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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지주 사태의 교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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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지주 사태의 교훈은 무엇인가?
  • 소비라이프뉴스
  • 승인 2011.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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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행은 어떻게 설립되었나. 신한지주의 뿌리를 아는 건 현 사태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하다. 신한은행은 1982년 7월 7일에 설립됐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라응찬 前회장일 것이다. 신한지주의 신상훈 사장을 몰아내고 라응찬 회장과 이백순 행장이 체제 강화를 노린 것이다.
<특별취재팀>

5공화국이 만들어낸 ‘신한’
일반인들이 신한지주㈜의 사태를 신한은행의 사태로 인식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설립된 신한지주의 모체는 신한은행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 3인도 신한은행의 전현직 행장이다. 신한지주의 중심회사가 신한은행이므로 신한은행이 회자되는 게 어색한 일만은 아니다.
그러면 신한은행은 어떻게 설립되었나. 신한지주의 뿌리를 아는 건 현 사태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하다. 신한은행은 1982년 7월 7일에 설립됐다. 5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 4개월 가량이 흐른 시기였다. 당시 경제사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군사정권이 들어서다 보니 국제적 이미지도 말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은 금융산업을 통한 자금유치의 한 방법으로 해외교포의 자금을 유치하게 된다. 5공화국은 애국심을 내세우며 재일교포들에게 신한은행 설립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고 재미교포들에게는 한미은행을 설립 인가를 내주면서 외화를 국내에 유입한다. 두 은행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되게 된다.
그 뒤 신한은행은 일본의 마을금고나 상호은행의 영업행태를 도입해 우리나라의 낙후된 은행영업형태를 바꾸면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은행 중심의 금융서비스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그 시절 국내 고객들은 일본식 영업형태의 친절한 서비스에 반색하면서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이후 신한은행은 성장가도를 달린다. 신한은행의 인사관리도 일본식 방법을 벤치마킹했다. 기존 은행들 직원 가운데 스펙이 약해 장래가 그리 밝지 않지만 헝그리 정신이 투철하고 도전적인 성향이 강한 경력직원을 채용했다. 또한 기존 은행보다 30%이상 웃도는 급여를 주며 다른 회사의 직원에 비해 더 큰 충성근무를 요구했다. 이들은 발로 뛰는 영업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러한 조직문화는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이 신한은행이 기존 은행을 제치고 선두로 부상한 주요인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게 한미은행이다. 한미은행은 재미교포를 중심으로 출범했다. 재일교포 중심 신한은행의 일본식 경영형태, 집단주주 형태의 대리인을 내세운 적극적 경영권 개입과는 달리, 한미은행은 미국식 경영 및 개인주의 경영참여 등을 모델로 삼았다. 한미은행은 결국 구심적이 약해져 큰 존재감 없이 시티은행에 합병됨으로써 사라지게 됐다.

 대리인에서 황제총수로 군림
이번 사태의 핵심은 라응찬 회장(최근 사퇴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회장’으로 기술)일 것이다. 신한지주의 신상훈 사장을 몰아내고 라응찬 회장과 이백순 행장이 체제 강화를 노린 것이다. 라응찬 회장은 1982년 신한은행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근 30년간을 핵심임원을 비롯 핵심 대리인으로 출발하면서 신한은행의 ‘주군’역할을 했다. 재벌의 회장에 가까운 확고한 위치에 선 이후 라 회장의 마음속에서는 권좌를 내려오겠다는 생각이 점차 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라회장의 이력에서 이와 같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라회장은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농협, 대구은행을 거쳐 신한은행 설립 때 상무로 출발, 1991년 행장에 취임하고 이로부터 8년간 행장을 역임한다. 퇴임후 은퇴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신한지주라는 지주회사를 준비, 발족하며 회장에 취임한다. 최근까지 명실공히 금융계열사를 더 일사분란하게 지배하는 회장자리를 차지함으로 대리인에서 재벌총수로의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여기에는 그전까지 재일교포 주주의 대표역할을 하며, 명예회장으로 있던 이희건씨의 역할 축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재일교포들은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각자 갖고 있는 지분을 이희건 명예회장에 대표권을 부여하는 형식, 혹은 다른 대표의 위임 혹은 대표성 있는 인물에 부여하는 형태로 지금까지 신한지주 경영에 깊은 영향권을 행사해 오고 있다. 이는 이번 사태 관련 적극 개입하고 있는 교포 사외이사들의 활동, 관계된 3인들이 재일교포와 사외이사를 상대로 앞다퉈 만나며 지원을 받으려는데서도 잘 증명되고 있다.
