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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대제국의 젖줄을 만든 종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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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대제국의 젖줄을 만든 종이돈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29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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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1298년 즈음 베네치아 출신의 한 남성이 포로로 잡혀 제노바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포로로 잡힌 남성이 감옥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시람 중에는 루스띠껠로 다 피사(ustichello da Pisa)가 있었다.

시인으로 활동하였던 그는 1280년 전후로 소설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루스띠켈로와 그는 친해졌다. 그는 자신이 멀리 중국에 있는 몽골까지 여행을 했었고 긴 시간 다양한 지역을 거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과 들었던 이야기들을 루스띠껠로와 나눴다. 루스티껠로는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루스티껠로는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모아 글로 남겨 출판을 하게 된다. 그 책의 제목은 ‘백만 가지 이야기’ 우리는 이 책을 흔히 ‘동방견문록’이라고 부른다. 루스띠껠로에게 자신이 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였던 동양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지팡구(Zipangu)’라는 명칭은 훗날 재팬(Japan)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할 정도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중에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의 경제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내용이 있다. 몽골은 금속으로 만든 돈의 사용을 금했다. 대신 거래에서 종이로 만든 돈을 사용하도록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교초(交鈔)’라고 부른다. 

드넓은 제국을 경영해야 했던 몽골로써는 금속으로 만든 돈이 굉장히 불편했다. 드넓은 대륙을 다니는 상인들에게 물건 값을 치르기 위한 금속화폐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금속돈과 종이돈을 병행 사용했던 이전의 나라들과는 다르게 이동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몽골제국은 종이로 만든 돈만 사용하도록 했다. 금속화폐의 사용이 일반적이었던 유럽인 입장에서는 글자가 적힌 종이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은 물론 진주, 보석처럼 귀중품까지 거래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몽골의 영향력아래 있었던 많은 지역이 교초를 사용하다보니 고려에서도 사용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몽골의 또 다른 세력이었던 일한국(칭기즈 칸이 죽은 뒤 네 왕자에게 분봉한 네 개의 국가 중 하나)에도 영향을 주었다. 짧았지만 서아시아 최초의 종이돈으로 알려진 ‘챠브’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몽골의 방식은 동방견문록이외에 피렌체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골로티(Francesco Balducci Pegolotti)가 북아프리카, 아시아와의 교역을 위해 쓴 ‘Practica della mercatura(통상지남)’에서도 볼 수 있고 이븐 바투타(Ibn Battuta)가 남긴 ‘리흘라(Rihla)’라는 여행기에서도 교초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면서 종이돈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교초를 받기 거부하거나 위조하면 형벌을 주었다. 교초는 광활한 지역에서 거둬들인 몽골의 부가 유지되는데 기여하는 중심축이었다. 여러 지역의 정벌로 소요되는 군사비지출을 비롯한 대제국을 경영하는데 들어가는 각종경비로 인해 교초가 남발되어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몽골은 소금 전매권을 유지하면서 교초를 소금과 태환이 되도록 하였다. 소금으로 교초의 가치를 보전해주면서 시장에서 가치의 폭락을 막을 수 있었고 신용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유통방식은 후대에 건국된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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