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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형 실버타운인 서울시니어스 가양타워가 최근 문을 열어 눈길을 끌고 있다.부동산가에 따르면 가양타워는 서울시니어스타워(이사장 이종균)가 서울 약수, 강서, 경기도 분당에 이어 네 번째로 지은 실버타운이다. 지하철 등이 가까운 서울도심권에 세워진 노인전용타워가 세워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대부분의 실버타운들이 서울에서 거리가 먼 지방에 들어서 있어 자녀들과의 왕래가 어려운 실정이다.  ‘실버’ 겨냥한 노인전문 주거공간서울 강서구 등촌동 강서소방서역(9호선 올해 말 개통) 부근에 자리한 가양타워는 전용면적률 72%인 실버전용아파트로 지하 3층, 지상 15층의 A동(19~49평형 315세대)과 지상 4층의 원룸형 B동(10평대, 104세대), 419세대로 이뤄져 있다.  3개 타워 900여명의 어르신들을 모시면서 실버타운 건설·시행·운영에 10여년 노하우를 갖고 있는 서울시니어스타워는 가양타워의 전용면적률을 72%까지 확보하고 고액의 시설운영 선납금제도를 없앴다. 또 원하는 시설과 서비스는 골라 이용하고 그에 해당하는 비용만 내는 실속형 시스템도 갖췄다.  가양타워단지 안엔 클리닉센터, 전문재활치료센터, 주간보호센터, 너싱홈형 주거동이 있어 입주 뒤 건강이 나빠지면 상태에 따라 B동으로 옮겨 필요로 한 케어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또 300여평의 노인전용문화공간과 헬스클럽, 사우나, 탁구장·당구장·수영장 등의 부대시설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일부 시설은 실비를 내야 한다. 게다가 강원도 인제, 경기 양평의 휴양병원과도 연계돼 있어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겐 큰 도움이 된다. 입주 뒤엔 하루 세끼 식사(쿠폰제)와 맞춤운동, 여가·교육프로그램, 24시간 상주 전문간호서비스, 연 1회 무료종합검진 등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나이·병력·건강상태 등에 따른 운동처방은 물론 노인성질환과 성인병 등도 관리해준다. 이밖에도 인지력 향상을 위한 레크리에이션·음악·원예·미술치료 등의 전문프로그램이 펼쳐진다. 특히 지난 12월 18일 먼저 문을 연 너싱홈형 실버타운(B동)엔 나이 많은 노약자의 동선을 고려한 24시간 상주 전담간호팀, 공동식당, 공동욕실, 프로그램실 등이 층마다 갖춰져 있다. 노약자 동선 고려 간호팀 상주 가양타워는 올해말 개통될 서울지하철 9호선 강서소방서역(예정)에서 2분 거리(80m)에 있다. 차를 타면 서울 강남에서 25분, 김포공항에서 15분 거리다. 인근엔 홈플러스, 이마트 등의 편의시설이 있어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90%가 넘는 분양률을 보이고 있는 가양타워는 남은 세대를 분양(임대) 중이다. 청약통장과 상관없이 독립생활이 가능한 60세 이상이면 분양에 도전할 수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9-01 00:00

 ‘잊혀진 왕국’ 대가야인들이 철갑옷을 입고 부활한다. 대가야(大伽倻)는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철(鐵)문화를 꽃피우다 1500여년 전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 ‘미스터리 왕국’. 오는 3월 1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는 2008고령대가야체험축제와 지역의 문화관광상품을 알리기 위한 체험행사가 열린다. 이날 오전 11시 30분 대가야왕과 왕후가 판갑(보병이 입던 철갑옷)과 찰갑(기병이 입던 비늘갑옷)으로 무장한 장수 15명과 병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인사동길을 오가는 길놀이로 시작된다. 이밖에 퍼포먼스, 대가야구슬 제작, 왕등벽화 만들기 등 체험행사도 마련된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대가야체험축제는 ‘1500년전으로 떠나는 대가야 미스터리 <무덤의 비밀>’을 주제로 오는 4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고령군 일원에서 열린다.대가야는 어떤 나라일까? 백제·신라가 어깨 겨뤘던 ‘철의 강국’가야가 건국된 A.D 2~3세기에는 한반도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나라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특히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고령 대가야, 김해 금관가야 등 6개의 소국이 건국됐다. 대가야는 A.D 4세기 무렵 고구려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몰락해가는 금관가야를 계승하는 등 합천·거창·함양·산청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신라 백제 고구려 3국과 어깨를 겨루며 국제사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급속한 발전에도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된다. 554년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고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삼국보다 발전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 가약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수준을 보유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9-01 00:00

