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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호] ‘SKY 캐슬’이 부모에게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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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호] ‘SKY 캐슬’이 부모에게 전하는 메시지
  • 고혜란 기자
  • 승인 2019.03.13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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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소비라이프 / 고혜란 기자] 최근 사교육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언뜻 이 드라마는 ‘좋은 집에 화려한 삶을 사는’, 말 그대로 나와는 ‘아주 먼’ 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패러디까지 나온 것은 입시지옥에 대한 공감 때문이 아닐까?

‘좋음’에 대한 인식 잘못돼
드라마가 던져 준 화두와 파장은 실로 크다. “대한민국은 입시지옥이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마음 한구석을 씁쓸하게 했던 반면, 한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열은 보다 가열될 것”이라는 역설적 효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교육열은 남 못지않으나 ‘입시코디네이터’를 몰랐던 학부모들이 드라마를 통해 ‘입시 컨설팅’이라는 사교육(?)을 알게 된 만큼, 불안감이 커져 입시 코디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거라는 해석도 나온다.

현재 한국의 교육 시장은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을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등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이나 방법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과, 본인의 ‘잘함’보다는 경쟁자의 ‘못함’을 살피는 경향도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받아쓰기’에 붙는 보상
책가방을 멘 모습만으로 감동을 선사했던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매주 ‘받아쓰기’라는 행사(?)를 치르게 된다. 이것은 교과 과정 중에 습득한 내용을 확인하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보통은 학기 초 배부 받은 인쇄물을 통해 편히 익힐 수 있다. 좀 더 신경을 쓰자면 부모와 함께 가(假) 시험을 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부모의 특정한 행동은 아이가 학습 태도를 설정해가는 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가령 “100점 맞으면 ‘이거’ 사 줄게~” 하는 식의 보상이다. 또는 “친구는 몇 점이야?” 하는 식의 비교 평가 또한 좋지 않다. “아직 초등학생에게 설마?” 하겠지만 학업 스트레스가 유달리 심한 아이들이 몇 년 전부터 살아온 방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옛말 하듯 하는 우리 역시 그랬는지 모른다.

친구, 벗일까? 경쟁자일까?
그런데 성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보상의 여부를 결정하는 양육 태도는 ‘배움’에서 흥미를 발견하기 어렵게 하고 친구에 대한 감정에도 결핍을 느끼게 만든다. 친구가 되기 전에 경쟁 상대로 인식되거나 비교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함께 지내는 시간이 쌓여가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게임기, 스마트폰이 친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우정이라는 것은 가까이 지내게 된 또래끼리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해가며 공감과 이해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생기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직 어린 아이들은 공부와는 상관없이 놀이 중심으로 친구 관계를 형성해가는 게 좋다. 경쟁보다 먼저 친구와의 사귐이 즐겁고, 그 즐거움이 학교 생활을 하는 데 활력을 줘야 초·중·고 최소 12년의 시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20세 전 가치관 확립 ‘중요’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고등학교 교과 과정까지 있어야 할,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교육은 총체적인 인성 내지는 가치관 교육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발달 과정의 특성상 20세가 되면 완전한 성인으로 주관이 뚜렷해지며, 성숙한 인간으로서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독립 의지 또한 마련된다.

그리고 이것은, 고등학교 3학년까지는 성숙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한 학습을 모두 마쳐야 한다는 의미와도 통하게 된다. 즉 사물에 대해 올바로 사고하는 방법, 대인 관계에서 타인과 올바른 의견 교환을 하고 대화를 하며 올바른 관계를 갖는 방법, 한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독립하며 살아가는 방법 등 바른 판단 의식이 20세 전에 이미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20세가 지나면 사람들은 누구나 성인이 되어 자의식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사람은 20세가 되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비교적 옳은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세가 넘은 자녀의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세대나 사회 계층 사이에서의 가치관 충돌이 심한 것은 어쩌면 교육과정에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학습돼야만 했을 가치관 교육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치관 교육이 등한시된다는 것은 창의력이나 사고력은 무시한 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암기력만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암기 위주의 교육은 생각하는 방법을 길러줄 수 없다. 자녀가 보다 안정된 사회에서 더욱 높은 단계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길 바라는가? 대학이나 직장에서의 생활에서 뿐만이 아닌 전반적인 삶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스무 살 즈음 ‘입시’에 맞춰진 스케줄을 쫓게 하기보다는 살아가는 내내 ‘행복’을 향유할 수 있도록 조금은 멀리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공부는 자기 이해의 과정”
18세기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밀(J.S. Mill)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 흔히 보이는 ‘온정적 간섭주의’을 꼬집었다. 온정적 간섭주의란 부모가 아직 성숙하지 않아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는 미성년 자녀의 법적, 비법적인 결정을 대신하며 돌보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말한다. 이는 보통 “너를 위해서야”라거나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다”라는 대화의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밀의 입장에 따르면 아이들의 경우에도 자신에게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인 줄 안다. 따라서 부모의 역할은 위험에 대한 인식이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아주 어린 경우에만 ‘위험’을 알림으로써 그 행동을 그만두도록 ‘보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내내 즐거움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생활을 주도해 가는 것이 오롯이 스스로의 몫일 때 행복한 삶 역시 가능해질 것이다.

공부에는 각기 다른 때가 존재
당위성이란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성질을 말한다. 당위성이 전제된 일에는 열정을 갖기도 쉬워 해나가기도 수월하고, 이루고 난 뒤 성취감 역시 비교적 크다. 그리고 이것은 공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말하자면 학생들도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섰을 때 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위성은 ‘그저 부모님이 원하니까’, ‘부모님이 좋아하니까’, ‘남들이 다 하니까’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조금 늦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며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이 살아가는 내내 지속될 경우 행복할 것 같은 판단이 확실해지면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당위성이 초등학생 시절, 혹은 늦어봐야 중학교 때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공부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나 그 ‘때’란 누구에게나 같은 시점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이른 학창시절일 수 있으나 또 어떤 사람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때를 맞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은 스무 살이 훌쩍 넘어, 중년이나 노년에 찾아오기도 한다. 공부에도 저마다의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 아닌 ‘행복’ 알려줘야
그래도 자녀가 이왕이면 일찍 당위성을 찾아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는가? 또한 정말 자녀가 ‘스스로를 위해’ 공부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사회적인 분위기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 것’들에 기준을 두고 비싼 사교육비를 지불하기보다는 자녀가 스스로 찾아 구체화 시켜갈 ‘행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부모가 대신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자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게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하고, 본인의 욕망을 따라 스스로가 실현해 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를 위해서야’라는 백 번의 말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결국 자녀는 부모인 당신의 모습을 쫓아 닮아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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