이번 고소 고발 사건의 내용 중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를 횡령했다는 서로의 주장은 명예회장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런 힘이 대리인에 넘어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가관인 것은 고소인 측의 이백순 행장은 고발내용 중 이희건 명예회장에게 지급될 15억원의 자문료를 신상훈 사장이 횡령했다는 주장에 신상훈 사장은 적법하게 처리했고 도리어 그 자금중 2억원은 라응찬 회장의 변호사비로 사용됐고 3억원은 이백순 행장이 가져갔다고 역공을 피는 것에서도 명예회장의 위상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3인이 명예회장의 이름으로 자금을 확보,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로비 등의 자금으로 쓰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신한은행의 급성장 이유는 로비?
신한은행의 급성장은 관치금융이 판치는 상황에서 오는 국내은행 산업의 낙후를 배경으로 한다. 신한은행은 타 은행과 달리 관치의 화살을 피하면서 관료적이고 비서비스적인 마인드 영업형태를 선진영업형태를 선보이며 금융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금융시장의 개방화 단계에서 시장의 변화에 적절한 대응이 요구되는 자율적 상황에서 그 당시 조흥, 상업, 한일, 제일,서울 등 5대 시중은행은 관치의 관성을 벗지못해 시장적응에 실패했다. 급기야 이들 은행은 IMF라는 태풍을 맞으면서 쓰러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신한은행 및 관련회사는 상대적으로 견실하고 좋은 이미지를 활용해 부실한 조흥은행, 동화은행, 굿모닝 증권 등 덩치 큰 관련회사를 인수하면서 급격히 규모를 키우게 된다. 오랫동안 선두를 지켜오던 기존 5대은행이 사라진 자리에 신한은행이 터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수에는 외부의 보이지 않은 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라회장, 신사장, 이행장은 이와 관련해 서로간에 알고 있는 비밀도 많을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신한사태의 전개에 따라서는 아직 터지지 않은 지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응찬 회장은 1938년 경북 상주 출신이다. 라회장은 이른바 ‘TK 계열’로 상촌회 멤버로도 알려졌다. 항간에는 영포라인의 도움을 받았느니 하는 소문도 떠돌고 있다. 신한은행내에서도 TK출신이 중심을 이뤄오던중 호남출신의 신상훈 사장이 행장으로 6년간 재임하면서 그동안 움추렸던 호남출신도 과거보다 활발해졌다는 후문이다. 내부에서도 후임 회장은 신사장, 그 다음은 이백순 행장일 것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있는 상태에서 이번 진흙탕 싸움은 벌어졌다. 이번에 라회장, 이행장이 한 편이 되어 신사장의 사임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30년지기끼리 고소하는 사이로 싸움이 커졌다. 아마도 우리나라 기업 혹은 금융사상 보기드문 저급의 행태로 기록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로써 금융소비자를 비롯해  정부, 기업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사무라이 경영’의 종말과 3인의 ‘뒤끝’
라회장은 올해 우리나이로 73세로 농협과 대구은행을 거쳐 신한금융그룹에서 30년가까이 근무하며 우리나라의 금융사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는 모래성이 되고 말았다. 금융권에 미친 파장이 큰 터라 라회장은 추락했지만 세간 여론은 쉬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번 신한사태는 라회장이 그동안 해온 경영의 허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목소리도 높다. 더욱이 내부적으로 장기 일인 집권의 폐해, 30년 가까운 사무라이 경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아 신한을 아꼈던 지지자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소비자들은 씁쓸하다.