 조운파 작사, 조운파 작곡, 주병선 노래인 대중가요 <칠갑산> 노랫말은 한편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콩밭, 베적삼, 산마루, 산새소리 등의 단어들이 친근감을 더해 준다.목소리를 가다듬어 감정을 넣어 차분히 부르면 가슴 한구석에 뭔가 찡함이 오는 것 같다. 복받쳐 터지는 슬픔의 감정을 구슬픈 가락 속에 잘 담아낸 우리나라 대중가요 최고 명곡 중 하나다.1989년 7월10일 반도음악에서 음반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4분의 3박자, 슬로우 왈츠 풍으로 힘든 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 어머니, 누나를 떠올리게 한다. <칠갑산> 노래가 탄생해 히트하기까진 여러 사연들이 있다. 10년 간격으로 노래취입이 두 번이나 이뤄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두 명의 가수가 노래취입을 제각각 다른 시점에 한 것이다. 더욱이 몸이 불편한 한 아주머니가 방송에서 눈물로 열창, 대중들에게 본격 알려지게 된 이력도 갖고 있다. 칠갑산 자락서 성장한 조운파씨 작사이 노래는 음악인 조운파 씨가 자신의 고향(부여) 부근 칠갑산의 농촌아낙네 모습을 소재로 태어났다. 그는 “산기슭 화전민인 한 아낙네가 가난 때문에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애처로운 얘기는 가난을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온 우리앞 세대들 얘기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8년 가을 어느 비오는 날 조 씨가 고향으로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칠갑산을 지나게 됐다. 스산한 늦가을 한티고개를 넘어가는데 차창밖엔 아낙네들 여러 명이 밭을 매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일하는 아낙네들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는 문득 어려웠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그들 가운데 ‘민며느리로 시집와 전형적인 시골여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난 것이다. 그의 생각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갔다.베적삼을 입은 아낙네는 홀어머니가 너무 가난해 읍내 부잣집으로 민며느리(며느리를 삼으려고 민머리인 채로 데려다 기르는 계집아이)로 보낸 딸이었다. 어머니는 굶지 말라고 보내면서도 마음이 아파 수시로 콩밭으로 달려갔다. 콩밭은 민초들의 힘든 삶터요, 아낙네는 가난을 어렵게 이겨낸 상징적인 세대다. 부잣집으로 민며느리 보낸 사연 담겨<칠갑산>엔 이처럼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어린 딸만 데리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한 모녀의 가슴 아픈 삶이 깃들여져 있다. 어느 중농 집안에서 ‘다 크지 않은 어린 딸이지만 민며느리로 보내주면 밭뙈기 한 쪽을 떼어주겠다’는 말에 고생을 해도 배는 곯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딸을 일찍 시집보낸 한 어머니의 한이 스며들어 있다. 조 씨가 내리는 빗속에서도 일하는 한티고개 아낙네들을 노래소재로 삼은 것도 그 옛 생각들이 불현듯 났기 때문이다.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조 씨는 칠갑산 자락인 그곳에서 자라면서 어려웠던 시절 농촌의 흙냄새를 맡으며 음악성과 문학성을 키워왔다. 산기슭에서 밭뙈기 한 쪽을 부쳐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민가들의 힘든 삶을 보아왔고 동네사람들의 티 없이 깨끗한 서민적인 순박함도 느끼면서 성장했다. 음악적 영감이 떠오른 조 씨는 그 때 생각들을 메모했다. 어느 날 그는 노래로 만들기로 하고 1978년 가사와 곡을 제자(가수 윤상일)에게 줘 취입토록 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무명음반으로 레코드가게 공간만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칠갑산>이 음반의 후반순서에 담겨있어 특별히 관심을 갖는 음악애호가 아니고선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자연히 팔린 음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가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개되고 불려 학생들의 인기곡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하길 10여 년. 노래가 거의 잊혀져갈 무렵 대학가요제출신 가수인 주병선이 이 노래를 다시 취입하게 됐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주병선의 맑은 음색과 창법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주병선은 추계예술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던 1988년 MBC대학가요제에서 <칠갑산>을 불러 금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1978년 가수 윤상일 씨가 처음 발표한 것을 리메이크해 부른 것이다.특히 주병선이 부른 <칠갑산>이 방송을 타고 있던 어느 날 ‘주부가요열창’ 프로그램에서 한 가정주부(주진주씨)가 불러 결정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몸이 불편한 이 아주머니는 자신의 이야기 같은 이 노래를 감정에 북받쳐 눈물로 열창, 시청자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대와 방송국 객석이 감동으로 하나가 됐다. 냉정해야할 심사위원들의 가슴도 울렸다. 가정주부 부르면서 국민가요로 ‘인기’그날 방송된 모습과 노래는 한순간 가요계의 화제 거리로 등장했다. ‘눈물의 열창사건’이 크게 알려지면서 <칠갑산>은 각종 모임, 노래방, 방송프로그램 등으로 번져나가 국민가요로 자리 잡았다. 음반이 날개 돋치듯 팔렸고 방송전파도 자주 탔다. <칠갑산>은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시로 북한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 있도록 했다는 ‘남한가요 20곡’ 가운데 들어있다. 흔히 말하는 ‘연변가요’로 불리면서 중국 조선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뒤 북한으로 흘러들어간 노래 중 하나다.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눈물과 애틋한 한이 가락과 노랫말에 절절히 배어있다. 전통음계인 궁상각치우, 즉 도레미솔라 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악성격의 가요라 할 수 있다. 고향 가며 한티고개 아낙네 모습 그려충남 청양군 장평면, 대치면, 정산면에 걸쳐 있는 칠갑산은 노래가 히트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주변가게들도 장사에 재미를 봤다. 이 산은 작사·작곡가 조운파, 가수 주병선, 눈물의 열창 아주머니가 만들어낸 명소가 되면서 삶의 향수를 자아내게 하고 자연 속의 쉼터로도 한 몫하고 있다. 