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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홍콩의 성장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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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홍콩의 성장과 미래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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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잉글랜드는 전리품으로 얻은 ‘홍콩(香港)’ 섬과 ‘구룡(九龍)’ 반도(半島)일대를 새로운 식민지로 삼으며 자유무역항으로 지정했다. 홍콩은 중국무역을 위한 잉글랜드의 교두보였기에 USA와 오세아니아, 유럽을 중계하는 무역과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손색이 없었다. 

홍콩의 활용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잉글랜드는 ‘사회간접자본(SOC)’을 적극적으로 투입했다. 1887년 이후 간척사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67㎢의 땅을 넓히는가 하면 육상 교통에 필요한 도로와 다리를 비롯해 해상교통의 활성화를 위한 항만건설과 준설작업 등에도 많은 자본을 투입해 무역항에 알맞은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잉글랜드는 홍콩의 항만을 이용해 중국의 개항지에 대한 아편무역도 계속 유지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하며 신대륙에서 면화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잉글랜드는 중국산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는 중계 무역항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저렴한 인건비로 가격경쟁력이 있던 중국의 면직물도 함께 취급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게 된다. 모든 이익은 잉글랜드의 몫이었다. 

이후 일본과 조선도 순차적으로 개항을 하면서 홍콩의 역할은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의 거점으로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지리적인 장점은 무역항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자본이 움직이는 데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는 계기가 된다. 동아시아와 인도차이나,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자본으로 축적했고 무역과 관련한 자금을 중개하는 회사들이 설립되면서 홍콩은 무역항을 넘어 동아시아 금융 산업의 중심지로 주목받게 된다. 

1891년 세워진 홍콩의 증권거래소시장은 중계무역과 수출기업의 성장에 자본이 몰리면서 오늘날 홍콩 부(富)를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2020년을 기준으로 현재 시가총액으로는 세계 5위 규모이고 아시아에서는 상하이거래소와 도쿄거래소에 이어 3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잠시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잉글랜드가 다시 탈환하면서 홍콩의 제조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게 된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6.25전쟁으로 인해 전쟁 물자를 제외한 중계무역이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하지만 이는 홍콩이 변화하는 계기를 만든다. 중국의 공산화를 피해 많은 인구가 홍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는 노동력 증가로 이어져 상대적으로 비용이 감소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또 중국의 부호들이 홍콩으로 이동하면서 홍콩의 자본력이 커져 노동집약적 산업인 섬유산업이 홍콩에 자리를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홍콩의 공업화는 홍콩을 중계무역의 거점뿐만 아니라 수출산업을 통한 거시경제적인 이익과 부(富)를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들어 중동 정세의 불안으로 인해 전 세계가 겪은 석유 파동과 보호무역 확산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자 교역량이 줄어 홍콩의 경제가 잠시 주춤하지만 기존의 섬유, 플라스틱, 신발 같은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기술 집약형 산업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1978년 12월 18일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은 개혁, 개방을 선언하고 USA와 1979년 1월에 역사적인 공식 수교를 맺는다. 그 영향이 홍콩에도 미쳐 가까이에 있는 선전(深圳, 심천)시와 광둥(廣東,광동)성, 푸젠(福建, 복건)성과 경제협력을 시작한다. 홍콩의 기술과 자본이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만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홍콩은 동반성장을 이룬다. 

잉글랜드는 중국과의 외교적 실패로 홍콩을 돌려줘야 했지만 1997년 6월 30일. 홍콩이 중국으로 이양되기 전날까지 잉글랜드는 홍콩을 통해 많은 경제적 이익과 부(富)를 맛보았다. 홍콩의 중국 이양을 앞두고 공산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많은 자본과 기술을 가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1국 2체제를 유지하면서 홍콩은 최근까지도 아시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홍콩은 잉글랜드로부터 이식된 자본주의 DNA를 훌륭하게 지키고 있다. 그 과실을 이제는 중국도 즐기고 있다. 홍콩은 무역과 관련된 비즈니스와 해운, 금융과 관련된 은행과 투자업무, 부동산에 대한 권리 같은 자본시장 여건과 노동의 유연성이 높다. 또한 정부의 부정부패, 통화당국의 제어력 등을 수치화한 ‘경제자유 지수(Heritage Foundation's Index of Economic Freedom)’도 높아 경제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세계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노란 우산 시위’를 통해 중국 정부의 간섭을 비판하는 시위가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일었고 정치 분야의 민주화 요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아시아 금융시장에서의 홍콩의 지위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홍콩의 진출해 있는 세계적인 금융사들 중에는 싱가포르와 서울, 도쿄 등으로 일부 사업 분야를 이전하려는 분위기도 있다. 중국의 변두리 중에서도 변두리였던 홍콩과 구룡반도가 혼란스러웠던 역사 속에서 ‘동양의 진주’로 빛을 발했지만 또 다른 미래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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