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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부(富)가 탐닉하던 음식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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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富] 부(富)가 탐닉하던 음식 ‘굴’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0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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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부(富)는 많은 사람과 나라가 추구하던 바다. 그리스와 로마가 그랬고 게르만이 장악한 유럽도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마찬가지였다.  

배고픔을 해결하려던 피지배층의 굶주림과 달리 부가 넘치던 지배층은 특이한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을 즐겨 먹으며 남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이런 것에 흥미를 가졌던 것으로 유명한 아울루스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는 AD 69년 4월에 즉위했다. 같은 해 12월 죽을 때까지 약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식탐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로마제국의 황제다.

그는 장어 내장이나 홍학의 혀, 공작새, 플라멩코처럼 일반적으로 얻기 힘든 식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 것을 즐기며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했다. 그중에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구했던 식재료가 있는데 바로 굴이다. 

황제의 입맛을 채워줄 굴을 구하기 위해 로마의 병사들은 갈리아(프랑스)와 브리타니아(잉글랜드) 사이에 있는 해협에서 굴을 채취해 로마로 가져왔다. 모든 길이 로마로 연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동수단의 한계가 있었던 당시 여건을 감안하면 신선한 굴을 확보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굴을 즐기던 지배층은 계속 있었다.  

로마제국 때 지배층의 사랑을 받던 굴은 로마가 멸망하면서 잠시 주춤하지만 남성의 건강에 좋다는 믿음으로 인해 유럽의 부가 움직일 때마다 소비지역도 따라서 움직였다. 유럽의 여러 강대국과는 달리 영토는 작았지만 대항해시대가 되면서 유럽의 부(富)를 쥐락펴락했던 네덜란드가 대표적이다. 

아시아로 진출해 향신료와 차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는 유럽의 부를 깔때기로 모으고 있었다. 풍족한 생활은 자연스럽게 비싼 굴의 소비도 증가시켰다. 특히 네덜란드로 부의 집중되던 17세기에 네덜란드인의 일상을 그리던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유난히 남녀와 같이 있는 테이블 위에 굴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일상에서 굴이 자주 등장했다는 것으로 보았을 때 당시 네덜란드가 가졌던 부의 크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후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왕실을 중심으로 굴 소비가 증가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14세는 귀족의 발호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힘들게 왕권을 쥐게 된다. 험난한 시기를 겪었던 루이14세는 왕권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 시기에 루이 14세는 중상주의로 국부(國富)를 성장시키고 이에 근거한 과세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부(富)를 공고히 한다.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루이 14세가 어느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도 부르봉 왕가 후손답게 굴을 즐겼다. 1671년 4월 23일 목요일 오후부터 25일 토요일까지 샹티이성(Château de Chantilly)에서 콩데(Condé)공이 루이14세와 함께 참석한 2천여 명의 일행을 위해 파티를 열었다. 

음식을 준비하던 프랑수아 바텔(François Vatel)은 변덕스럽기로 소문난 30대 젊은 혈기의 루이14세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25일)의 성대한 파티를 위해 굴과 생선을 포함한 식재료를 주문했는데 폭풍우로 인해 재료가 도착하지 않자 고민에 빠진 그는 사방을 다녔지만 필요한 양의 굴과 생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루이 14세의 까다로운 성격을 겪은 적 있던 바텔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콩데(Condé)공에게 피해를 줄까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일화는 당시 루이14세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던 세비녜 후작 부인이 딸에게 보냈던 두 통의 편지 속에 담긴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루이 15세의 의뢰로 그려진 굴을 먹는 만찬을 담은 베르사유궁전에 걸렸는데 작품에서는 그림 속 인물들이 먹고 버린 굴 껍데기의 양으로 당시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 굴을 소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전 파리의 인구가 약 50만 명 정도였는데 굴을 파는 상점의 수가 약 2천여 개였다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 프랑스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후 프랑스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폴레옹시대까지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굴을 소비한 곳은 프랑스였다. 나폴레옹 외에도 그를 따르던 장군들도 굴 대식가였다고 알려져 있다. 정치적인 인물들 외에도 하급귀족이던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같은 인물 역시 굴을 즐겼다고 하며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생굴은 독특한 식재료였다. 익힌 음식을 주로 먹었던 서양인들이 석화만은 날 것으로 먹을 정도로 굴에 대한 사랑은 지대했다. 여러 이유 중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만들어진 선입견이 작용했다. 굴은 남성의 건강에 도움을 주는 식재료라는 믿음이 있어 로마인들은 장수의 비결로도 꼽았다. 

우리에게 가리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도 고대문헌에서는 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굴은 생명이 잉태되는 원천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상징으로 알려졌다. 실제 굴에는 아연을 비롯한 철분, 구리, 마그네슘, 요오드 외에도 흡수가 잘 되는 칼슘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에는 굴을 양식하면서 가격이 많이 낮아졌다. 덕분에 일반 서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원기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타우린을 비롯해 비타민B군과 무기질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이라 현대인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 증가하고 있는 치매를 늦추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시대가 변해 굴의 가격은 낮아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식품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굴이 가진 식재료로써의 특성과 맛까지 낮아진 것은 아니다. 굴이 가진 식감과 효능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기에 제철을 맞은 굴의 매력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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