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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비단길의 시작을 만든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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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비단길의 시작을 만든 도시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4.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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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중국에는 구조고도(九朝古都)라고 불리는 도시가 있다. 중국역사에서 우리에게 흔히 ‘낙양’이라고 불리는 ‘뤄양(洛陽)’이다. 아홉 개 나라의 수도였다는 의미다. 

하(夏), 상(商), 주(周), 위(魏), 진(晉), 북위(北魏), 수(隋), 후량(後梁, 5대10국시대의 양梁), 한(漢)나라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거나 삼으려 했다. 

그 중에서 중국인들이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나라가 한(漢)이다. 중국인은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지은 시를 한시(漢詩)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한나라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왕망이 세운 신(新)을 무너뜨리고 한(漢)을 다시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뤄양을 수도로 정한다.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기준으로 이전의 한나라를 전한(前漢)이라고 하는데 전한의 수도는 지금의 시안(西安 이하 장안)이었다. 

전한 무제 때 장건을 보내 주변의 대월지와 오손과 연합하여 흉노세력을 몰아내게 된다. 이때 개척된 서역을 오가며 이뤄지던 교역은 동서양을 이어주는 무역이었다. 거리상으로만 약 6400km에 이르고 중간에 사막처럼 험난한 길들이 있어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따라 오가는 길의 거리는 1만km를 넘기기도 한다. 

이 길을 통해 한에서 만든 비단이 로마에까지 전해졌다고 해서 훗날 도이치의 학자인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는 무역로에 ‘실크로드(Silkroad)’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학계는 물론 일반적으로도 이 기나긴 무역로를 ‘비단길(Silkroad)’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비단길이 시작되는 곳은 당연히 무제(武帝)가 살던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이었으나 후한에 이르러 광무제(光武帝)때 수도가 된 뤄양까지 연장된다. 

뤄양은 비단길 동쪽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출발점이었지만 서쪽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종착점이 된다. 문물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문물의 밀집을 의미한다. 이는 시작을 위해 뤄양으로 문물을 가지고 오거나 종착으로 얻어진 문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스럽게 인구는 증가하였고 도시는 성장했다. 이는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 일대에 영향을 주었다. 부(富)의 시발점이었다. 

사방에서 모인 상인들은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시세에 따라 사고팔아 이익을 남겼다. 구하기 어렵고 쓰임이 많을수록 수요와 공급에 의해 비싸게 거래되기 때문에 구입가격보다 판매가격이 높아 이익은 커졌고 부를 쌓아가는 상인들이 늘었다. 또 부를 가진 사람일수록 남들과의 차별된 모습을 갖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주변에서 구하지 못하는 값비싼 향료나 보석 같은 재화에 눈길을 두었다. 상인들도 부가가치가 높은 재화를 거래하기 위해 무역에 참여했다. 뤄양에서 거래되는 재화의 종류와 수가 많을수록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부(富)가 뤄양으로 모였다. 

뤄양은 한의 수도이면서 상거래가 이뤄지는 상업도시가 되었고 장안 못지않은 성장을 이루게 되면서 한(漢) 경제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잡는다. 서역의 상인들도 무역을 위해 뤄양으로 찾아오면서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된다. 뤄양이라는 도시가 부유해지면서 나라의 곳간도 차고 넘쳤다. 풍요로워지는 삶속에서 사람들은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종교적으로는 불교와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안정과 정신적 사치를 탐했고 학술과 문화를 탐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고 그들에 의해 학문과 저술활동이 활발이 이뤄졌다. 경제적 풍요가 학문과 문화의 성숙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중국 한족문화의 바탕이 된 것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얻고 축적한 부(富)를 단순하게 소비하지 않고 나라의 제도와 법령을 정비하고 학문을 발전시켜 문화의 성숙도를 증가시키다보니 역량이 커지면서 주변의 다른 민족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 수 있었다. 축적된 부로 이뤄낸 문화의 힘은 왕조를 넘어 한족(漢族)이라는 동질감이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물론 오늘날 중국이 가진 중화(中華)라는 오만함을 낳기도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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