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떠도는 부(富)] 로마의 깔때기로 들어가는 카르타고의 부

카르타고의 비옥한 땅은 라티푼디움(대농장)으로 전락해 로마 귀족에 부를 가져다 줘... 카르타고의 멸망은 페니키아 문명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

2020-12-28     이강희 칼럼니스트

[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페니키아의 식민지로 시작해서 서지중해를 독점하고 지중해의 해상교역을 장악하기까지 카르타고는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 교역을 통해 쌓아 올린 카르타고의 신뢰와 수완은 긴 시간 동안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영원히 지지 않을 거 같았던 카르타고 시대의 변화는 막을 수 없었다. 떠오르는 강자였던 로마를 만나면서 그 기운을 조금씩 잃기 시작했다. 
 
지중해의 중심 시칠리아를 두고 벌인 1차 전쟁과 로마를 힘들게 한 한니발이 활약했던 2차 전쟁에서 모두 이긴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카르타고가 부를 쌓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던 수많은 해외식민지 역시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다. 
 
로마는 2차 포에니전쟁 이후 카르타고를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10여 년이 넘도록 로마의 영토에 있었던 한니발이 주었던 불안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에서 다시는 한니발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탄압하고 감시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강화를 맺으면서 해외에 있던 영토를 넘겨받은 것 외에도 해상교역에 필요한 해군을 해체시켰다. 더불어 로마의 승낙이 없이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도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어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날개가 꺾인 카르타고가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국가였다. 
 
여러 탄압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여전한 부를 누리고 있었다. 해군은 해체되었지만,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가 안전하게 바다를 지키고 있었기에 바닷길은 안전했다. 군사적인 힘은 잃었지만, 해상교역의 시스템이 잘 유지되고 있었던 덕분에 카르타고는 상인들의 중계무역을 통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거기에 농업생산력도 뛰어나 카르타고의 시민들은 부족함을 몰랐고 카르타고는 여전히 부유함을 상징하는 도시로 남아있었다.   
 
카르타고를 정복했던 비슷한 시기에 로마가 정복한 곳이 그리스다. 로마와 가까운 곳에 있어
철저한 감시를 받던 카르타고와 달리 그리스는 거리가 멀었고 로마에 비협조적이면서 반발도 심했다. 그리스를 토벌할 때마다 전쟁터로 나가야 했던 로마시민들의 불만은 컸다. 이때 그리스문화에 대한 혐오적인 태도와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카토가 로마시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그리스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에 대한 온건한 정책도 강경한 자세로 바뀌게 된다. 이때 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누미디아는 영토를 넓히려고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카르타고는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로마에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누미디아로부터 피해가 커지자 카르타고는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 맞서 싸웠지만 패하고 만다. 사실을 알게 된 로마는 카르타고에 즉각적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카르타고의 온건파는 전쟁을 막기 위해 시민들을 설득해 로마로 사절단을 보냈다. 허가받지 않은 전쟁을 한 것에 대한 사과와 강화조약에 대한 준수를 약속했지만, 로마의 온건파는 소수로 전락한 뒤였다. 강경파들은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모든 카르타고인을 해안에서 15km 떨어진 내륙으로 이주시킨다면 선전포고를 철회하겠다는 조건을 내놓았다. 이 조건에 분개한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와의 전쟁을 결정한다. 더 이상 용병을 고용할 수 없던 카르타고는 시민들이 뭉쳐 3년을 버텨내지만 결국 막강한 로마의 군단에 도시는 파괴되고 시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패배한 카르타고의 모든 것이 승리한 로마의 것이 되었다. 물질적인 것을 넘어 카르타고가 해상교역으로 익힌 항해술, 조선술과 로마보다 앞섰던 농업기술까지 부(富)를 만들어냈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직할령이 되었고 비옥한 땅은 라티푼디움(대농장)으로 전락해 로마 귀족에 부를 가져다주었다. 카르타고의 멸망은 단순히 카르타고만의 문제를 넘어 그들이 이어가던 페니키아 문명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