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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가졌던 무굴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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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가졌던 무굴제국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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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오늘날 인도는 중국을 인구로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국가다. 특히 젊은 인구가 많아 중국보다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경제성장에 대한 전망도 좋아 언젠가 인도가 전 세계 소비경제를 주도할 날이 올지 모른다.  

인도가 실제로 중국보다도 훨씬 높은 경제수준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무굴제국 시절이다. 기원전 마우리아 왕조(Mauryan Empire)이후 오랜 혼란을 겪던 인도 지역에 몽골의 후예인 티무르의 후손임을 강조하던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바부르(Bābur)’가 나타나 인도 북부에 ‘무굴’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무굴은 바부르의 아들인 ‘후마윤(Humāyūn)’ 때에 잠시 나라를 빼앗기지만 때를 기다리던 후마윤은 제2의 건국을 성공시킨다. 이후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를 이어받은 ‘악바르(Akbar)’는 내치를 통해 나라를 안정시킨다. 

내부안정에 성공한 악바르는 꾸준한 정복사업을 펼치며 인더스(Indus)와 갠지스(Ganges) 강 유역의 인도북부를 차지하며 무굴이 제국(Mughal Empire)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영토를 확보한다. 

악바르의 재위기간부터 시작된 무굴의 전성기와 함께 무굴은 꽤 오랜 시간동안 안정된 치세를 유지한다. 악바르의 아들로 ‘세계의 정복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자한기르(Jahangir)’도 무굴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뒤를 이은 ‘샤자한(Shah Jahan)’은 원래 아버지인 자한기르의 셋째로 태어나면서 황위를 이을 수 없었지만 형제들과의 세력다툼에서 형제를 제압하고 황제에 오른 후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드넓은 영토에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쳐 무굴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다.

샤자한의 통치력이 곳곳에 미치면서 안정적인 치세가 유지된 덕분에 무굴은 혼란을 겪던 이전 시절과는 수준이 다른 경제적 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당시의 다른 주변 나라처럼 농업위주의 국가였던 무굴은 악바르 때부터 농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지역별로 공동체조직을 만들도록 했다. 공동체에서 수확한 농산물과 수확량에 따라 세금을 줄여주거나 먹거리를 제공하면서 공동체 간 경쟁을 통해 생산의욕을 부추겼다. 

더불어 저수지를 여러 곳에 만들었다. 농지와 저수지를 연결시켜주는 관개수로를 만들어 저수지에 모인 물이 농지까지 잘 흘러들어 농사에 필요한 안정된 수(水)량을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버려진 땅을 개간해 농산물을 얻으면 일정기간 조세를 걷지 않아 농민들이 토지를 개간하도록 장려했다. 농업생산량 증대와 효율을 높이려는 정책이었다. 

이런 정책들은 시간이 갈수록 성과를 냈다. 새로 개간되는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자 개간에 뛰어드는 사람이 증가했다. 개간되는 농지가 많아질수록 농산물의 수확량도 증가하였다. 먹거리확보가 수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다. 

또 생산성과 부가가치가 높았던 목화, 사탕수수, 아편 등의 농산물에 대해 조세를 줄여 생산량이 증가하는 만큼 백성의 소득도 늘어나게 만들었다. 소득이 증대되자 감세로 줄었던 무굴정부의 조세도 다시 증가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무굴이 택했던 또 하나는 물자 교환에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악바르는 오랜 시간동안 주된 조세 방식이던 공납이나 공물을 줄이고 그 공백을 화폐로 대신하려고 했다. 악바르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화폐로 은화는 ‘루피(rupee)’를 사용했고 동화는 ‘댐(dam)’을 사용했다. 특히 무굴의 동화는 다른 국가나 지역과 다르게 구리의 순도를 95%이상으로 잘 유지해 가치가 높았다. 

악바르 때 1루피에 약 48댐 하던 교환비율이 자한기르 때에는 1루피에 28댐으로 동화의 가치가 꾸준히 상승하기도 했다. 화폐의 가치가 안정된 모습이 1700년대에 이르러서까지 유지되면서 무굴의 경제적인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 무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직물 제품이 잘 팔리면서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여건을 갖춘 당시 무굴의 경제규모와 체력은 독보적이었다. 악바르 때부터 시작된 정치적인 안정은 자한기르와 샤자한까지 유지되면서 경제적 도약마저 독보적이었다. 덕분에 전 세계 경제에서 자웅을 겨루던 중국 청을 누르고 최고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샤자한을 몰아내고 황제가 된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대 세계최고의 경제력을 가졌던 무굴의 찬란한 전성기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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