신상훈 사장은 군산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을 거쳐 신한은행에 입사했다. 신사장은 인맥을 형성하는데 힘썼다. 이를 통해 형성된 마당 발을 이용해 호남출신의 한계를 넘어 라회장옆으로 가게 된다. 아마도 라회장의 측근이 되기까지는 라회장에 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폭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로비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주위의 애기이고 보면 그동안 라회장을 보필하는 능력과 그로 인해 라회장으로부터 얻은 도움이 컸다고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계들이 이번 사태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이백순 행장은 덕수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을 거쳐 신한은행에 입사했다. 라회장의 비서실장, 라회장이 지주사 회장으로 있을 때 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능력보다는 충성심을 무기로 라회장을 지근에서 보좌해온 심복이라 볼 수 있다. 이번 사태의 행동대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고 결과에 따라서는 마지막 보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어오던 그들이 2인이 한 편이 되어 1인을 내치는 형국에서 3인의 공통점은 상고를 졸업하고 최고의 금융회사로 인식되는 회사의 CEO가 되었다는 입지전적인 이력이다. 누구보다도 끈끈한 관계를 형성해 오면서 마지막 단계의 권좌를 앞두고서는 서로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됐다. 또 내부적으로 이들 3인은 자신의 자녀를 신한은행에 입사시키며 제2의 자기를 만들고 싶은 꿈을 가졌던 것 같다. 라회장은 D대를 졸업한 아들을 입사시켜 고속승진시키다가 최근 퇴직시킨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하면 박연차 사건과 관련 50억원의 차명거래가 문제가 되면서 라회장의 또 다른 아들을 박연차씨 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나타나 라회장과 박연차회장의 관계도 새롭게 부각되기도 했다. 또한 신사훈 사장은 아들은 IB요원으로 선발하여 근무시켜 왔다. 이백순 행장 역시 딸이 근무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태로 세 아버지들이 가슴에 품고있던 2세 경영의 꿈은 날아가는 듯 하다. 현재의 공정사회 구현이라는 목소리와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번 문제는 주인없는 기업에서 대리인이 주인이라고 서로 싸우는 형국이다. 30여년간 그들만의 리그를 꿈꾼자들의 내면, 권모술수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행태였음을 보는 것 같다는 관전평이 많다. 여지껏 그들의 목소리에 장단을 맞춘 직원의 꿈을 날아 보낸 사건이다. 사실 이번의 사태로 직원들의 배신감과 마음의 상처는 말할 수 없다. 한 직장인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위해 벌이는 금융CEO들의 상식 이하적인 행동을 보면서 추한 금융인들의 권모술수가 퇴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신한은행에 합병당한 조흥은행출신 K씨는 “우리가 이런 수준에 당했느냐”며 허탈해 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추태가 벌어진데는 일인의 야욕과 꾸준히 이 때를 대비한 자들의 야욕, 금융사 특히 은행의 최고 경영자 실상, 감독당국의 관리 문제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 동안 모범적인 금융합병 사례로 회자되온 신한지주의 사태는 바로 우리 금융의 허상과 수준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이번 기회에 문제점들을 확실히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이런 수준의 금융지배구조와 이를 경영하는 자들의 능력과 도덕성은 금융소비자, 기업, 국가를 암울하게 하는 것이다.

2005년에도 지주사 사장 내쫓아
무엇보다 주인의 구조가 불명확한 기업구조에서 기업운영의 맹점, 경영자의 도덕적 윤리부재속에 특히 은행중심의 지주회사의 경우 임기도 없고 제어할 수 없는 권력으로 현직자에게 유리한 구조로 된 것을 십분활용케 한 것이다.
라회장은 사외이사 등을 자기인물을 중심으로 채워 쉽게 유지하여 온 듯하고 2005년 당시 최영휘라는 지주사 사장을 명색이 최고금융기관이라는 회사에서 구멍가게 운영하듯이 내쫓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는 지금 3인이 한편으로 몰아내는데 힘을 합했다. 그때에 왜 벌어졌는지 리뷰도 없었고 교훈이 없었던 관계로 3인이 이번 사태도 안이하게 본 듯하다. 한편으로 이사회는 이번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추천자의 눈치를 보는게 아닌지를 의심케 하기도 했다.