노래제목이기도한 ‘칠갑산(七甲山)’은 청양에 있는 561m 높이로 계곡이 깊고 비탈이 가파른 편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칠갑산을 ‘충남의 알프스’라 부른다. 1973년 3월 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가졌다.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七甲山이라 일컬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이기도 하다. 이 산은 서울에서 3시간쯤 걸린다. 정산면 소재지에서 20분 거리다. 칠갑터널을 지나기 전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봄엔 철쭉꽃으로 유명하다. 산 8부 능선까지 차가 갈 수 있다. 거기에 조선말기 독립운동가 최익현 선생 동상이 있다. 또 ‘칠갑산 노래공원’ 입구(천장호수 위)엔 가사에 나오는 홀어머니와 딸의 조각상 ‘콩밭 메는 여인상’도 서있다. 하지만 요즘 그곳엔 콩밭 매는 여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9-01 00:00

사랑을 주제로 한 여가수 최진희의 노래 <사랑의 미로>는 진한 감흥이 돈다. 슬로우 고고 풍으로 잔잔히 흐르는 멜로디 구절구절이 가슴을 적신다. 여기에다 의미 있는 노랫말과 끈끈하게 호소하는 듯한 최진희의 해맑은 목소리가 어우러져 대중들 인기를 사로잡는다.지명길 작사, 김희갑 작곡의 이 노래는 북한에까지 널리 퍼져 수 년 전부터 인기유행가로 유명하다. 특히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술자리 등에서 이 노래를 목 놓아 부른다는 데서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한다. 북쪽에선 가사를 일부 고쳐서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흥미를 더해준다.“그토록 다짐을 했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 자주 위해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 / 그대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식이다.거부할 수 없는 같은 핏줄의 한 민족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노랫말 내용이 좋은데다 곡조가 부드럽고 따라 부르기 쉬운 까닭이기도 하다. 더우기 사상성만 강조되는 북한가요에 염증난 주민들도 이 노래가 인간 공통심리인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인다는 게 가요전문가들의 분석이다.태원이 부른 <나의 사랑>이 원조남북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랑의 미로>는 언제 어떻게 나왔고 얽힌 에피소드는 없을까. 이 노래는 최진희 보다 먼저 태원이란 가수가 1978년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이다. 그 때의 곡명은 <나의 사랑>. 그러나 태원은 이 노래로 재미를 못 봤다. 취입 후 음반을 냈지만 전혀 빛을 보지 못했던 것. 노래가 뜨지 못하자 그냥 태원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한 곡쯤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묻혀버린 노래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83년 되살아났다. 멜로디에 애착을 갖고 있던 작곡가 김희갑 씨가 이 곡을 다른 가수에게 줘 다시 부르도록 했다.그는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던 그룹 ‘한울타리’ 멤버 최진희를 생각했다. 평소 음악적으로 가까이 지내면서 창법이 뛰어나고 목소리컬러도 독특해 키울만한 가수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 최진희가 솔로가수로 변신해야할 사정이 생겼다.5년 뒤 ‘한울타리’싱어로 취입, 히트1983년 여름 한울타리의 <그대는 나의 인생>이 대히트를 기록하는 가운데 팀이 졸지에 해체된 것이다. 김희갑 씨는 한울타리의 2집 앨범계획을 멈추고 그룹싱어(리더 보컬)였던 최진희의 솔로음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 씨는 태원이 불러 알려지지 않았던 <나의 사랑>을 <사랑의 미로>란 제목으로 바꾸고 작사가 지명길 씨에게 가사를 맡겨 최진희의 데뷔곡으로 줬다. 그해 여름 킹레코드사에서 노래연습을 시키며 가요지도를 꾸준히 했다. 김희갑 씨 판단은 적중했다. 음반이 방송을 타면서 노래가 뜨기 시작했다. <사랑의 미로>는 그해와 이듬해 히트곡으로 인기절정을 누리며 신인가수 최진희의 주가를 크게 높였다. 야구로 치면 홈런을 친 꼴이었다.최진희는 <사랑의 미로>로 가요계정상에 올랐다. 소속 음반회사도 지구레코드사로 옮기는 등 여러 변화가 왔다. <물보라>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꼬마인형> <미운 사람>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도> <슬픈 고백> <외로운 여자> <카페에서> <낙엽> <여심> <눈물의 승차권>등 많은 인기곡들을 내놓고 가요계를 열심히 뛰고 있다. 최진희는 학창시절 합창부장을 맡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져왔다. “음악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아 학교 조회시간 애국가 제창 때 앞에서 지휘를 해 전교생이 다 알아주는 학생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집안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목소리가 뛰어나고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탤런트인 고모 등이 그녀의 끼를 발동시키는데 한 몫 한 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워낙 엄격해 최진희 부친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딸이 지금의 인기정상가수가 된 것이다.북한공연을 세 번 갔다 온 최진희는 2002년 9월 27일과 29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MBC평양특별공연 때 <사랑의 미로>를 불러 객석을 뜨겁게 달궜다. 그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자 관중들이 따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가하면  KBS·SBS의 북한 공연 때도 단골가수로 유명세를 입증했다. 최진희는 <사랑의 미로>에 이어 또 한번의 히트곡 대열에 도전하고 있다. 올 2월에 신곡이 나올 예정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6 00:00

