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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콩 자루는 돈 자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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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도는 부(富)] 콩 자루는 돈 자루가 되었다
  • 이강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1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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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이프/이강희 칼럼니스트] 1683년 7월 17일 빈을 점령하기 위해 포위했던 오스만튀르크(이하 오스만)의 10만 병사는 1683년 9월 12일 유럽연합군에 패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해 가져왔던 물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약 60일 동안 지속된 공방전이다 보니 챙겨온 군수물자가 많았는데 그들이 놓고 간 물건 중에 갈색 자루 수백 개도 있었다. 안에는 콩처럼 생긴 것이 담겨있었다.
 
이 콩은 6~7세기경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양을 치던 어린 목동 '칼디'가 발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525년 예멘을 멸망시킨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에 의해 예멘으로 전해졌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당시 홍해 제해권을 가지고 있던 악숨 왕국은 예멘에서 재배한 콩이 주변 지역과 교역에서 인기 품목이 되자 다른 지역에서는 재배하지 못하도록 콩의 종자를 볶아서 수출했다.

이로 인해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 콩은 유럽에서 재배되기 전까지 400여 년간 예멘에 독점적인 부(富)를 안겨준다. 예멘이 종자와 묘목을 관리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부(富)를 대물림하는 것이었다. 볶은 콩을 갈아 위에 물을 부어 내려 마시던 이 음료는 후에 카흐와(quhwa)와 카흐베(kahve)로 불리며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네덜란드어로 코피(koffie)라 불린 음료는 1582년 ´모르겐란더의 쌀´이라는 저서에서 ‘커피(coffee)’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와인이 로마 세력의 확장과 함께 했듯 아랍지역의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면서 커피는 아라비아반도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남유럽까지 전해지게 된다.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동방무역의 거점으로 알려진 베네치아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입된다. 그러다 보니 이슬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톨릭에서는 이를 악마의 콩이라고 부르며 저주했다. 심지어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금해 달라는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1600년경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커피를 맛본 뒤 이 음료를 이교도만 마시도록 하기에는 아깝다며 반대를 무릅쓰고 커피에 축복을 내렸다는 풍문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후 커피는 유럽에 급속한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돈을 버는 수단이 되었다.

커피를 수입에 의존하던 초기에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커피의 양이 증가하는 만큼 커피를 생산해서 수출하던 예멘의 부(富)는 증가했다. 커피 소비량만큼이나 교역량이 증가하다 보니 무역항인 모카의 이름까지 유명해져 유럽에서 커피와 모카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커피를 유럽으로 실어 나르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중계무역만으로도 돈을 벌었지만 원두의 값어치를 알았기에 예멘이 쌓아가는 부의 크기가 큰 만큼 이를 바라보던 네덜란드의 욕심도 커졌다. 예멘의 독점적인 지위를 깨기 위해 네덜란드 상인 피터 판 덴 부르크는 위험을 무릅쓴다. 1616년 예멘의 항구 모카에서 볶은 커피를 가지고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배편으로 예멘에서 수출이 금지되었던 종자와 묘목을 가지고 온다. 유럽에 뿌리내린 커피나무는 이후 새로운 유럽 커피 역사를 쓰게 된다. 가격경쟁력이 생긴 네덜란드 커피를 찾는 사람은 증가했고 예멘에서 수입되는 원두의 양이 줄어드는 만큼 네덜란드 이익은 증가했다. 이는 새로운 유행을 낳았고 가까운 잉글랜드를 비롯해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도 커피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636년 차가 보급되었지만 커피의 인기를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퇴각하며 놓고 간 콩자루는 빈(Wien)에 커피하우스(Coffee house)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계기였다. 유럽 전역에 빈 스타일의 커피하우스가 퍼졌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잉글랜드에서는 부인이 커피를 마시느라 남편이 집에 오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1680년대 인구 50만이었던 런던에 3천여 곳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는 점을 봤을 때 소비되는 커피 양과 그로 인해 움직이는 돈은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무역상들은 새로운 무역을 위해 투자 유치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보험이 탄생한 곳이 커피하우스였다. 1670년 프로이센에도 커피가 전해지게 된다. 여성은 커피하우스에 갈 수 없어 여성의 인기를 끌지 못했던 잉글랜드와 달리 프로이센에서는 여성의 음료로 인기였다. 커피를 수입하던 프로이센은 과도한 소비량으로 많아진 수입 물량이 국고 유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1777년 프리드리히 2세는 일시적이나마 커피 금지령을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한 나라의 재정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유럽에서 커피의 인기 못지않게 움직이는 돈의 크기는 상당했다.
 
사치스러운 기호 식품이던 커피는 시간의 여유가 많은 귀족이나 상류층에 진입하기 시작한 자본가가 즐기던 음료였다. 신분을 상징하기 위한 커피를 즐기려고 사용하는 돈도 꽤 많았다. 한 잔의 커피로 테이블에 놓이기까지 재배부터 운반까지 모든 과정은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거리였고 그로 인해 부(富)를 쌓은 이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1600년대 5억 8천여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1년 월드메터 기준 79억에 육박하고 있다. 인구 못지않게 당시에 비해 커피를 즐기는 사람의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많은 사람이 즐기는 커피로 인해 움직이는 뭉칫돈의 크기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원유 다음으로 거래량이 많은 것이 커피 원두라는 사실은 이를 정확히 뒷받침한다. 커피는 단순한 기호음료의 가치를 넘어 누군가에게는 막대한 부(富)는 쌓는 중요한 재화다. 독자분도 자신만의 부(富)를 쌓을 수 있는 재화를 발견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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