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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우리는 자유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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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우리는 자유인인가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0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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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우리의 역사에도 그리스나 로마처럼 노예(노비)가 있었다. 노비에 대한 언급은 고조선 8조법에 이미 등장한다. 신분제국가였던 조선과 고려 때도 당연히 노비가 있었다. 농업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력이므로 고려 초기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땅에서 생산물을 얻기 위해 많은 사노비를 거느렸다. 
 
고려 광종(光宗)은 호족세력의 힘을 줄이고 조세를 내는 양인을 늘리고자 ‘노비안검법’을 만들지만 성종(成宗)은 ‘노비환천법’을 만들어 광종 때 양인이 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노비가 되게 했다. 

정종(靖宗)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만들어 노(奴, 사내종)와 비(婢, 계집종)가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어미를 소유한 주인의 노비가 되도록 했다. 양인과 천민의 결혼을 의미하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은 금지됐지만 농장이 대형화되면서 노동력이 필요했던 문벌귀족들은 나라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양인 남자와 비(婢)간의 혼인을 암묵적으로 이용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비(婢)를 소유한 자신들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 중 한 명이 천민이면 천민의 신분을 따르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관습을 말하는 것이다.

충렬왕(忠烈王) 때 이르러 잠시 노예제가 폐지되지만 충렬왕이 떠나자 다시 노예제를 환원시킨다. 문벌귀족과 불교사원은 이런 흐름을 이용해 비(婢)와 남자 양인 간의 결혼을 독려했고 이는 조세와 병역을 부담해야하는 남자 양인 수가 급감하는 원인이 된다. 

일천즉천과 양천교혼으로 노비가 양산되는 이런 상황으로 노비를 많이 거느린 불교사원과 권문세족의 영향력은 강해진다. 특히 권문세족은 사노비(私奴婢)를 활용해 사병(私兵)을 키웠고 국가권력을 위협하는 결과를 만든다. 고려 말에 이르러 권문세족의 힘이 커지면서 국가의 힘이 줄어드는 상황은 조선 개국으로 양상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이후에도 꽤 오래 유지된다.

이런 문제로 고려가 무너진 것을 아는 조선은 노비 문제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지만 개국한 나라에 정치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동조세력이 필요했던 조선은 기득권의 근간이 되는 노비제의 변화를 주는 것에 신중했다. 

태종 이후에는 일천즉천을 기반으로는 하되 종부법과 종모법을 상황에 따라 번갈아 적용했다. 종부법은 신분을 아비를 따르는 것으로 비(婢)와 남자 양인이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을 말하고 종모법은 노(奴)와 여자 양인이 아이를 낳으면 어미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사대부들은 상황에 따라 양천교혼을 이용해 재산을 늘렸다. 

고려의 여러 관습은 조선에서도 사대부들의 재산유지를 위해 유지된다. 다만 권리가 신장된다. 법적으로 노비도 다른 양인이나 사대부와 소송이 가능했으며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상속도 가능했다. 

성종 16년경 나라에서 구휼미를 내릴 정도로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충청도 진천현에서 ‘임복’이라는 노비가 백성의 구휼을 위해 써달라고 삼천석의 쌀을 나라에 바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소유하던 재산의 규모도 컸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드믄 사례로 이후에 임복이 면천을 받자 많은 노비들이 나라에 쌀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노비는 신분이었을 뿐 경제적인 제약은 없었다. 

물론 이 같은 경우는 외거노비의 경우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주인집에 살면서 허드렛일부터 농사까지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런 노비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지지만 노비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수탈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노비가 없어져야했던 일제로서는 당연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광복과 산업화로 국가가 발전하면서 농업의 영향력은 줄고 현대판 노비의 일종인 소작농도 줄었다. 

신분제는 사라졌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날 대부분의 국민은 또 다른 의미의 노비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바로 소비의 노비다. 우리는 꾸준히 소비 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노예처럼 살아간다.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이 또한 프레임만 바꾼 노비다. 더구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점점 사라지고, 종속관계는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노비는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쯤 자유롭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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