2008년이 시작됐다. 한해가 열리는 이맘때면 대중가요 <아침이슬>을 흥얼거리게 된다. 김민기(57) 작사·작곡,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새로운 분위기가 든다. 노래제목처럼 이른 아침 영롱하게 맺힌 이슬의 느낌부터가 새롭다. 3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들어도 전혀 묵은 노래 같지 않다. 한 때 각 학교 교가보다 더 잘 알려져 7080세대들에겐 더욱 친숙한 국민가요다.노래가 탄생한 건 1970년. 사회적·정치적 사실과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진 순수 서정적 곡으로 태어났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노랫말이 다분히 시적이다. 잔잔하게 깔리는 반주에 양희은의 낭랑한 목소리가 버무려져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청년음악가 김민기와 풋내기 여가수 양희은을 졸지에 스타로 떠오르게 한 이 곡은 숱한 얘기를 낳은 노래로도 유명하다. 운동권가요의 대표 격으로 방송금지가 되면서 더욱 주가를 올린 점이 특이하다. 피 끓는 젊은 대학생들이 독재정권과 맞서며 청춘을 불태웠던 저항의 노래 상징으로도 꼽힌다. <아침이슬>이 특히 1970~1980년대 의식 있는 젊은 세대들로부터 사랑받은 건 노래가 좋았던 점도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의 암울한 시대상황의 영향도 컸다. 버려진 악보로 연습해 취입그래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다. 양희은이 불러 히트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민기는 이 노래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 때 여러 번 <아침이슬>에 애정이 없는 듯한 말을 자주 한 게 이를 뒷받침해준다.그러나 가수 양희은의 생각은 달랐다. 김민기가 노래를 만들었다며 불러주는 순간 ‘아주 좋은 곡’이라며 맘이 끌렸다. 작사 · 작곡가와 가수의 시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연습하면서 악보를 획~ 버리자 양희은은 이를 주워 자신의 노래로 소화시켜나갔다.‘꼭 녹음 해야겠다’고 작심한 양희은은 원작자(김민기)보다 먼저 <아침이슬>취입에 성공했다. 음반제작은 방송사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하면서 이뤄졌다. 빅 히트송 <아침이슬>이 있기까지엔 가시밭길을 걸어온 김민기의 지난날 삶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현재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부친이 6·25전쟁 때 북으로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는 바람에 유복자가 됐다. 경기중·고를 거쳐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대학 3학년 때인 1970년 <아침이슬>을 발표, 새내기 대중음악 작곡가로 명함을 내밀었다. 이듬해엔 독집음반을 내면서 가수로도 데뷔했다. 3선 개헌과 대통령선거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무렵이다.노래 못잖게 1971년 가을 그에겐 의미 있는 한 만남이 있었다. 저항시인 김지하와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김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문화적 체험을 한 그는 가톨릭문화운동, 국악대중화, 마당극운동 등을 펼치며 제도권으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취급받았다. 1971년 서울 신정동에서 야학을 시작했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도 뛰었다. 금관의 예수(1973년), 소리굿 아구(1974년) 공연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금지곡서 국민가요 ‘햇빛’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김민기 노래를 순수대중음악에서 현실비판적 의식가요로 재해석케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독집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환영회에 초대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레코드를 모두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방송금지에다 연행→조사→석방이 거듭되면서 ‘찍힌 인물’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택한 게 군 입대. 1974년 10월 카투사로 들어가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주한미군방송인 AFKN방송국. 사병근무지론 비교적 편안한 데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이슬> 노래 때문이었다.이듬해 전국이 유신헌법 찬반투표 거부운동으로 들끓었다. 대학가에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정치권 공방도 치열했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은 투표 당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종일 투표참가를 거부하는 집회와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행사 때 주요 음악레퍼토리는 김민기 의 노래. 그러나 이 사실이 당국에 들켜버렸다.그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김민기였다. 내복도 입지 않은 채 보름간 감방생활을 한 뒤 최전방으로 쫓겨났다. 이어 그해 6월 문공부가 발표한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에 따라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노래가 시의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김민기 노래가 운동권가요로 자주 불리면서 탄압은 더욱 거셌다. 그럴수록 운동권에선 더 불렀다. 탄압강도가 더해질수록 서정적 노래로 태어난 <아침이슬>이 의식 있는 가요로 의미를 갖춰갔다. 