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조씨대종회, 조국(曺國)을 감히 조광조(趙光祖)와 비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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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대종회, 조국(曺國)을 감히 조광조(趙光祖)와 비교하지 말라!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20.03.2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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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曺國을 높이거나 비판하기 위해 위대한 개혁가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이용해...
- 한양조씨대종회, 趙光祖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 용납 못해...강력 경고!

[ 소비라이프 / 김소연 기자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후손들이 난리가 났다. 조국(曺國)을 감히 위대한 사상가 조광조(趙光祖)와 비교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특히, 조국을 폄하시키기 위해 조광조의 사상을 폄훼하거나 평가절하해 악용하는 행태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양조씨대종회(회장 조호원) 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조국을 폄하 시키기 위해 개혁사상가를 폄하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켜 평가 절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양조씨대종회(회장 조호원) 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조국을 폄하 시키기 위해 개혁사상가를 폄하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켜 평가 절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의 발단은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출마의 변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젊은 개혁 정치가 ‘조광조(趙光祖)를 조국과 비교하면서 부터다. 황 전 국장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조광조에, 윤석열 검찰총장을 조선 시대 간신 윤원형에 비유했다. 검찰개혁을 주창했던 조국을 치켜세우고, 조국 사태를 ‘검찰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언론에 본격적으로 회자됐다. 언론마다 필요에 따라 조국을 치켜세우거나 깍아내리고자, 조선시대 개혁 정치가인 조광조를 치켜세우거나, 폄하하는 글들을 쏱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양조씨대종회(회장 조호원)는 조국과 조광조를 동급으로 취급할 수 없는 인물이고, 동아일보 등의 컬럼에서 조국을 깍아내리기 위해, 위대한 선조 조광조를 폄하하는 컬럼을 게재한데 대해 심한 모욕감과 느낀다며 정정보도를 청구하고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대종회는 동아일보가 한 기자의 컬럼에서 "조국, 조광조가 개혁을 했다고?" 라는 제목하에 조광조가 개혁 인물이 아니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다른 평가를 했다' 라며, ‘사상과 표현과 착각은 자유다.’라며, 하지만, 개혁 사상가인 정암 趙光祖 선생을 曺國과 같은 인물로 매도했다는 것에 대해 심히 분개하고 있다. 

한양조씨인 조광조의 후손들은 “ 어찌 曺國을 고고하고 깨끗하고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았던 정암 선생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라며, 동아일보 등 역사의식을 문제 삼고 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시대 현량과를 신설하고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온 힘을 다한 것"에 대한 평가에서 현량과 신설의 목적이 세력을 키우려는 '얄팍한 술수'라고 평가하는 동아일보의  아전인수식 해석의 역사관이 문제라는 것으로, 정설을 무시하는 훼괘한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한양조씨 대종회는 “개혁이란 제도나 기구 따위의 낡거나 불합리한 점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고쳐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개혁을 이루기 위해 많은 賢人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같이 현량과의 신설은 당시 시대적 요구였다. 그것을 파당을 이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의 평가라는 것이다. 

또한, “ 기묘년 11월 11일 중종은 반정공신 117명 중 76명의 작위 삭탈을 결정했다. 그러자 다음날 조광조파의 대간들은 하사품까지 환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 환수된 집과 재물이 정의롭고 양심적인 정암 선생과 그를 따르는 개인들에게 돌아간 것처럼” 표현했는데, 이는 심각한 사자에 대한 모욕과 명예훼손으로 법정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광조의 죽음에 대한 부분도 중간은 생략하고 중종의 마지막 말만을 인용함으로써 중종이 정암 선생을 사사한 것” 으로 묘사했다며,. 이것 또한 역사의 기록적 사실이나, “중종의 결단이 있을 때까지 심정, 남곤 등의 훈구파들의 흉계” 는 왜? 모두 생략하였는가? 라며, 이에 대한 정암의 마음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고 밝혔다.

조호원 한양조씨 대종회장은 “ 曺國이 정암 선생의 개혁을 흉내내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암은 동방의 오현(5賢)으로서 왕을 설득하여 개혁을 하려했고, 실패해서 목숨까지 잃었다.”며, “조국과의 비교는 타당치 못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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