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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 저수지와 관개시설은 부를 낳는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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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 저수지와 관개시설은 부를 낳는 상징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03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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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농사를 짓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는 물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식량으로 사용될 곡식을 키우기 위해 유량이 풍부한 강과 하천주변에 정착을 하면서 촌락이 형성되고 도시와 국가가 세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는 성장하고 국가는 세력을 키웠다.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구 유입이 필요했다.

인구 유입은 곧 그들을 먹일 많은 곡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사회가 성장하면서 여러 이유로 곡식생산을 위한 농업과 노동력확보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을 사용하기 쉬운 하천주변의 땅은 농사에는 유리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물이 하천주변을 넘어 더 멀리 전달될 수만 있다면 농사를 짓는데 사용할 땅을 늘릴 수 있어 곡식생산에 한결 유리했다.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관개시설(灌漑施設)이다. 

하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도 물길을 만들어 흙에 물을 적실 수만 있다면 곡식을 생산하는 농지로 바꿀 수 있었다. 물길을 만들어 흙에 물을 대기도 했지만 선조들은 물을 보관할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었다. 

저수지는 꽤 유용했다. 하천에서 멀리 떨어져있어도 흙에 물을 대기 쉬워 곡식을 생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런 용도를 위해 고대에 만들어진 시설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드넓은 호남평야의 중심에 자리한 김제 벽골제(碧骨堤)와 제천 의림지(義林池)가 바로 그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은 필수적인 요소로, 상업 활동보다 곡식을 생산하기 위한 활동이 우선이던 시절에 물을 보관하기 위한 저주지와 이를 운반하기 위한 관개시설은 도시를 넘어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왕은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식량생산을 늘릴 수 있는 개간(開墾)사업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 인구의 증가는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다. 국가는 백성들의 먹거리 확보를 통해 생활의 안정을 제공하고 조세를 통해 수입을 늘려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야했다. 이런 노력은 개간을 통한 농경지의 확대로 이어졌고 농법의 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 

농경지의 확대를 위해서는 산과 바다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해안지대의 염도가 낮은 지역에서는 제방을 높이 쌓아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간척(干拓)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천도했던 강화도에서 농경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전국각지의 포구일대와 강가에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확보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내려왔다. 

큰 강가의 경우에는 우기에 잦은 범람으로 농지가 유실되는 경우가 많아 제방을 높이 쌓았다는 기록이 보일정도다. 농지의 확보는 산간지역에서도 이어졌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宋)의 서긍(徐兢, 1091-1153)이 벽란도와 개경에 머물면서 중국과 다른 고려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고려도경’을 남기게 된다. 서긍은 여기에서 당시 고려가 산간지역에서도 개간을 했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렇듯 곡식생산은 곧 부(富)의 생산이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저수지를 비롯한 관개시설의 확충과 제방을 쌓는 곳이 많아지면서 여러 지역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할 수 있었다. 또 치수를 통한 물길로 논 농사지역의 확대는 농업생산량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인구증가와 노동력의 증가로 이어져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이끌어냈다. 전란으로 인구감소와 농경지가 줄어드는 시기도 있었지만 농경지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식량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조선에 이르기까지 북방과 남방의 주변 세력이 한반도의 곡식을 탐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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