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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홍삼이 만든 거상(巨商)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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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홍삼이 만든 거상(巨商)의 출현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14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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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1779년(정조 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아버지 임봉핵(林鳳翮)은 상업에 종사하며 북경을 오갔고, 그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의주에 터를 잡고 상업에 종사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상업에 눈을 뜨게 된 소년은 부친으로부터 중국어도 조금 배웠다. 어린 나이에 허드렛일을 하며 상단에서 일을 배운 소년은 훗날 조선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낸 거상이 된다. 그의 이름은 임상옥(林尙沃)이다.  

당시 청나라와 교역은 의주를 통해서 가능했다. 조선에서 청, 왜와 교역하면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했던 것은 단연 홍삼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백삼보다는 홍삼의 인기가 좋았다. 홍삼은 포기할 수 없는 재화의 샘물이었다. 이에 정조는 1797년(정조21)에 홍삼 무역을 공식화한 ‘포삼제(包蔘制)’를 실시하고 역관과 경상(한성상인)이 조선 내 인삼전매권과 홍삼 무역권을 갖도록 했다. 

청나라를 오가던 역관들을 통해 홍삼의 인기를 알고 있던 조선의 조정은 한강변에 증포소를 설치한다. 한성에서 만들어지는 홍삼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의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의주의 만상(灣商, 의주 상인을 부르던 호칭. 의주를 용만(龍灣)으로 불렀던 데에서 유래)과 힘든 일은 담당하던 의주의 군관에게도 홍삼 무역권이 주어졌다.  

1810년(순조10)에 한성 증포소 위치를 개성으로 옮기면서 홍삼 무역은 급격히 성장하였다. 포삼제를 실시하던 초기에 홍삼 수출량은 120근이었지만 50여 년이 지난 1851년(철종 2)에는 수출량이 4만 근까지 증가한다. 역관들의 삶을 위해 시작된 포삼제로 홍삼은 만상의 최고 상품이 되었고, 송상은 홍삼을 만드는 생산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포삼세는 국가 재정을 채우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정에서는 포삼제로 거둔 세금이 약 20만 냥이었다. 만상과 송상은 추가로 홍삼을 몰래 재배해 밀무역을 감행하기도 했다.  

1796년(정조20) 임상옥은 상단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이후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종경의 마음을 얻어 포삼 무역을 10년간 독점한다. 만상이 독점하게 된 홍삼 무역권을 임상옥이 독점하면서 모든 홍상 교역은 임상옥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후 임상옥은 30대에 만상의 우두머리에 올랐다. 임상옥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만 70여 명이었다. 

청나라를 오가는 사신 일행이 올 때마다 각자 따로 상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찾아온 평양감사와 의주부윤의 일행 700여 명이 한 번에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을 갖출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고하니 임상옥이 홍삼 무역으로 얻은 부(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와 홍삼 무역 규모가 커진 이유로는 홍삼의 뛰어난 품질과 효능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청나라에 퍼져있던 아편을 해독하는데 조선의 홍삼이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홍삼의 거래량은 폭증했다. 청나라에서 찾는 사람이 많은 만큼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 홍삼을 확보하기 위해 밀무역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홍삼으로 부를 거머쥔 임상옥은 평소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심을 쓰고, 자선을 행한 게 알려져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군수가 된다. 임상옥이 이룬 부(富)가 거대했지만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사농공상의 최하위 계층이었기에 이는 엄청난 일이었다. 의주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도운 것이 조정에 알려져 1834년 구성부사(종3품)에 임명되지만 상인에게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비변사의 반대에 부딪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더 이상의 관직과 부(富)에 대한 욕심이 없어 1855년(철종 6)에 사망할 때까지 술과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집에는 상인도 많았지만 과객 또한 넘쳤다. 임상옥은 그들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어 걸인이 넘치면 빈민을 구제하는데 앞섰다. 임상옥이 이룬 부의 크기는 컸지만 오늘날까지 부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며 후세에 기려지고 있는 이유는 엄청난 부를 가졌음에도 자신이 모은 재산을 사람을 살리는 데 썼다는 점에서다. 시대적인 상황과 별개로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재벌에게는 볼 수 없는 모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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