이런 점이 아마도 라회장과 이행장이 지주사 사장을 두번째 내치려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마도 최소한 자신들의 경영지배는 어떤 형태로든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기저에 두고 실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외이사나 직원, 주주들이 자신의 편이고 둘 중의 한 명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 후에는 수렴청정도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이러한 큰 사고를 친 것은 아닌가 한다. 향후 이런 금융지배구조를 개선시키기 위해  사회이사의 제도개선, 지주사 임원의 임기 개선, 지주사 사장의 말을 듣지 않는 자회사 사장(은행장)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에서 보듯 자회사와의 관계 설정 등의 지배구조 개선 전반을 재모색해야 할 과제를 남겼다.
다음으로 이번 사태를 처리하면서 금융부패를 척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금융권력을 누리고 황제로 군림하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이번 국감중에 신한인사의 국감출석 문제가 이슈화되는 등 정치권력과 친밀하게 인식된 점도 있었다. 금융권력이 정치권과 유착되고 지역주의 연계 의심, 비자금 문제 등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한번 이번 사건은 금융권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로 깊이 있고 철저히, 기한없이 장기적으로 다시 한번 파헤쳐 올바른 금융백서가 나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금융당국 감독 기능도 점검해야
세번 째로 이번 사건은 감독당국의 독자적 판단력이 있는지, 관료적 성향, 경직성이 과연 첨단 산업이라는 금융산업을 감독할 수 있는 모습이 있었는지를 의심케하기에 충분했다.
라회장의 연임은 문제의 제기가 어떤 경로로 문제되었든 간에 라회장의 연임은 감독원 입장에서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시장의 반응도 그러했음에도 금감원은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감독원은 이제라도 왜 이런 처리를 했는지 내부적으로 명명백백하게 조사하고 밝혀내지 않으면 감독당국의 독립성 확보는 먼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감독당국으로서의 진실한 조사와 반성을 통해 낙후된 금융산업을 어떻게 도약시켜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연구해야 한다. 이 사건과는 별개로 최근 제기되고 있는 감독원의 여러문제를 되새겨 보고 명실상부한 독립체로서 진정한 금융산업의 발전적 비전을 제대로 품는 방안을 세워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태에 관련해 시장은 관치로 갈 것인가도 관심사다. 관치에 문제도 상당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치가 외부인사를 지원하는 것이 관치일 수 있으나 절제된 관치는 올바른 인물들이 선택되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내부인물이 선정 안됐다고 관치는 아니고 세련된 관여로 줏대있게 시그널은 줄 필요가 있다.
현재의 신한지주 이사회에서 임원의 임명은 내부 파벌의 준동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감춰져 있고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파벌이 이 사건을 계기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7일 류시열 신한금융 회장 직무대행은 “직위를 이용해 편을 나누는 일이 없어야 하고 정과 친소관계를 이용하여 그릇된 충성심을 강요하지 말라”고 부서장들에게 경고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현재도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사태의 여파는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지배구조가 임시적으로 봉합되고 연장된다면 금융소비자들의 피해는 막대할 것이다. 금융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라회장, 신사장, 이행장 등 3인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특혜를 보는 구조에서 벗어나고 왜곡된 재일교포의 경영간섭 형태에서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번을 계기로 올바른 인물들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외부인물의 수혈 등 발전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다. 특히 이번의 신한사태는 ‘건실한 경영’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윗물이 고아야한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대목으로 ‘윗물’을 바꿔야 깨끗한 나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해 준다. 어떻게 보면 신한사태는 우리 금융권이 안고 있는 치부의 한단면일지 모른다. 하루빨리 금융산업의 환부를 도려내고 레벨업시키지 않으면 제2의 신한사태가 오지 말라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소비자들을 위한 선진금융모델이 요구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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