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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떠도는 富] 비극의 씨앗 된 일본의 은(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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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떠도는 富] 비극의 씨앗 된 일본의 은(銀)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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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세계 역사에서 은(銀)이 차지하는 역할은 절대적이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볼리비아의 포토다. 채굴양이 엄청나다보니 은을 채굴하기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한정적인 시간에 많은 은을 채굴해야했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이려면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의 희생이 있었다. 

모인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된다. 세계사에 길이 남은 포토시가 있다면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서도 이런 역할을 한 곳이 있다. 바로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이다. 

이와미 은광은 지금의 시마네현(島根縣) 오다시(大田)에 있는 은광 유적으로 사업성이 떨어져 1943년에 폐광된 곳이다. 일본이 가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하나로, 외부 침입으로부터 은광을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 은을 채굴하던 사람들의 거주지와 그들이 다니던 사원, 항구까지 14곳의 유적이 2007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와미 은광은 무로마치(室町)시대 말기인 1526년부터 채굴을 시작, 이후 전국(戰國)시대를 거쳐 도쿠가와(德川)가문의 에도(江戸) 초까지 일본 내 은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채굴된 은(銀) 원석을 통해 오우치가문은 막대한 부(富)를 쌓게 된다. 더군다나 조선에서 전해진 은 추출 방법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같은 양의 원석에서 더 많은 은을 추출하게 되었고 이는 은광을 차지하려는 주변세력의 욕심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당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던 시기로 일본열도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전국시대로 가는 길목에 있던 상황이었다. 세력을 키워야했던 주변의 영주들에게 이와미 은광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와미 은광을 탐낸 곳은 아마고 가문이었다. 1537년에 바로 옆 동네인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츠네히사(尼子経久)는 시기를 보던 중 ‘이즈모의 늑대’라는 별명답게 오우치 요시오키가 영지를 비운 틈을 노리고 쳐들어와 광산을 점령한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한 오우치가문은 2년 후에 은광을 탈환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마고 가문은 2년 후 다시 쳐들어와 은광을 점령한다. 

이들의 다툼을 끝낸 것은 모리가문이었다. 모리가문의 영주였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는 전통강호 오우치가문과 신흥강호 아마고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겨우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세력의 균형이 깨지는 시류의 흐름을 잘 타면서 1561년에 두 가문을 모두 평정하고 주고쿠지방(中国地方)의 새로운 패자가 된다. 당연히 은광도 모리가문의 것이 된다. 

모리가문은 이후 20여 년간 은광에서 나오는 은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주변지역까지 발전하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패자가 된다. 당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맞설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와미 은광에서 나오는 부(富)의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戰國)을 통일하면서 그의 압력에 의해 이와미 은광은 도요토미 가문과 모리가문의 공동소유로 바뀌게 된다. 

은을 통한 부가 쌓이자 도요토미는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다량의 조총을 구입한다. 조총은 일본 내부에서 계속되던 반란을 잠재우는 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결국 내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선택된 바깥, 조선으로 총구가 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일본의 은이 비극의 씨앗이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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