운동권학생들은 험난한 미래에 대한 고뇌의 결단을 할 때 <아침이슬>을 불렀다. 데모대 힘은 바로 <아침이슬>의 우렁찬 울림에서 솟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어느덧 김민기는 의식 있는 음악인으로 운동권투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김민기는 정작 자신이 ‘투사’로 불리는 것을 꺼린다. 어느 날 TV회견 때 “아무 의도 없이 만든 노래가 운동권에서 자주 불린다고 해서 기관으로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살아오면서 남들과 크게 싸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가수입문 때 만난 김민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1997년 김민기 헌정음반으로 <1997 아침이슬>을 내놨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김민기를 위한 것이었다. 김민기가 대중의 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진 사람은 바로 양희은이었다.음악인 김민기는 이제 한국적 뮤지컬창시자이자 연극·연출가, 기획자로 변신해있다. 해금 4년 만인 1991년 서울 대학로 뒤편에 극장(학전)을 만들어 지금껏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가 무대에 올린 뮤지컬작품은 독일 원작의 ‘지하철 1호선’. 연출, 편곡, 작사는 물론 배우도 직접 뽑고 모진 합숙훈련도 했다.  원작자 루트비히는 “원작보다 낫다”고 했고, 중국 대표작가 위화(餘華)는 “한류의 정수”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뉴시스, 시사저널, 일요서울(편집국장)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8-22 00:00

 주머니 속 작은 PC ‘핸드폰’  지난해 7월 S 전자는 미국에서 새 휴대폰을 출시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PC 이다’라는 광고를 실었다. 이 휴대폰에는 1GB(Giga Byte) 플래시 메모리가 들어 있어 메시지나 통화기록 외에 음악이나 그림을 저장할 수 있다. 곧 이어 9월 S 전자는 “16GB 저장 용량을 갖는 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16GB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이용해 32GB 메모리 카드를 제작했을 경우 DVD(Digital Video Disk) 급 영화 20 편 이상의 동영상, MP3 음악 파일 기준으로 8000곡, 일간지 200년치 분량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이처럼 대용량의 저장장치가 휴대폰에 장착되면 휴대폰은 진정한 PC로서 손색없게 되는 것이다.휴대폰이야? 컴퓨터야? 지난해 말 제주도에서 열린 ‘iMOBICON’ 모임에서 발표된 S 전자의 기술 로드맵은 휴대폰 메모리를 16GB 로 가정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GB를 가진 데스크톱 컴퓨터 , 노트북 컴퓨터가 상당한 고가(高價)의 장비에 속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휴대폰은 전화기의 용도를 넘어서는 컴퓨터로 진화되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휴대폰은 오락기구·비즈니스용 컴퓨터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휴대폰을 비즈니스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문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화면과 키보드가 필요하다. 현재 ‘플렉시블 (구부리는) LCD’와 접을 수 있는 키보드가 출시되고 있다. PDA(휴대용 정보 단말기) 에 연결해 사용하는 ‘3 단 접기형 키보드’는 컴퓨터 기술 마니아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들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펴서 사용할 수 있는 ‘두루마리 LCD’까지 보편화될 날이 멀지 않았다. 삼성이 지난해 11 월 말에 발표한 컬러 플렉시블 LCD 는 7 인치 크기로 아날로그 TV 방송과 비슷한 VGA(Video Graphic Adapter)급 수준이다. 무거운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에 접속하는 일이 곧 사라질 전망이다.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휴대폰을 본체로 사용하고 , 플렉시블 LCD 와 접을 수 있는 휴대용 키보드를 연결하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31 00:00

 최백호 <내마음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연말연시에 부르는 ‘오빠 가수’ 노래  겨울의 문턱이다. 만추(晩秋) 끝자락의 붉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뚝 뚝 떨어지며 앙상한 속살을 드러낸다. 스치는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럴 때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쓸쓸해진다. 감성의 연륜은 고목의 나이테처럼 가는 세월 속에 결코 속일 수 없는 것. 차 잔을 들며 듣는 초겨울의 노래가 더욱 따뜻함으로 성큼 다가온다. 감상적 맛을 물씬 풍기는 가요,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을 한껏 느끼게 한다. 이 노래는 최백호(57)의 대표곡이랄 정도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최종혁 작곡으로 최백호가 작사하고 그가 직접 불렀다.애조 띤 멜로디와 뭔가를 말하려는 듯 한 노랫말이 마음을 잡아당긴다.   상당수 가요들이 그렇듯 한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지난날 무슨 사연들이 있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한다. 그 속엔 삶이 녹아있고 사랑과 이별, 기쁨과 아픔이 배여있다. 최백호가 부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영일만 친구> <낭만에 대하여> 등을 불러 널리 알려진 최백호는 1950년 4월 23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제2대 국회의원이었던 부친(최원봉)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부정(父情)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보냈다. 