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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중독이 불러온 부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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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중독이 불러온 부와 비극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01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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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셰익스피어의 명작 중 하나인 ‘햄릿’에 나오는 여주인공 오필리아의 모습을 그려낸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속에는 한 여인이 물속에 누워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필리아를 대신해서 모델이 된 여인은 당시 런던에 있던 예술가들의 뮤즈였던 ‘시달’이다.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하고 32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힘든 환경을 잊고자 과다복용한 아편이 문제였다. 그만큼 잉글랜드에서 아편은 구하기 쉬운 환각제였다.  

고대부터 진통제로 많이 사용되었던 아편은 18세기경부터는 환각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잉글랜드에서 아편중독에 의한 환각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지 않은 것은 더 많은 수의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는 또 다른 것에도 중독되어 있었다. 바로 중국산 차(Tea)다. 차에 들어있는 타닌과 카페인은 커피보다 많아 중독을 일으키기도 한다. 17세기 동인도회사(VOC)가 들여온 차를 마셨던 잉글랜드는 차 맛에 빠져 직접 교역을 하고자했다. 

1697년 중국 샤먼에서 차 교역을 처음 진행했다. 1704년 EIC(British East India Company)가 중국과 유일한 공식 무역항이던 광저우에서 340톤의 차를 거래하면서 공식거래가 시작되고 1717년부터는 늘어나는 차 수요에 맞춘 공급을 위해 정기적인 교역을 한다. 차 소비가 증가하면서 차를 마셔도 잔향이 남지 않는 특징이 있는 중국 자기의 소비도 동시에 늘었다.
 
잉글랜드에서 수입하던 차의 양은 1706년 3만5000파운드를 시작으로 1740년대에는 연평균 약 200만 파운드를 넘겼다. 잉글랜드가 중국에 파는 물건이 적은 상태에서 차 수입량의 가파른 성장세는 당시 국제교역에서 통용되던 은(銀) 사용량이 증가하며 잉글랜드가 보유한 은의 상당량 유출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나마 직교역이어서 중계무역으로 인한 추가비용이 없었던 것을 위안 삼을 뿐이다. 물량에서 알 수 있듯이 EIC가 1722년에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사용한 은의 56%는 차 때문일 정도였다. 1730년 이후에는 비율이 73%를 넘어서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도 잉글랜드가 구입하는 차와 자기는 꾸준했다. 

약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이어진 일방적인 교역으로 잉글랜드의 무역수지 적자는 누적되었다. EIC 중국지점은 1784년 부도 직전까지 몰리자 인도 총독에게 긴급자금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런 불균형은 의외의 상황에서 변화를 가져온다. 1765년 8월 12일에 서명된 알라하바드 조약으로 EIC는 무굴제국에게서 벵골, 오리사, 비하르 세 곳의 징세권을 양도받는다. 1772년 이후에 행정, 사법권마저 넘겨받는다. 이는 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해야함을 의미했다.

인도 통치를 시작한 초기에 인도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면직물이 잉글랜드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증기기관을 활용한 방직기계와 기술이 발전하며 생산량과 가격 경쟁력은 잉글랜드가 더 유리해졌다. 잉글랜드로 면직물을 수출했던 인도였지만 인도로 수입하는 물량이 더 많아지는 역전현상이 발생한다. 인도 농가 삶이 힘들어지자 EIC는 벵갈 지역에 특산물인 아편을 재배하도록 했다.

EIC는 1773년 벵갈 지역 아편의 전매권을 가지고 동남아지역의 각 상관과 무역업자들을 연계해 간접적으로 중국에 아편을 파는 구조를 만들었다.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EIC가 전면에 나서 아편을 거래했을 때 발생할 문제를 어느 정도 예감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1797년부터는 EIC가 생산에도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아편무역에 나서게 된다.

중국에서는 1729년부터 아편에 대해 제재를 가했다. 원래 EIC도 이런 조치에 따라 중국에 아편은 교역을 하지 않았고 밀무역에 관여하는 직원의 일탈도 허락하지 않았으나 인도 통치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EIC는 신사의 자존심보다 현실의 물질을 택하게 된다. 

중국은 아편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아편은 소량으로도 환각효과를 보기에 충분했다. 차보다 강한 중독성은 파급력도 빨랐다. 유입량이 증가하면서 아편의 가격도 싸져 황실은 물론 고위관료, 군인, 민간인까지 파고들어 여러 계층에 퍼진다. 이는 수요의 증가로 이어졌고 잉글랜드의 무역수지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조정에서 1798년 아편 밀수입과 거래를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지만 중독은 법마저 무시하게 만들었다. 1817~1833년까지 동인도회사가 중국에 수출해서 얻은 이익에서 아편과 그 외 품목 비율은 3:1일 정도였다. 

중국으로 들어왔던 은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아편은 단순한 무역의 불평등을 넘어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와 혼란까지 야기했다. 중국조정에서도 관리를 보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조정의 수뇌부까지 아편에 중독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 강력한 제재는 잉글랜드와의 무역마찰을 불러오며 두 나라 간 전쟁으로까지 확대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아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1839년 9월 4일 정오 무렵에 주고받는 서신으로 시작되는 아편전쟁은 계속되다가 1842년 8월 29일에 맺어진 난징조약으로 마무리된다. 잉글랜드인 소유 중국선박인 애로 (Arrow)호 사건으로 시작된 제2차 아편전쟁(1856년 10월 8일~1860년 10월 24일)까지 잉글랜드가 승리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홍콩(香港, HongKong)을 할양받기까지 한다. 

잉글랜드는 유해한 품목임을 알면서 수출을 했다.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을 이용해 전쟁까지 유발했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중독의 순서와 질적인 차이가 있지만 두 나라 모두 중독으로인해 부가 움직였던 역사를 보여준다. 인도의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시작된 아편재배와 수출은 인도통치자금 확보와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까지 해결하며 1석 2조의 효과와 함께 홍콩이라는 영토(교두보)까지  확보해 잉글랜드에게 막대한 부(富)를 안기게 된다. 

오늘날 ‘차’라는 음료와 ‘아편’이라는 마약의 경쟁이었다는 점에서 세인들은 ‘신사의 나라’ 잉글랜드의 비신사적인 행적을 언급한다.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부각될 때마다 잉글랜드는 아직도 국제사회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역사의 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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