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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 걸음 내디딘 대한민국 소비자 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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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 걸음 내디딘 대한민국 소비자 권익
  • 이소라 기자
  • 승인 2020.11.10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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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소송제·징벌적 손해배상제 추진
집단적 피해의 효율적 구제와 예방 도모, 책임 있는 기업 활동 유도 위해 마련

[소비라이프/이소라 기자] 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상법 제정안이 입법예고되며 소비자 권리 찾기가 현실에서 이루어질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소비자 권익 도모 위한 법 실현
지난 9월 28일 법무부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모든 분야로 확대 추진하는 ‘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소비자단체들이 두 팔 들어 환영했다. 

이번 개정안은 집단적 피해의 효율적 구제와 예방을 도모하고 책임 있는 기업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로써 가습기살균제 피해, 디젤차 배기가스 조작, 사모펀드 부실판매 등의 대규모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할 수 있고 악의적 가짜뉴스로 피해자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언론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집단소송법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분야 제한을 없앴다는 점이다. 피해자 50인 이상 모든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집단소송이 가능하도록 했다. 피해자 일부가 소송을 제기해 배상 판결을 받으면 모든 피해자가 함께 구제받을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역시 개별 법률이 아닌 상법에 규정함으로써 대상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영업으로 하는 기본적 상행위뿐만 아니라 영업을 위한 보조적 상행위까지 포괄함으로써 영리활동 관련 대부분 행위가 적용 대상이 될 전망이다.

손해배상액 규모 역시 늘어났다. 상법 개정안에서는 상인이 고의 또는 중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 손해배상액을 ‘손해의 5배를 넘지 않는 범위 이내’로 규정했다. 기존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된 대부분의 법에서는 손해배상액 범위가 3배까지다. 이는 개별 법률에 우선 적용되며,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배제·제한하는 특약은 무효다.

법률 적용 대상 확대 외에도 많은 점이 달라질 예정이다. 법조계에서는 특히 ‘한국형 증거개시제’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집단소송 제기 전 집단소송으로 다투어질 사실에 관해 증거조사를 할 수 있는 제도다. 신속한 절차 진행과 증거 확보를 위해 증거보전 및 증거유지명령도 도입했으며, 이에 대한 불복은 제한된다. 이렇게 수집된 증거는 집단소송절차에서 이뤄진 증거조사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집단소송법안에는 ‘국민참여재판’ 제도도 적용된다. 집단소송 허가 결정을 하는 제1심 사건에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집단적 분쟁은 사회적 의견을 반영해 신뢰성 있는 결과를 얻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배심원 평결과 법원 판결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법무부는 “현대 사회는 다수에 대한 피해 발생 가능성이 있는데도 개별 피해의 회복이 어려운 제도적·현실적 한계가 있다”라며 “집단적 피해의 효율적 구제와 예방을 도모하고 책임 있는 기업 활동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소비자 단체들은 개정안이 입법예고되자 성명서를 발표하며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금융소비자연맹(이하 금소연) 조연행 회장은 “소비자 권익 법이 제정돼야만 소비자들의 권리를 올바르게 찾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집단소송제, 입증책임의 전환, 징벌배상제 등이 마련됨에 따라 비로소 우리나라도 소비자 주권을 확보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제계와 언론계 앞장서 반발
이번 정부 들어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소송 남발로 인해 기업 활동이 위축된다는 반발 때문이다. 소비자 권익을 높이는 측면이 있지만 기업들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반대 여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미국과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실제로 2003년 뉴욕 연방 지방법원에 맥도널드의 햄버거를 먹고 비만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소송에서 소비자들이 패소하긴 했지만 해당 업체는 소송 해결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쏟았다.

변호사들이 집단소송을 부추겨 기업을 압박해 수익을 올리는 사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집단소송 참여자들이 많이 모일수록 변호사들은 청구 금액을 부풀리고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옥석을 가려 문제 기업만 처벌하면 좋은데, 보완대책 없이 멀쩡한 기업에도 소송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기업에 미칠 파급력이나 부작용 등을 사전에 면밀히 검토하고 논의하는 절차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언론계는 찬성과 반대 입장이 맞서고 있다. 지난 9월 28일 한국신문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3단체는 “헌법상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악법으로 규정해 강력히 규탄하며 법안 도입과 개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악의적 가짜뉴스라는 모호한 잣대로 언론에 징벌적 처벌을 가하겠다는 것은 민주국가 정부의 발상이라고는 믿기 힘들다”며 “판단 주체가 얼마든지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 비판적인 보도를 악의적 보도로 규정한 후 언론 탄압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매우 크다”고 비판했다.