생활이 서서히 어려웠던 건 말할 것 없다. 부산 태생 … 아버지 일찍 여의어 부잣집 아들로 남부러울 게 없었던 최백호는 갑작스럽게 기우는 가세를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다. 정의감이 강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횡단보도에 어린이들이 지나가는데 이를 무시하고 달리는 승용차를 보고 끝까지 따라가 따끔하게 주의를 준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처럼 매사에 당당했던 최백호의 젊음에 또 한 차례 큰 아픔이 왔다. 부산 가야고등학교를 졸업, 한창 혈기왕성할 때인 20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과 방황의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둥지 잃은 여린 새끼 새처럼 삶의 날개를 열심히 퍼덕였지만 허사였다. 사회초년생인 최백호에겐 기댈 마음의 언덕이 필요했다. 그래서 벗 삼은 게 노래와 글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자유인으로 음악을 가까이 했다. 노래는 그에겐 곧 생활이 되어버렸다. 최백호의 노래와 화법, 글쓰기는 갈수록 깊이가 있었다. 취입한 노래 가사는 대부분 직접 쓴 것이고 가끔 작곡도 했다. 부르는 노래를 잘 새겨보면 그의 이력을 어렴풋이나마 살필 수 있다. 군 제대 후 부산시내 음악 살롱무대를 돌며 노래활동을 했던 최백호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인기를 모았던 가수 하수영에게 발탁, 1976년 가을 가수로 데뷔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31년 전 일이다. 그가 맨 처음 신고한 곡이 바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다. 이 노래는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말하는 듯 하지만 전혀 아니다. 저 세상으로 떠난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어린 나이 아버지를 잃고 늘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자 쓸쓸함 마음 어디 둘 곳이 없어 만든 노래다. 스무 살 가을 돌아간 어머니를 그리면서 뒷골목을 거닐다 쓴 눈물의 가사에 자신이 직접 부른 것이다. 일종의 사모곡(思母曲)인 셈이다. 모정 그리며 가사 직접 쓴 ‘데뷔곡’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지면 서러움이 더해요~’라고 한 첫 소절부터가 가슴이 아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계절이 가을이고, 무성한 나뭇잎들이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처럼 자신을 보호해줬던 어머니의 무수한 음덕이 낙엽처럼 사라지고 나면 서러움이 더해진다는 허전함을 노래한 것이다.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음반판매량이 늘면서 ‘신인 가수 최백호’ 알리기에 충분했다. 정감 있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깔리면서 노랫말에 은근한 감칠맛이 난다는 평이었다. 애수에 찬 이 노래는 음반이 석 달 만에 6천여 장 팔리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이듬해인 1977년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로 나가는 <입영전야>와 <그쟈>가 담긴 2집 음반까지 잇달아 히트하며 인기가수 대열에 끼었다.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도 꽤 알려졌다.이 후 인기탤런트였던 김자옥(지금은 가수 오승근씨 부인)과 결혼, 세간의 이목을 끌었으나 얼마 못 가서 갈라섰다. 이혼과 방황 등 곡절을 겪은 그는 1984년 재혼, 새 가정을 꾸며 안정을 되찾았다. 아내와 딸 하나를 두고 있다.이어 <영일만 친구> <고독>과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준 <낭만에 대하여>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도 발표했다. 통속적인 남녀 사랑타령에서 벗어나 인생을 관조하듯 깊이 있는 인생관을 펼쳐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새로 편곡해 다시 음반에 실은 <보고 싶은 얼굴> <열애> 등도 맛과 흐름은 같다.최백호는 2003년 데뷔 28주년을 맞아 신곡 <청사포>가 담긴 베스트앨범(제목=‘최백호 히스토리’)을 냈다. 2000년 <어느 여배우>를 내놓은 뒤 3년만이었다. 신곡 <청사포>는 그의 고향인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 아래의 아담한 포구이름으로 ‘푸른 모래의 작은 항구’란 뜻을 갖고 있다. 한 여인의 추억을 회상하는 포크와 트로트가 접목된 분위기 곡으로 먼저 취입한 <낭만에 대하여>와 꽤 닮았다. 세월의 허무함, 인생의 외로움, 덧없음을 그려낸 것이다. 첫사랑, 옛 친구, 군 생활과 관련된 추억의 노래를 주로 했던 최백호의 맛을 안겨준다.    국민고독가수로 불릴만한 국내 최대 낭만파 가수 최백호는 요즘 방송인으로서도 맹활약 해 인기를 모았다. 2006년 4월 24일부터 2007년 3월까지 매일 오후 6시부터 KBS 해피FM(106.1MHz) ‘최백호-김민희의 라디오챔피언‘ 프로그램 진행자로 전파를 탔다. 취미는 축구, 특기는 그림그리기. 가수, 작곡가, 작사가, 방송인, 화가 이외에도 1995년 3월부터 대중가요 노랫말 만들기 모임인 시락회 회원으로도 뛰고 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낙엽지면 서러움이 더 해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라 /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 비라도 우울히 내려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하얀 겨울에 떠나요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뉴시스, 시사저널, 일요서울(편집국장)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 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31 00:00

