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기 정신분석칼럼] 미국-이란 전쟁의 정신분석학적 이해
바믹 볼칸의 '선택된 트라우마와 영광'은 국가적 심리장벽 극복 효과를 주목 조상의 아픔을 위로하는 '집단적 애도'를 기록된 역사로 변모시킬 필요
[소비라이프 / 김진기 소비자기자]
전쟁과 ‘심리적 장벽’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방문하며 국제 정치사에서 유례없는 선언을 하였다. 그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70%가 심리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며,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본질적인 장애물이 영토나 자원 같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양측의 무의식에 깊게 뿌리내린 '심리적 장벽(Psychological Barrier)'임을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집단 간의 상호 불신과 공포가 어떻게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파괴적인 충돌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던져 주었다. 2022년 2월 24일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최근 2026년 2월 28일의 미국-이란 전쟁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쟁 이면에는 정치인들과 같은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인 공격성 심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믹 볼칸의 선택된 트라우마와 영광
오늘은 터키계 키프로스 출신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바믹 볼칸(Vamik Volkan)이 제시한 ‘선택된 트라우마(Chosen Trauma)’와 ‘선택된 영광 Chosen Glory)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이 갈등의 역사를 이해하고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대안을 찾아 보고자 한다.
먼저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트라우마'(Trauma)는 외부의 강력한 자극이 자아의 심리적 보호막을 뚫고 들어와 정신적 에너지의 평형을 파괴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개인이 감내할 수 있는 방어기제 수준을 압도하기에, 소화되지 못한 공포와 무력감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침범한다. 이로 인해 개인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재연하거나 재경험하려는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에 빠지게 되며, 이는 자아의 통합을 저해하는 심리적 파편으로 남게 된다.
즉, 일반적인 트라우마는 개인의 내면에서 처리되지 못한 채 현재를 오염시키는 외상적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외상이 집단으로 확장되어 정체성의 핵심이 된 것이 바로 '선택된 트라우마'(Chosen Trauma)이다. 바믹 볼칸이 정립한 이 개념은 특정 집단이 과거 타자에게 입은 굴욕이나 상실의 기억을 집단 결속의 핵심적 심리 표식으로 삼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선택된'이란 고통을 자발적으로 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극을 겪은 선조들이 이를 건강하게 애도(Mourning)하지 못한 채 후손들의 무의식에 복수와 명예 회복의 과업을 마치 은행에 입금하듯이 '예치'함으로써, 해당 사건이 소속 집단을 정의하는 상징적 서사로 선택되었음을 뜻한다.
미국-이란 전쟁을 통해서 본 선택된 트라우마와 영광
바믹 볼칸의 개념을 적용할 때, 각 국가의 정체성은 과거의 영광과 상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광대한 유산을 ‘선택된 영광’으로 삼아 나르시시즘적 자부심을 유지하지만, 1953년 서구 세력에 의한 모사데크 정권 붕괴를 겪으면서 외부 세력에 대한 근원적 불신을 낳는 ‘선택된 트라우마’가 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달 착륙을 인류사적 영광으로 선택된 영광을 누렸으나, 9/11 테러를 통해 난공불락의 자아가 무너진 상처를 박해 불안의 핵심을 겪게 된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를 기적 같은 영광으로 여기는 반면, '홀로코스트라는 절멸의 공포'를 트라우마로 간직하여 상시적인 방어 기제를 가동한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 성취를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택된 영광'으로 자부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과 이어진 분단은 주변국에 대한 경계심과 생존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라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러한 기억들은 현재의 갈등 상황에서 재활성화되어 각국의 행동을 결정하는 무의식적 동기가 된다.
선택된 트라우마와 영광의 치유
볼칸이 정립한 '선택된 트라우마'와 '선택된 영광'은 조상이 겪은 큰 슬픔이나 승리의 기억이 대를 이어 전해지며 집단의 정체성을 만드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면, 수백 년 전의 비극을 마치 오늘 겪은 일처럼 느껴 상대를 무조건 미워하는 '시간 붕괴'라는 병적인 분노를 일으킨다. 이는 조상들이 슬픔을 건강하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너희가 대신 복수해달라"며 마음의 짐을 후손에게 대물림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적인 현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분리하여 객관적인 역사로 바라보는 심리적 노력이 필요하겠다. 우리 사회가 조상의 아픔을 함께 충분히 슬퍼하고 위로하는 '집단적 애도'를 통해 트라우마를 마음 속 유령이 아닌 기록된 역사로 변모시켜야 한다. 이렇게 상처를 말로 표현하고 감정을 소화하는 충분한 애도의 작업을 거칠 때, 비로소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평화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바믹 볼칸의 세계 평화를 위한 제언
마지막으로 한 개인의 성장을 넘어 우리 공동체가 함께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바믹 볼칸의 통찰을 몇 가지 더 짚어보며 글을 맺고자 한다. 먼저, 어린 시절 사랑과 돌봄이 부족하여 형성된 '영아 정신병적 자아'는 마음이 조각난 상태로 머물게 한다. 이로 인해 세상을 '내 편'과 '적'으로만 나누는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빠지며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게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 사회가 따뜻한 요람처럼 안전하게 감싸주는 '안아주는 환경'이 되어 사람들의 불안을 먼저 달래주어야 한다. 또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유품에만 집착하는 '연결 대상' 현상은 성장을 가로막는 마음의 감옥이 된다. 이는 이별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두렵고 미안해서 생기는 일이다. 따라서 물건이라는 물리적 형태가 없어도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는 성숙한 이별 연습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인의 마음 병들이 모여 국가 간의 전쟁으로 번질 때, 볼칸은 '트리 모델'이라는 비공식 외교를 제안한다. 이 모델은 전문가 집단을 통해 갈등의 ‘뿌리’ 단계에서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공포와 상처를 먼저 분석한다. 이어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사회적 여론으로 나타나는 ‘줄기’를 세밀하게 관찰한 뒤, 마지막으로 지도자들이 갈등을 완화할 수 있도록 사회 각계의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구체적인 중재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가지’ 단계로 나아간다.
공식적인 협상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증오는 이처럼 마음의 상처라는 '뿌리'를 먼저 치료하고, 상대방을 나와 같은 공포를 지닌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담아내기'를 통해서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미국-이란 전쟁이 앞으로 얼마나 더 길어질지, 어떻게 전개될지,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바믹 볼칸의 말을 빌어 언급한 바와 같이 ‘선택적 트라우마와 영광’을 극복하고 인격의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며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트리 모델’의 섬세한 활동이 필요하다. 이를 통한다면 이 세계가 좀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 집단과 국가가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본 기자의 염원을 담은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