언론노조도 반대 입장에 힘을 더했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전문위원은 “독일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시행하지만 중재기구를 거친다. 우리도 언론중재위원회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의 시정명령을 받을 수 없을 때 법원으로 간다”라며 “하지만 앞으로 이런 단계 없이 바로 피해 구제를 위한 판단을 법원에 맡긴다면, 일부 대형 언론사는 무책임한 보도를 해놓고 ‘언론 탄압’이라며 이슈 몰이를 할 것이다. 반대로 작은 언론사들은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전검열이 강화되는 효과가 발생해 보도가 위축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언론의 무분별한 의혹 제기와 오보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는 상황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며 개정안을 찬성하는 입장도 있다. 권혁남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언론들이 무책임하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보도하거나 의도적 왜곡 보도를 해 많은 시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언론의 횡포에 제동을 건다는 측면에서 이번 개정안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도 “시민들이 바라보는 언론의 신뢰도가 엄청나게 떨어진 상태에서 저널리즘을 복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소비자 권익의 발로
소비자기본법은 소비자 권익을 증진하기 위해 소비자의 권리와 의무, 국가와 사업자의 책무를 정해 소비생활의 향상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 법으로 소비자 권익을 증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국내에서 단체소송으로 소비자를 구제한 적도 집단분쟁조정으로 민원을 해결한 적도 없다. 따라서 소비자기본법에 마땅히 권익 증진을 위한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입증책임의 전환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소연 조연행 회장은 “분산되어 있는 소비자 권익 내용을 소비자기본법에 포함한다면 안전과 생명, 재산상 피해를 주는 모든 경우가 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며 “법명도 ‘소비자 권익 증진법’으로 바꿔야 진정한 입법 목적이 드러난다”라고 전했다.

2014년 발생한 카드사 고객정보 유출사태는 소비자 권익 증진법을 강조하는 이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법원은 카드사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원고들에게 각 1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배상 대상은 공동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에게만 한정됐다. 소송을 제기한 이들이 약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카드사들의 배상액은 10억여 원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출된 정보가 약 1억 건으로 당시 경제활동 인구의 대부분이었던 데 반해 피해구제 대상과 총 배상액은 턱없이 적었던 셈이다. 카드사들은 지난 9월 형사사건에서도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으로 유죄를 확정받았는데, 벌금은 1,000만~1,500만 원에 불과했다.

만약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됐더라면 카드사 정보 유출 사태에도 제대로 된 배상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법무부의 설명이다. 집단소송에서 승소하면 원고로 참여한 이들뿐만 아니라, 정보가 유출된 모든 피해자가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되면 배상액도 최대 50만 원까지 가능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만 배상이 늦어지고 있는 폭스바겐 사태도 집단소송제 등이 도입되면 달라질 주요 사례로 언급된다. 폭스바겐은 이른바 ‘디젤 게이트’ 보상금으로 미국에는 1인당 최대 1,100만 원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법안이 없던 독일의 경우 2018년 폭스바겐 집단소송 특별법을 통해 손해배상이 이뤄졌다. 하지만 한국 고객에게 이뤄진 배상은 100만 원짜리 쿠폰 제공이 전부다. 폭스바겐의 미온적 대응은 우리나라에 집단소송제나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미비하기 때문이라는 게 법무부의 분석이다.

이 외에도 가습기 살균제, 라돈 침대 등 집단 피해 사례에 대한 효율적 구제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집단소송은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등 증권 분야에서만 가능하다. 경제적 손해와 비교할 수 없는 건강 및 생명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해서는 구제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시민사회에서도 이윤 획득을 위해 자행되는 기업의 악의적 위법행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방이나 규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금소연 조연행 회장은 “법이 제정되면 기업들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며 소비자를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며 “아직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소비자 권익 확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개정안을 통해 소비자 스스로 권리를 찾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소비라이프Q 제157호 커버스토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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