 ‘클래식 음악 CD 수집가’  정정만  세우미클리닉 원장 40여년 음반 1만 3천장 모아 “노후엔 음악 들으며 의료 접목시킨 실버촌 운영하고 싶어” 의료인 정정만’하면 알아주는 비뇨기과 전문의사(61·의학박사·대한기능영양의학회 명예회장)로 ‘마당발 의사’로 이름나 있다. 연세대 의대·대학원을 나와 세브란스병원과 미국·호주 현지병원 수련 의사를 거쳐 대한비뇨기과학회·대한전립선관리협회 등 각종 단체 임원이자 서울 세우미클리닉 원장으로 뛰고 있다. 환갑 나이지만 삶의 바퀴에 가속을 붙여가는 모습이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클래식 선율을 들으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긴다. 클래식 애호가이자 음반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집과 일터, 경기도 양평 별장,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진료실·수술실에 아름다운 선율정 원장이 클래식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30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살 때 연세대에 입학, 악기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학년이 되어 8개월 동안 가정교사를 해 모은 돈으로 서울 종로 악기상에서 중고 스즈키 바이올린을 샀죠. 문제는 선생이 필요한 겁니다. 음대 연습실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1년 위 여자상급생을 알게 돼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그녀를 좋아하는 ‘이상한 마음’이 생겼어요. 비오는 여름 어느 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길로 끝이었습니다. 다방에 가서 차를 한 잔 사주며 ‘그만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찔했습니다. 고백사건 후 교습을 계속할 처지도 못되고 해서 그것으로 악기 배우기를 접고, 대리만족 차원에서 음반을 모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 사건’ 후 그의 발길은 틈틈이 레코드가게로 향했다. 병원 수련의사 때는 물론 군의관시절과 개원을 하고서도 음반 모으는 일은 계속됐다. 외국 출장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바빠도 현지 음반점에 들러 국내서 구하기 힘든 CD를 샀다. 지금은 이해를 해주지만 처음엔 부인의 반대가 심했다. 들어가는 돈도 그렇지만 쌓여가는 음반으로 집안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악 감상 및 음반분류기 설치 기술자들을 불러 먹이고 재우며 뒤치닥꺼리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그렇게 해서 40년 가까이 모은 LP판과 CD는 약 1만 3천장. 1만장은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별장에, 나머지 3천장은 집에 쌓여있다. 방송국 음악자료실과 음반가게를 연상시킬 만큼 어마어마하다. 들어간 돈도 2억 원대가 넘는다.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협주곡, OST(영화·드라마 주제가), 가곡 등 다양하다. 양평 별장은 ‘자연 속 음악 감상실’정 원장의 별장(대지 2백 평) 안엔 음악시설이 곳곳에 돼 있다. 야외식탁 위 정원수엔 스피커가 높이 매달려 있고 캐나다 목수가 지었다는 2층 목조집에도 영상음악 감상용 대형 스크린과 음악 관련 물품으로 가득했다. 대형 스피커(B&W 매트릭스 801 Ⅲ)와 음향기기(크렐 KSL 프리앰프 / 매킨토시 MC500 파워 앰프 / 와디아 850 CD플레이어), 빼곡히 꽂힌 CD들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음반분류는 CD 고유번호·관리번호로 한다. 작곡가·제목·악기별·곡 장르별로 전산 입력돼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곡명, 반주자, 가수, 아티스트까지 나눠 입력돼 있어 언제 찾아도 바로 집어낼 수 있을 정도다. 그 가운데는 그가 25살 때 맨 처음 산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과 요요 마, 미샤 마이스키 등 가장 아끼는 스테레오 뮤직CD 10여장도 꽂혀있다. 이곳에 별장을 마련한 것도 음악에서 비롯됐다. 용담천 부근으로 앞쪽의 개천, 숲으로 우거진 뒷산 등 빼어난 자연환경에서 마음 놓고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가 경지의 클래식음악 마니아로서 음악을 진료에 어떻게 접목시키고 있을까. “수술실엔 스피커가 달려 있어요. 국소마취 기회가 잦아 환자가 안대를 쓰고 수술대에 누우면 누구나 불안해하고 공포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음악을 틀어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수술효과도 높아져 회복이 빠릅니다.”클래식음악을 처음부터 분석적으로 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듣다보면 감이 오고 친숙해진다고 했다. 음악을 접하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맑아진다는 얘기도 곁들였다.5남매(3남 2녀)의 맏이인 정 원장은 1972년 전남 광주 출신의 부인(손의선·59)과 결혼, 1남 1녀를 두고 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호텔컨설팅회사에 다니는 아들(정재형·34)과 일본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딸(정희영·35) 모두 결혼시켰다. 특히 사위(유종한·38)는 예원외고, 연세대 기악과 출신의 인천시향 수석 첼리스트로 정 원장의 대학 후배이자 음악적 호흡이 맞는 사이다. 시인이자 수필가, 음악 애호가인 ‘열정의 의사 정정만’의 쉼 없는 도전은 2008년 새해도 이어진다. 올 연말까지 창립될 (가칭)국민건강관리 영양기능학회의 리도로써 그의 역할이 기대된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31 00:00

