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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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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아십니까?
  • 김소연 기자
  • 승인 2020.03.31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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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조선시대 유교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 현량과를 신설하고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 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 소비라이프 / 김소연 기자 ] 500년 만에 조선시대 개혁가인 조광조(趙光祖ㆍ1482~1519)가 부활했습니다. 조광조에 대한 공부가 열풍처럼 뜨겁게 다시 번지고 있습니다. 

4.15 총선을 앞두고 조국(曺國)을 젊은 개혁가 조광조에 비유하면서 조광조의 역사적 실체와 진실에 대해서 갑론을박 논쟁이 한창입니다. 이에 정암 조광조를 한 걸음 더 들어가 제대로 알아 보고자 합니다. 그의 개혁정신의 배경과 억울함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과 그의 절명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주(走)+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대역죄(大逆罪)로 말도 안되는 간계로 누명을 씌워 정적을 제거한 사건이 주초위왕 사건입니다.
‘주(走)+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대역죄(大逆罪)로 말도 안되는 간계로 누명을 씌워 정적을 제거한 사건이 주초위왕 사건입니다.(사진은 블로그에서 캡쳐)

중종(中宗) 10년째인 1515년 과거시험인 알성문과가 열렸습니다. 중종이 낸 시험 문제는 “공자(孔子)가 자신이 등용된다면 3년 이내에 정치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행하였으며 괄목할만한 결과가 이었겠는가? 또한, 내(중종)가 즉위한 지 10년이 지났건만 나라의 기강과 법도가 바로 서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라 보는가?”라는 논술 문제였습니다.

조광조의 답안은 중종의 눈길을 확 끌어 당겼습니다. 그 답안의 서두는 “하늘과 사람은 근본이 하나이며 하늘의 이치가 사람들에게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로 시작 되었는데,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무릎을 탁치게 만들었습니다. 조광조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원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조광조는 유학의 적통을 3대째 이어받았는데 알성문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중종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열일곱 되던 해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찾아가 제자가 됐으며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공부했습니다. 김굉필의 스승은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인 김종직(金宗直ㆍ431~1492)선생으로 포은 정몽주(鄭夢周ㆍ1337~1392)와 야은 길재(吉再ㆍ1353~1419)가 스승입니다.

조광조는 왕에게 정치의 이념을 유교(儒敎)로 확실히 삼고 그 이념대로 실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가로 지금도 추앙받는 조광조(趙光祖ㆍ1482~1519)였습니다.
조광조는 왕에게 정치의 이념을 유교(儒敎)로 확실히 삼고 그 이념대로 실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가로 지금도 추앙받는 조광조(趙光祖ㆍ1482~1519)였습니다.

한양조(趙)씨인 그의 집안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명문가였습니다. 고조부가 종1품 좌찬성을 지낸 조온, 부친(조원강)은 성종 때 종6품 사헌부 감찰을 지냈습니다. 

1515년11월15일 진사 신분이던 조광조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행해진 강경(講經ㆍ경전 강의)에 참가했는데, 중종의 목적은 성균관 유생들을 테스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날 조광조가 강(講)한 것은 ‘중용’이었는데 중종의 평가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사림의 영수로 지목된 조광조는 1515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눈이 아찔할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게 됩니다.

조광조가 대사헌(大司憲, 현재의 검찰총장)이 된 후 훈구파의 쌍두마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소인배로 몰리자 그들은 “조광조를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마음먹고, ‘기묘사화’를 일으킵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앞장서 추천제로 관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고, 중종반정 때의 공신 가운데 76명의 공적을 없애[즉, 삭훈(削勳)] 버리면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현량과로 28명을 선발했는데 이 가운데 23명이 친(親)조광조파였으니 훈구대신들은 “저 친구들이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 세력을 늘린다”고 의심했을 게 뻔합니다. 거기다 훈구파의 공적은 삭제됐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지요. 문제는 그 직전까지 조광조 같은 젊은 선비들 편에 섰던 중종이 오히려 밀지(密旨)를 내려 홍경주-남곤-심정 같은 훈구대신들을 부른 뒤 조광조 일파를 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가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입니다. 

바로, 이때 등장하는 게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입니다. ‘주(走)+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뜻인데, 이건 대역죄(大逆罪)입니다. 주초위왕은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나뭇잎에 꿀을 바른 뒤 벌레들이 갉아먹게 해 만들었습니다. 현세에 보면 말도 안되는 간계로 누명을 씌워 정적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하루아침에 역적이 된 조광조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당시 관노(官奴)였던 문후 종의 집으로 유배를 갑니다. 유배 한 달 여만인 1519년 12월20일 조광조는 중종이 내린 사약(賜藥)을 마시고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조광조는 죽기 전 시 한 수를 남깁니다. 훗날 세상은 그것을 절명시(絶命詩)라고 합니다. 숨지기 전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최후 변론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네)
天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의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 내용을 발췌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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