통을 넘겨주었지만 동서양의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한 역사 속의 도시 아유타야는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아유타야는 세계인들에게 태평성대의 찬란한 영화를 누리던 풍요로웠던 시절의 유적과 문명이 잔인하고 처참하게 짓밟힌 모습을 소리 없이 알려주고 있다. 영광과 상흔을 동시에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역사적인 장소로 자리를 잡은 아유타야. 찾는 이의 발길 닿는 곳마다 부(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아유타야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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