노사연 <만남>“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만추이다. 가을걷이와 겨울을 준비하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결실을 계절을 맞아 갖가지 만남들도 잦다. 야유회, 등산대회, 체육대회 등에서 삶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어우러진다. 그런 모임에선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로 나가는 노사연의 <만남>노래가 곧잘 불린다. 부르기 쉬고 노랫말 뜻이 깊어 여러 모임에서 자주 애창되는 대중가요다. 194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대중음악 50년 사 베스트 50곡 중 40위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만남>이 만들어진 건 1986년. 21년 전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발표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 이 노래와 함께 모임 때 자주 불리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다.작곡가는 ‘노래 문외한’ 막내 이모부 <만남> 작곡가는 최대석 씨. 노래를 부른 노사연의 막내 이모부다. 미국서 사업을 하는 최 씨는 노래엔 문외한으로 알려져 흥미롭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록의 이 노래 작사가는 박신. 노래는 노사연이 많은 사람들과의 적극적 만남을 통해 가수가 됐다는 것을 잘 아는 작사가·작곡가의 합작으로 태어났다. 마치 <만남> 가사처럼 말이다.1978년 단국대 성악과 2학년생 신분으로 MBC주최 제2회 대학가요제에 출전, <돌고 돌아가는 길>(김욱 작사·작곡 / 4분의 3박자, 왈츠 곡)로 금상을 받아 가수가 된 노사연은 <만남>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공부와 노래를 겸해야하는 학생가수신분인데다 이렇다 할 곡마저 내놓지 못해서였다. 특히 대학 신입생 시절 첫 미팅 때 자신의 뚱뚱한 몸매를 본 남학생들이 던진 모멸감의 말로 충격 받아 결행한 무리한 살빼기에서의 후유증도 한 요인이었다. (노사연은 태어났을 때 4.8kg로 우량아였다.)그런 가운데 노사연이 가요제 입상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어느 날 담당교수가 그를 불렀다. “성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던지 택하라!”는 경고를 내린 것이다. 1977년 1월 경희대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떨어져 2차인 단국대 성악과에 2등으로 합격, 학교를 다녔지만 클래식보다 가요 쪽을 택해 가수 길을 걷고 있었던 터라 그는 전과를 결심했다. 어릴 때 이모인 대중가수 현미를 동경, “노래를 해볼까”하고 대학가요제를 지원해 입상한 그로선 중대한 선택이었다. 국문학과로 옮긴 노사연은 1983년 발표한 <님 그림자>(김욱 작사, 작곡 / 4분의 4박자, 트로트곡)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창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았으나 인기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초대받은 행사장에서 다른 여자가수들에게 출연순서를 빼앗기는 등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다. 개그맨 저리가라 할 만큼 웃겨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래하면서 장기인 재치·개그·유머로 부족함을 메워갔다. 10년의 무명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만남> 취입과 방송출연이 그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던 어느 날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다. 음반이 나온 지 한참 뒤의 일로 거기서 첫사랑인 여고 체육선생님과의 만남 얘기, “노사연! 너를 쭉 지켜봤는데… (아! 두근두근, 쿵쿵) 너 혹시…. 투포환 안 해볼래?”로 뒤집어지는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 코미디언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관중들을 웃겼다. 그를 처음 보거나 잘 몰랐던 사람은 가수보다 개그맨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어려워하며 자꾸 존댓말을 쓰더니 급기야는 상석으로 앉히더라고 했다. 노사연의 꾸밈 없는 모습에 <만남> 노래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1992년 <만남>으로 가수왕에까지 올랐다. 노랫말 구절처럼 “우연”이 아니라 그것은 가수데뷔 10년만의 “바람”이었다.그는 1957년 3월 3일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노양환 씨(1987년 작고), 어머니 김화선 씨(평양출신으로 북한 원로무용가 최승희 제자) 사이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 근무지 이동에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자랐다. 화천초등·중학교를 거쳐 화천실업고 1학년을 다니다 춘천여고에 재입학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그는 요즘 남편(가수 이무송)과 가끔 무대에 선다. KBS-1TV 주말 밤 음악 프로그램인 ‘콘서트 7080’에 부부가 나와 열창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기독교 신자로 어린 아들과 함께 교회에 다닌다. 그 곳에서 가족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며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해 눈길을 끈다. 인기 연예인 가족에다 구김살 없는 노사연의 구수한 입담까지 곁들여져 신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올 한해도 결혼, 미팅, 입학, 입사 등 만남의 의례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들 삶은 어떻게 보면 노사연의 노래 <만남>처럼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 마산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경남도민일보, 뉴시스, 시사저널 등에서 언론계 생활을 하는 ‘기자가수’다.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했다. 취입곡으로 <이별 없는 마산항> <마산포 순정> 등이 있다. 

소비라이프Q | 소비라이프뉴스 | 2008-07-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