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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융커-중세부터 근현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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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융커-중세부터 근현대까지
  • 이강희
  • 승인 2021.10.21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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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융커(Junker)는 ‘Jung(융, 젊다) und Herr(헤르, 주인)’나 ‘Juncherre’에서 파생된 존칭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 한자동맹의 영향력이 유지되던 북해와 발트해를 중심으로 북쪽 연안인 스칸디나비아지역과 남쪽 연안인 네덜란드와 프로이센, 넓게는 가까운 러시아 일부지역에서 젊은귀족이나 영주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됐다. 잉글랜드의 젠트리(Gentry), 프랑스의 부르주아(bourgeois)와 함께 귀족을 포함한 상류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다.

신성로마제국 시대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한 융커는 지금의 독일을 가로지르는 엘베 강의 동쪽 지역에서 주도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프로이센의 중심이었던 이곳은 서남부의 바덴이나 바이에른과 같은 중소 농민이 중심이 된 자영농과는 달리 대규모 농장이 형성돼 지주의 역할을 하는 영주가 많았다. 

이런 지역적인 특징은 지금의 북부 도이치를 중심으로 대규모 부(富)가 형성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자본력이 형성된 덕분이었을까? 장거리 교역에 앞장섰던 도시 귀족과 함께 이들의 자본력이 결합되면서 발트해를 중심으로 13~15세기까지 한자동맹이 번성했고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이 30년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진 30년 전쟁은 마무리되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1750년대까지 더딘 성장이 지속되며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후에 시작된 급속한 성장이 남부지방보다는 프로이센과 작센이 중심이 된 북부지방에 집중되었던 이유는 융커들의 대규모 자본에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북부지역 성장으로 더 큰 자본이 모이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부지역을 흡수, 도이치제국이 성립한다. 

융커 출신은 이름에 ‘von’을 사용하면서 주변과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지배층으로서 농장 경영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을 통치하는 여러 행정 기구 요직과 군의 고급 지휘관을 차지했다. 

프로이센 왕실도 이를 잘 활용했다. 융커는 강한 충성심을 보였기에 적당한 이익을 챙기는 정도는 못 본 체했다. 충성스런 융커 세력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들은 프로이센 왕실 유지에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었고, 국가 운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어 보·불전쟁을 치르며 융커의 기여도는 더욱 커졌고 승리와 함께 1871년 도이치 제국이 수립되면서 이들의 역할은 극대화 됐다.  

하지만 융커가 지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집중하다보니 도이치제국은 산업화가 진행되던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됐다.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젠트리와 부르주아처럼 융커의 대다수가 지주에서 자본가로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지배층으로서의 견고한 지위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던 지역의 부(富)를 빼앗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융커 농장의 생산량은 점차 줄어든다. 이들의 농장은 노동집약적인 상태를 유지했는데, 노동 가능 인구가 상공업이 활성화되던 도시지역으로 40% 이상 이탈했기 때문이다. 농산물 생산 감소를 기계화로 막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농작물 가격상승에 더해 아메리카의 저렴한 농산물이 치고 들어오자 융커는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한 높은 관세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바이마르와 나치 체제를 거치며 융커는 점차 몰락한다. 융커 출신이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산업화를 진행시키며 융커를 위한 제도가 아닌 프로이센과 작센을 중심으로 근로자를 위한 복지제도를 구축한다. 

그는 1880년대에 이미 오늘날 유럽복지의 근간을 이루는 노후연금, 사고보험, 의료복지, 실업보험 같은 제도를 도입하며 근로자의 지지를 받았다. 높은 급여 때문에 아메리카로 진출하던 기술자들도 복지 등의 이유로 감소했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높은 관세 정책으로 산업계 이윤과 숙련근로자 임금을 지켜주며 독일 산업이 성장하는데 역할을 한다. 이런 구도는 자유무역과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을 소외시켰지만, 오늘날 독일이 기술 경쟁력 1등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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